<p>1996년 겨울 쯤으로 기억한다.</p><p>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으로 인해 고생을 하다</p><p>오랜만에 입항해서 부사관능력평가를 치르고</p><p>우수한 성적을 거둔 덕분에 기분 좋게 직별 회식을 하게 됐다.</p><p>당시 나는 1전단 정문 옆의 BEQ에 살고 있었는데,</p><p>퇴근 후 회식을 나가기 전 오랜만에 밀린 빨래를 하기 위해</p><p>입고 있던 근무복에서 계급장과 명찰을 떼어내곤 세탁실로 갔다.</p><p>그러나 이미 누군가가 세탁기를 쓰고 있는 상황이라</p><p>들고 간 세탁바구니를 세탁기 옆에 두고 회식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p><p><br></p><p>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 입고 세탁실로 내려가보니</p><p>그새 누군가가 새치기를 한 모양인지 세탁기가 새로 돌고 있었다.</p><p>회식 끝나고 와서 늦게라도 세탁기를 돌릴 생각으로 빨래를 그대로 두고 회식장소로 향했다.</p><p><br></p><p>그날의 술자리는 참으로 거나했다.</p><p>부사관 능력평가를 잘 본데 대한 축하의 의미로</p><p>사통장을 비롯한 직별 선후배들이 1차를 샀고</p><p>부사관 능력평가를 잘 보도록 도와준데 대한 감사의 의미로 내가 2차를 샀다.</p><p>그리고 취기가 오른 김에 사통장이 한창 꽂혀서 다니던 낙지집엘 가서</p><p>낙지와 죽엽청주로 3차까지 했다.</p><p>거기다 아는 분이 운영하시는 술집에서 맥주로 입가심까지 했다.</p><p>후배와 함께 BEQ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만취 상태여서 세탁기를 돌릴 여력도 없었다.</p><p>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들어왔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질 않는다.</p><p><span style="font-size: 10pt; line-height: 1.8;">정신이 들었을 때는 누군가가 내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span></p><p><br></p><p>"선배님, 근무복 어딨습니까?"</p><p><br></p><p>나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그대로 세탁실로 직행했다.</p><p>그리고는 어제 세탁을 하지 못한 근무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p><p>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후배는 나를 깨우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고 한다.</p><p>때리고, 꼬집고, 잡아 당기고, 일으켜 세우기까지 했는데도 일어나지 않자</p><p>최후의 수단으로 근무복을 찾아서 강제로 입힌 후에 업고 갈 생각이었다고 한다.</p><p>그런데 근무복을 찾아도 보이질 않아 내게 근무복의 행방을 물은 것인데,</p><p>그 소리에 벌떡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쌩~하고 뛰더란다.</p><p><br></p><p>후배녀석은 늦었다며 계속해서 나를 재촉해댔다.</p><p>급하게 근무복을 챙겨 입은 나는 그대로 BEQ를 나와 달리기 시작했다.</p><p>술 기운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뒤에 쫓아오며 나를 재촉해대는 후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p><p>그렇게 나는 BEQ를 출발해 BOQ를 지나고, 수리창을 지나고, 전단을 지나고, 복지단을 지나</p><p>부대 맨 안쪽에 있는 7부두까지 거침없이 달렸다.</p><p>아침부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채로 달려가는 내가 신기했던지</p><p>지나는 사람마다 나를 쳐다봤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p><p><br></p><p>배에 도착하니 갑판장이 나를 보고 흠칫 놀란다.</p><p>시계를 보니 아직 늦진 않았다.</p><p>나는 갑판장께 활기차게 인사를 하고 침실로 들어갔다.</p><p>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p><p>후배가 내 근무복 바지를 들고 들어오기 전까진...</p><p><br></p><p>나는 근무복 상의와 동잠바를 입고 모자를 쓰고 단화를 신고,</p><p>청바지를 입고 부대를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p><p>후배는 그런 나를 쫓아오며 바지 입고 가라고 소리를 지른 것인데,</p><p>나는 늦었다고 재촉하는 줄 알고 더욱 가열차게 뛴 것이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