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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humorbest_727630
    작성자 : SowHat
    추천 : 45
    조회수 : 2053
    IP : 121.149.***.18
    댓글 : 7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8/09 03:18:57
    원글작성시간 : 2013/08/08 18:42:45
    http://todayhumor.com/?humorbest_727630 모바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개혁, 대동법.
    <div><font face="궁서">(대동법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준 글인 것 같아서,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font></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대동법을 이해하기 위해선 대동법이 왜 필요했는가를 먼저 이해해야합니다.</div> <div><br /></div> <div>현대에는 모든 세금을 돈으로 내지만,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당시는 농업이 국가 주요산업이고 화폐가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세금을 쌀로 내었습니다. 그런데 이 쌀 이외에 공납이라하여 해당 지역의 특산품을 진상해야했지요.</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br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쉽게 말해 문구점을 하는 김씨 가족의 세금이 30만원이라면 그 30만원 이외에 책과 연필을 세금으로 내야합니다.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그런데 김씨가족의 사정에 의해 문구점을 그만두게 되어서 더이상 책과 연필을 세금으로 낼 수가 없습니다.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김씨 가족에게 책과 연필을 세금으로 내길 요구하고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김씨가족은 어쩔 수 없이 책과 연필을 다른 곳에서 사서 국가에 진상합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이런 일이 조선 팔도 전국에서 마을 단위로 일어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점점 더 케이스가 많아졌습니다.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당연히 이런 현상을 이용해 먹는 무리가 생깁니다.</span></div> <div>그 전문업을 방납(防納)이라 합니다.</div> <div><br /></div> <div>방납은 국가가 요구하는 해당 물품을 진상할 수 없는 백성에게 그 물건을 비싼 값에 팔면서 이득을 취하지요.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덕분에 백성은 기존 세금 + 방납에 의한 폭리까지 감수해야합니다.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거기에 시간이 지날 수록 요구 공물의 수는 늘어나기까지 하고 없던 공물이 생겨나기까지 합니다.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폐단이 구조화되어버리고 국가 세금보다 공물을 진상하기 위해 방납에 지급하는 돈이 더 비싼,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상황이 발생합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조선 시대 지식인(이며 동시에 기득권)이 이런 현상을 모를리가 없었습니다만,</span></div> <div>이런 폐단에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집단은 당연히 기득권이기에 스스로의 권리를 놓을리가 없었습니다.</div> <div><br /></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이 때 이런 현상에 처음 제대로 일침을 가한 건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로 불리워진 율곡 이이의 만언소에서였습니다.</span></div> <div>만언소의 내용 중 하나가 연산군 때 무너진 공납으로 인해 그 폐단이 심해졌기에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비록 선대에 정한 제도라도 그걸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겁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만언소는 지금봐도 엄청난 명문의 글이고 당시 시대의 문제점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한 글인데,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선조는 이 글을 보고 극찬을 합니다.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다만,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며 개혁적인지라 당장에 모두 시행할 순 없다 말하면서도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만언소를 다른 대소신료들에게 모두 돌려보게 하고 의논케 합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이런 이이의 뜻이 통했는지 후에 조정의 지식인은 공물에 대한 폐단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습니다.</span></div> <div>폐단의 해결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br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1. 공물 개혁론 : 공물의 폐단을 바로잡고 해당 지역에 맞는 공물을 다시 조사해 바치게 하는 것.</span></div> <div>2. 대동법 : 공물이고 뭐고 모든 세금을 쌀로 통일 해 바치게 하는 것.</div> <div><br /></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딱 보면 후자가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전자가 훨씬 쉬운 방법입니다.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전자를 하기 위해선 해당 지역의 공물조사만 하면 되지만, </span><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후자를 하기 위해선 전 국토의 토지 조사를 모두 다시 해야하기 때문입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쉽게 말해 전자를 하기 위해선 김씨 집이 무슨 일을 하고 박씨 집은 무슨 일을 하는지만 조사하면 되는데,</span></div> <div>후자를 하기 위해선 김씨 집 박씨집의 모든 수익과 그 사업 규모를 죄다 조사해야하며 그걸 수치화 해야합니다.</div> <div><br /></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현대에도 토지조사를 전국에 걸쳐 하는 게 쉽지 않은데 전근대 시대에 그걸 하는 건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span></div> <div>둘 다 사회의 발전을 위한 공론이었지만, 정책의 정도가 비교될 수 없을만큼 엄청난 갭이 있었지요.</div> <div>개혁 자체를 싫어하는 사대부(기득권)는 논외로 치더라도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개혁에 동의하는 사대부조차 의견이 엇갈렸고 특히 대동법의 경우엔 그 정도가 너무 급진적이었습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당연히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 쪽 의견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지요.</span></div> <div>그렇기에 대동법은 아주 조심스럽게 시행됩니다.</div> <div><br /></div> <div>광해군 즉위년에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로 시작합니다.</div> <div><br /></div> <div>내용은 이렇습니다. </div> <div>세금을 쌀로만 걷은 뒤 국가에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div> <div>국가에서 걷은 쌀로 방납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게 하자는 거지요.</div> <div>그럼 국가를 상대로 거래를 하다보니 방납인은 폭리를 취할 수 없고</div> <div>백성 역시 세금을 쌀로만 내면 되니 방납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div> <div><br /></div> <div>거기에다가 세금의 기준이 토지만으로 이루어지다보니 땅이 적으면 세금 부담이 적어지고</div> <div>땅이 없으면 부담이 미미하거나 없게되니 진실로 백성을 위한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div> <div>이런 대동법은 처음에 선혜청이란 이름으로 경기도 지역에서만 시험 시행됩니다.</div> <div><br /></div> <div>경기도 선혜청에서 쌀로 세금을 걷게 된 건 시행부터 백성들의 환영을 받게 됩니다. </div> <div>반면 관리들 입장에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제도여서 반대하는 의견이 점점 많아집니다.</div> <div>앞에서 말했듯 토지조사를 다시 해야하고 각 지역별 계층별 이해관계가 갈리기 때문입니다.</div> <div><br /></div> <div>그러나 다른 지역은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지역에 이 제도가 시행되길 기다렸고</div> <div>그걸 가장 적극적으로 요구한 지역은 강원도였습니다.</div> <div><br /></div> <div>선혜청 작미가 시행된 지 2년 째,</div> <div>강원도 관찰사 홍서봉이 조정에 요구합니다.</div> <div>강원도도 경기도처럼 쌀로 세금을 내게 해달라는 거지요.</div> <div>사실 강원도란 지역은 지역 특성상 쌀 농사가 활성화될 수 없었기에 공납의 정도가 굉장히 심했던 지역입니다.</div> <div>공납이 심하다는 건 방납의 폐단이 가장 극심한 지역이라는 것이기에 이 대동법의 시행을 가장 간절히 기다린 곳이었지요.</div> <div><br /></div> <div>그리고 선혜청에선 그 의견을 받아들여 강원도에서 시행할 때의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합니다만..</div> <div>최종 결제를 담당하는 광해군은 그 의견을 거절합니다.</div> <div>작미로 세금을 걷는 걸 경기지역에만 하는 건 그래도 괜찮지만 다른 지역으로 확장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div> <div>다른 지역도 확장 된다면 전국에서 그걸 요구할 테고 그 끝에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될 거라며 반대한 것입니다.</div> <div>실제 광해군은 선혜청을 일시적인 관청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은 듯 하기도 합니다.</div> <div><br /></div> <div>광해군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오항녕 교수지만,</div> <div>오항녕 교수의 대동법에 대한 시각을 빌리면 광해군의 행동이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div> <div><br /></div> <div>자동차를 고치기 위해선 시동을 끄고 차를 고치면 됩니다.</div> <div>하지만 사람을 고치기 위해선 사람을 껐다가 킬 수 없는 법입니다.</div> <div>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고쳐야한다는 거지요.</div> <div><br /></div> <div>정책도 이와 비슷합니다.</div> <div>정책을 개혁하기 위해선 정책을 중단할 수가 없지만,</div> <div>다만 정책이 중단되었다는 가정을 하고 개혁을 해나가는 것입니다.</div> <div><br /></div> <div>이렇다보니 이론과 실제 사이에선 괴리가 발생할 수 밖에 없고 그 괴리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합니다.</div> <div>아마 광해군은 대동법 개혁에 의한 이익보다 그 충돌에 대한 손실이 더 크다 생각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div> <div>아니, 광해군뿐 아니라 대동법에 반대한 모든 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div> <div><br /></div> <div>여하튼 광해군이 반정으로 물러날 때까지 대동법은 경기도 지역 밖으로 벗어나지 못 하고 15년 동안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되지요.</div> <div><br /></div> <div>그렇게 정체된 대동법은 인조반정에 의해 집권한 서인세력에 의해 다시 시작됩니다.</div> <div>사실 여기엔 정치적인 의도가 많이 가미되어 있었을 겁니다.</div> <div>반정으로 광해군을 끌어 내렸으면 행동을 정당화할 이유가 필요했고 그 이유중 하나가 민생이었습니다.</div> <div>광해군 시기에 궁궐공사로 피폐해진 민생을 다독일 필요가 있었는데,</div> <div>궁궐공사를 멈추는 걸론 한계가 있었지요. 즉,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고 그게 대동법의 확대입니다.</div> <div><br /></div> <div>말년에 진정 꼴통같았던 인조도 반정으로 즉위한 직후엔 </div> <div>광해군보다 훌륭한 왕이 되어야하겠다는 각오 때문인지 진심으로 민생을 돌보기 위해 상당한 고민을 합니다.</div> <div>경연을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하면서 대동법에 대해서도 아주 심도있는 토론을 하지요.</div> <div><br /></div> <div>풍족한 토지를 가지고 있던 충청, 전라, 경상도 지방과 다르게 위에 이야기했듯</div> <div>강원도는 대동법의 시행을 간절히 원했고 인조 역시 강원도의 대동법 확대에 찬성하는 결론에 이릅니다.</div> <div>또한 충청, 전라, 강원도 지방에 대동청을 설치하여 대동법 확대의 기반을 다지기까지 합니다.</div> <div><br /></div> <div>하지만 광해군 때의 기득권이 반정으로 사라졌다고 해도,</div> <div>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자들 역시 권력을 잡으면 똑같이 기득권이 됩니다.</div> <div>기득권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싫어합니다.</div> <div>당연히 대동법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리가 없었습니다.</div> <div><br /></div> <div>대동법에 가장 크게 반대했던 인물은 좌의정 윤방이었습니다.</div> <div>그는 대동법은 민간이 불편하게 여기니 대동법을 가장 편리하게 여기는 강원도만 빼놓고 모두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지요.</div> <div>그 근거는 공물은 기한을 두지 않고 받는 반면 대동법은 쌀을 기한을 정하고 받습니다.</div> <div>그런데 그 기한에 갑자기 쌀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한순간에 마련하는 것이냐는 거지요.</div> <div>또한, 그 많은 쌀을 배로 운반하다가 생기는 부작용 역시 우려하는 것이었습니다.</div> <div><br /></div> <div>이 때문에 대동법은 폐지되는 듯 했으나.. 조선 특성상 한 번 시행된 법은 쉽사리 없앨 수가 없었습니다.</div> <div>특히나 관청의 개혁정도가 아닌 경기도, 강원도 전체에 이미 적용해버린 대동법을</div> <div>다시 공납의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공물을 폐지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는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죠.</div> <div><br /></div> <div>그 때문에 다행히 경기도와 강원도의 대동법은 계속해 유지해나갑니다.</div> <div>그런 사이에 대동법의 확대를 가장 강력히 주장한 인물이 있습니다.</div> <div>대동법의 아버지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인물 '김육'입니다.</div> <div><br /></div> <div>김육은 광해군 대에 자신의 스승인 성혼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하고</div> <div>결국 정인홍과의 갈등으로 관직에서 물러납니다.</div> <div>그러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추천으로 발탁되어 관직에 다시 오르게 되고</div> <div>헌납, 사간, 이조 정랑, 부수찬, 동지사 등을 지내다가 인조 16년 충청감사로 발탁됩니다.</div> <div><br /></div> <div>감사로 발령된지 3개월만에 김육은 도내 토지 넓이를 모두 측정하여</div> <div>당시 화폐로 쓰였던 쌀과 면포를 기준으로 계산하고</div> <div>대동법이 시행되었을 시 조정이 얻게될 이득을 산술적으로 풀이해 자세히 고하지요.</div> <div><br /></div> <div>또한 풍년과 흉년에 따른 면포와 쌀의 기준을 조정하여</div> <div>흉년에는 무명을 기준으로 하여 쌀 값을 따르게 하고</div> <div>풍년에는 쌀로 무명 값을 따르게 하여 풍/흉년에 따른 세금 부담의 정도를 최소와 하는 방법까지 건의합니다.</div> <div><br /></div> <div>이쯤 되면 대동법의 구체적인 사안이 거의 완성되었다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지만,</div> <div>이 때 인조는 왕이 된지 16년이나 지난 시점이고 병자호란까지 겪어 초심은 이미 사라졌으며 </div> <div>당연히 대동법의 확대를 반기지 않았습니다.</div> <div><br /></div> <div>사실 인조뿐 아니라 거의 모든 대신이 대동법을 반기지 않았습니다.</div> <div>그게 그들이 기득권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div> <div>아까 말했던 이론과 현실사이에서 생기는 실질적 문제점들이 계속해서 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div> <div>하지만 그 사이에서 대동법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대부 역시 존재했습니다.</div> <div><br /></div> <div>인조 집권 초기 이원익이 처음 대동법의 확대를 주장하였고 </div> <div>이서가 그것을 강력히 찬성하여 성사시켰습니다.</div> <div>김육이 그것을 구체화 했으며, 김익희가 만언소로 대동법의 시행을 또 주장했고 </div> <div>조석윤은 공물을 완전히 포기하진 않더라도 축소하면서 대동법의 확대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div> <div>이시방의 경우엔 죽어가면서까지 자신이 죽으면 대동법을 누가 시행할 것인가하며 탄식했지요.</div> <div><br /></div> <div>그리고 인조 17년, 경상도에서 상당한 풍년이 들었습니다.</div> <div>풍년이 든 이 때야말로 대동법을 확대시키기 가장 좋은 시기였고,</div> <div>이에 경상 감사 이명웅은 경상도에 대동법을 시험삼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고 결국 인조의 승낙을 받아냅니다.</div> <div><br /></div> <div>대동법이 처음 시행된지 3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시험적 실행이긴 하지만</div> <div>경기도와 강원도를 벗어난 지역에서 처음 시행되었습니다.</div> <div>하지만 경상도 시행도 시험 시행에 그치고 인조가 죽을 때까지 대동법은 더이상 확대되는 데 실패합니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인조의 둘째아들 효종이 즉위합니다.</div> <div>어떤 정책이 시행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새로운 정권이 시작하는 때입니다.</div> <div>대동법의 경기도 시행이 광해군 즉위년에 시행되었고</div> <div>강원도 시행이 인조정권 초기에 시행되었습니다.</div> <div><br /></div> <div>정체된 대동법을 다시 시작하는데 이보다 좋은 타이밍이 없었던 것이죠.</div> <div>효종 즉위년, 우의정으로 승진한 김육은 기다렸다는 듯 인조 때 정체된 대동법의 확대를 주장합니다.</div> <div>이 때 김육이 제시한 대동법은 그 전의 것보다 훨씬 더 구체화되었습니다.</div> <div>아주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었죠.</div> <div>이 시기 좌의정은 조익으로 인조 때에 대동법을 철폐하려고 했을 때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입니다.</div> <div><br /></div> <div>좌우의정이 모두 대동법 강력 찬성론자이니 이미 대동법의 시행은 기정사실화된 것 같았으나</div> <div>광해군, 인조와 다르게 효종은 집권 초기부터 대동법에 반대입장을 비춥니다.</div> <div>그 뒤에는 영의정 이경석과 이조판서 김집이 있었지요. 현실적인 문제도 고려해야한다는 겁니다.</div> <div><br /></div> <div>효종이 이렇듯 대동법 확대에 현실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미지근 거리자 </div> <div>김육은 현실적인 문제는 오로지 성상의 결단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피를 토하며 간언하지만 결국 듣지 않습니다.</div> <div>이에 빡친 김육은 바로 사직을 해버리려 합니다.-_-;</div> <div><br /></div> <div>당연히 효종은 사직서를 처리하지 않습니다.</div> <div>이렇게 김육의 반협박(?)이 나오자 이젠 반대 급부에서 난리가 납니다.</div> <div>이조판서 김집이 대동법 시행에 있어 김육과 충돌이 생기자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버린 거지요-_-;;</div> <div><br /></div> <div>그 사이에서 효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는데,</div> <div>그래도 이 때 송시열이 아주 훌륭한 말을 합니다.</div> <div><br /></div> <div>'비록 대동법에 관한 의논이 맞지 않아 불편한 마음이 있지만,</div> <div>양쪽 주장 모두 공도(공평하고 바른 도리)를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 뿐,</div> <div>다만 방법에 의해서 격해졌을 뿐입니다.' </div> <div><br /></div> <div>즉, 두 주장이 다르긴 하나 그 마음은 모두 국가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왔다는 뜻입니다.</div> <div><br /></div> <div>그런 깊은 마음과는 별개로 이 때부터 아주 난리가 납니다.</div> <div>대동법에 대한 토론이 엄청나게 진행되고 찬성하는 쪽에서도 반대하는 쪽에서도 </div> <div>왜 자신의 말이 맞는지에 대한 이유를 역설하면서 내 말 안 들어주면 서로 사직하겠다고 반협박성 이야기까지 오가지요.</div> <div>그래도 이런 논의가 계속된다는 것 자체가 대동법 시행에 있어선 아주 긍정적인 신호였습니다.</div> <div><br /></div> <div>토론은 반드시 정책의 단단함을 만들어주니까요.</div> <div><br /></div> <div>그리고 효종 2년. 드디어 충청도의 대동법이 시행됩니다.</div> <div>대동법이 시행된 지 약 35년만에 3번째 지역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이지요.</div> <div>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육은 충청 감사를 지낸 경험이 있어 충청도 전문가였고 아마 그게 충청지역이 선택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하.지.만</div> <div>정책을 시행했을 때 백성들이 혜택을 얻기까지엔 시간이 걸리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 시간을 참지 못해합니다.</div> <div>당연히 반발이 일고 그 반발은 조정의 부담으로 다가옵니다.</div> <div>반발은 현실적이었고 현실적인 반발은 대동법 반대파들에게 대동법이 불필요한 명분을 만들어주지요.</div> <div><br /></div> <div>결국 효종은 충청지방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대동법이 편리한지에 관한 조사까지 감행합니다.</div> <div><br /></div> <div>의견이 충돌합니다. </div> <div><br /></div> <div>광해군 때엔 광해군의 한마디로 논의가 끝나 대동법이 좌절됩니다.</div> <div>인조 때는 논의가 자주 이루어지나 방향이 안 된다는 방향으로 쏠려 있었습니다.</div> <div>하지만 논의가 됐다는 자체만으로 대동법의 기둥이 보이지 않게 세워졌습니다.</div> <div>효종 때는 대동법이 국가 정책의 중심이 됩니다.</div> <div>찬성파와 반대파가 대립합니다. </div> <div>그러나 그 대립 사이에 정책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div> <div>그리고 인조 때와 다르게 대립을 하면서도 그 방향은 대동법의 확대로 틀어져 있었습니다.</div> <div>정책은 느리지만 단단하게 점점 더 긍정적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효종 8년 드디어 전라도 지방의 확대까지 논의가 시작됩니다.</div> <div>시작은 당연히 김육입니다.</div> <div><br /></div> <div>전라도 사람들이 충청도 대동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div> <div>'왜 우리 지역은 안 해주냐'고 청하였고 이를 이유로 전라도 확대를 역설했던 것이지요.</div> <div>김육의 고집은 효종이 알고 있었고 실제 주장하는 이유도 합당했기에</div> <div>조정 내에서 호남지방의 확대가 구체적으로 논의됩니다.</div> <div><br /></div> <div>하지만 반대를 하는 이들도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div> <div>- 조정에서 대동법을 주장하는 이가 소수이다.</div> <div>- 대동법을 편하게 여기는 고을이 있는 반면 불편하게 있는 고을 역시 존재한다.</div> <div>- 대동법이 시행된 뒤로 궁궐내에서 사용할 약재를 서울에서 구입해야하는데 그 품질이 과거 공납했던 것보다 좋지 못하다.</div> <div>- 고을 수령의 권한이 축소된다.</div> <div><br /></div> <div>등등이 있었지요.</div> <div>굉장히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하지만 이 소식을 들었는지 전라남도 진사 박사문이 상소를 올려 대동법의 시행을 청합니다.</div> <div>효종은 조정에서 의논중이니 일단 물러가라하고 충청도에서 생기는 폐단을 조사합니다.</div> <div>김육은 다시 압박합니다.</div> <div>효종은 너무 큰 일이니 함부로 시행할 수 없다고 일단 시기를 늦춥니다.</div> <div>그러나 이미 대동법의 효력은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div> <div>주장하는 자가 비록 소수더라도 주장의 설득력 측면에선 훨씬 강력했습니다.</div> <div><br /></div> <div>대동법 반대파였던 송시열도 충청지방 대동법을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음으로 좋은 법이라 인정해버립니다.</div> <div>더이상 호남지방 대동법을 거부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div> <div>드디어 효종 9년 부분 시행이긴 하지만 전라도 지방의 대동법 확대까지 결정됩니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대동법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김육은 이 해 사망합니다.</div> <div>전라도 지역 대동법의 일을 자신이 죽으면 흐지부지 될까 걱정하는 상소를 남기고...</div> <div><br /></div> <div>효종은 고집불통이었던 김육을 꺼림직해 하였으면서도 그의 정신 자체는 인정했습니다.</div> <div>대신들을 모두 모아놓고 대동법이 이처럼 시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div> <div>모든 일은 반드시 대신들이 담당해야 도모할 수 있는데</div> <div>만약 서로 미루기만하다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면 임금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지만,</div> <div>김육은 혼자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시행하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대동법에 대한 대신들의 찬반 의견을 모두 듣고 정리해 전라도 대동법 완전 시행을 추진하려는데...</div> <div>3개월 후 효종은 갑자기 사망해버립니다.</div> <div><br /></div> <div>대동법을 강력히 추진했던 김육도 죽고, 대동법을 가장 널리 시행했던 효종도 죽어버렸습니다.</div> <div>현종은 19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를 했으니 한순간에 대동법 추진의 공백이 생겨버린 것이죠.</div> <div><br /></div> <div>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그 정신은 계승됩니다.</div> <div><br /></div> <div>현종은 즉위하자마자 대동법 시행에 관해 대신들의 의견을 먼저 묻고 효종이 추진하려 했던</div> <div>전라도 나머지 지역의 대동법 시행을 승인합니다.</div> <div>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게 해안지방 사람들은 대동법이 없어질까 두려워하고</div> <div>산간지방 사람들은 대동법이 시행되는 것을 걱정한다는 겁니다.</div> <div><br /></div> <div>같은 지방 사람이라도 사는 곳에 따라 정책을 대하는 정도가 달랐고,</div> <div>그렇다하여 같은 도의 어디는 시행하고 어디는 안 하고를 영구히 정할 수도 없었습니다.</div> <div><br /></div> <div>이젠 정책의 미세한 조정이 이루어질 차례입니다.</div> <div>아까 언급했든 대동법은 세금을 쌀과 면포로 낸다고 했는데,</div> <div>산간지방은 벼농사를 짓기 힘드니 면포로 대신 냅니다.</div> <div>면포를 화폐 대신 쓰던 시대였지만 그렇다하여 면포가 화폐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div> <div>즉, 세금을 내기 위해 면포를 구입해야했고 그 거래에서 이미 일정부분 손실을 감당해야했던 것이지요.</div> <div><br /></div> <div>그렇기에 쌀을 내는 양을 일정부분 늘림으로써 세율을 조정하는 것을 논의합니다.</div> <div><br /></div> <div>현종은 암행어사도 계속 보내 상황을 듣습니다. </div> <div>전라도 산간지방의 대동법을 폐지하는 것이 좋은지 세율 조정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좋은지 알기 위해서였죠.</div> <div>조사 후 암행어사 신명규가 호남의 대동법은 산간지방에서 불편하다 하여 폐지하였는데,</div> <div>염문을 해보니 세력있는 집안은 폐지하길 원하고, 가난한 집안은 모두 다시 시행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div> <div><br /></div> <div>이젠 고민할 것도 없는 의견이었지요.</div> <div>전라도의 대동법 완전 시행이 확정됩니다.</div> <div>대동법이 처음 추진 된 지 이미 60년이 지난 시점에 전라도 대동법 완전 시행이 결정 되었습니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몇년 후 이어지는 그 악명 높은 경신 대기근.</div> <div>기근이 지나고 현종 14년 사간이 현종에게 올린 보고는 이렇습니다.</div> <div><br /></div> <div>'우리가 비록 신해년의 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동법의 은혜입니다.'</div> <div><br /></div> <div>이제 남은 곳은 인조 때 임시 추진되었다 실패한 경상도와 황해도입니다.</div> <div><br /></div> <div>그리고 다음 바톤 터치자는 현종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숙종.</div> <div>숙종 3년 경상도 지방도 호남, 호서지방과 같이 전도에 대동법이 시행되었고,</div> <div><br /></div> <div>이젠 대동법을 시행하느냐 안 하느냐의 논의보단 </div> <div>그 시기와 정도에 관한 논의가 중점이 됩니다.</div> <div>또 시행 도중에 생기는 부작용이나 시행한지 오래되어 자연스레 생기는 폐단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요.</div> <div><br /></div> <div>하지만 여기에서 복병을 만납니다.</div> <div>어떠한 정책도 완전할 순 없으며 부작용이 생길 수 밖에 없고,</div> <div>그 부작용은 시간이 지날 수록 고착화됩니다.</div> <div>각 도를 따로따로 시행하다보니 경기도는 이미 대동법을 시행한지 100년 가까이 지났고</div> <div>당연히 어떠한 부작용이 눈에 띌 수 밖에 없었습니다.</div> <div>이 때문에 황해도 지방의 대동법 확대가 논의는 끝난 상태에서 결단이 내려지지 않는 고착 상태가 유지된 것이죠.</div> <div><br /></div> <div>이에 대한 절충안으로 들고온 것이 상정법이었고,</div> <div>황해도 지방을 대읍, 중읍, 소읍으로 나누어 그 노동의 중함에 따라서</div> <div>그 정도를 절반으로 감하거나 1/3으로 감하여 차별화하는 대신,</div> <div>원래 1결에 12두 씩 내는 대동미 이외에 별도로 3두를 더 지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div> <div><br /></div> <div>숙종 34년 8도 중 5도의 대동법과 황해도 1도의 상정법으로 최북단 지역인 관서와 관북지방을 제외한</div> <div>6도에 대동법의 시행이 성사됩니다.</div> <div>이 때가 1708년이었고 대동법이 처음 시행되었을 때가 1608년이었으니,</div> <div>정확히 100년만에 대동법이라는 조선의 최대 개혁이 완성된 것입니다.</div> <div><br /></div> <div>국사 교과서는 제가 가지고 있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div> <div>이 대동법에 대한 7차 초판 인쇄된 누드교과서의 의견은</div> <div><br /></div> <div>'여전히 별공은 존재했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지주가 자신이 내야하는 대동세를 </div> <div>소작농이 내도록 시키는 등의 폐단이 발생하면서 농민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div> <div>결국 사태는 대동법 실시 이전보다 더 심해졌지 나아지지는 않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div> <div><br /></div> <div>라고 적혀있습니다.</div> <div><br /></div> <div>100년동안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되었던 조선의 개혁은</div> <div>현대에 이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div> <div>현대의 우리가 조선시대 중후반 시대를 모두 살지 못하기에 정말 대동법의 실시 이전보다 </div> <div>이후의 생활이 더 피폐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 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div> <div><br /></div> <div>확실한 건 어떤 개혁도 완벽하지 못하고 100년에 걸친 개혁인 대동법 조차</div> <div>그 한계성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div> <div><br /></div> <div>프랑스 혁명이 그랬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러합니다.</div> <div>그걸 이루기 위한 희생은 너무나 확실한데 그 완성은 언제나 부족합니다.</div> <div>하지만 그렇다하여 그 희생이 정말 가치가 없는 것인가.</div> <div><br /></div> <div>정말 100년에 걸친 논의가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는가.</div> <div>그에 대한 평가를 정조의 말로 대신하겠습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대동이란 기자의 홍범 칠계의에 있는, 전체 의사가 다 같다고 하는 것이다.</div> <div>대동법이 원래는 공물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div> <div>그것을 상납하면 공물가가 되고, 유치해두면 저축이 되고, 떼어주면 관청의 수요가 된다.</div> <div><br /></div> <div>각각 나누어서 말하면 이름이 셋이 되고, 합쳐 말하면 대동이 되는 것이다.</div> <div>그리고 그 뜻은 대체로 위에서는 받고 아래서는 바친다는 뜻을 취한 것으로서,</div> <div>시골 백성들은 힘을 펼 수 있고, 도시 사람들은 생활이 윤택해지고, 수령들은 자신의 청렴성을 유지할 수 있다.</div> <div><br /></div> <div>예산 집행에 가닥이 잡히고, 또 장사꾼들은 사고팔 길이 생기며, 배와 수레는 품팔이 할 길이 있어,</div> <div>상하 내외 어디로 보나 고루 공평하게 되었다.</div> <div>그야말로 대동이라는 이름이 헛이름이 아니었다.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양홍렬 역, 홍재전서 중 대동법 개요)'</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br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br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출처 - </span>http://cafe.naver.com/booheong/72329</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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