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보니 어처구니가 없지..개수구반란섹휘들아.
전두환이가 육사 사열받은게 어처구니 없는거야...
공무원이 정당에 1만원 후원했다고 처벌받는 나라에서
쿠데타반란수괴가 1,000만원 투척했으면 쿠데타모의자금이란 의심을 지울 수 없지.
김관진 사퇴, 육사교장 박종선 구속수사..쿠데타모의 했는지 중점수사하고
전두환 사돈의 팔촌까지 세무조사..먼지나게 털어보자.
어찌됐건 노태우 봐라...
지난 과오를 반성하는지는 몰겠지만 입꾹 쳐닫고
추징금 완납 하려는 저 눈물겨운 노력~!!
그리고 육사생도들아
비육사 출신이지만 장태완 장군의 초상화라도 모셔서 사열를 하는게 니들의 의무이자 책임아니더냐.
오즉 못났으면 육사홈피 자유게시판 마저 폐쇄하냐...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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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vop.co.kr/A00000467912.html 12.12 쿠데타에 맞서다가 강제예편당한 이후 '참군인'의 표상으로 남았던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부인이 투신자살한 소식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장태완부인의 투신자살 소식은 장태완이 전두환.노태우 신군부가 일으켰던 쿠데타에 맞서 진압작전을 벌이다가 고초를 겪은 뒤 맞은 '비극적인 가족사'은 연장선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장태완부인의 투신자살 소식은 유족들은 물론, 신군부 독재 시절의 아픔을 겪었던 많은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장태완부인 이병호(78)씨는 17일 오전 9시께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아파트 10층에서 투신자살했다. 장태완부인의 투신자살에 대해 경찰은 타살의 흔적이 없어 자살로 결론을 냈다고 밝혔다.
장태완부인의 투신자살과 관련한 경찰과 주변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는 아침 8시30분께 아침을 먹고, 병원에 간 가사도우미가 자리를 비우자 신발을 신고 외투를 입은 채로 투신자살을 했다. 장태완부인은 투신자살 전 "미안하다. 고마웠다. 오래 살아라"라는 내용이 담긴 유서를 남겼다. 투신자살한 장태완부인의 시신은 아파트 뒤편 공터에서 놀던 초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발견했다.
장태완부인 이씨는 투신자살 1년 6개월여 전인 2010년 7월 남편 장태완 장군이 사망한 뒤로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우울증 때문에 주변과의 접촉을 끊고 가사도우미와 단둘이 생활을 해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장태완부인의 투신자살 당일 만난 주민 공모씨는 "장군님이 살아 계실 때는 두분이 문화센터에 같이 가서 한복 입고 무용도 배우고, 장구도 쳤는데 장군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끊으셨다"며 "그 뒤로 '나 혼자 살면 뭐하나'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장태완부인 이씨가 투신자살 전 우울증이 심해져 지난해 7월에도 투신자살을 시도하려는 걸 가사도우미가 말린 적이 있다고 전했다.
장태완부인의 투신자살 소식은 12.12 쿠데타를 진압하고자 했던 장태완 전 사령관의 '비극적인 가족사'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에 성공한 이후 이를 반대했던 장 전 사령관은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당하고, 1980년 강제 예편됐다.
당시 장태완 전 사령관이 강제예편당하기 전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1979년 112월12일 전두환이 쿠데타를 감행한 당일 밤 10시 장태완은 신군부 심장부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신군부 측에서 "장 장군, 우리 함께 일하자"고 회유하자, 장 전 사령관은 "이 반란군 놈들, 꼼짝 말고 거기 있거라. 내 전차와 포를 갖고 가서 모조리 대갈통을 날려버릴 테니"라고 일갈한 건 유명한 일화다. 장 전 사령관은 군사적 균형추가 이미 신군부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반란군 진압에 몸을 바쳤다.
장태완 전 사령관의 외아들은 2년 후 서울대 자연대에 다니던 중 행방불명됐고, 한달 만에 경북 칠곡의 인동 장씨 재실 앞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고, 사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장 전 사령관의 아들은 아버지가 가택연금을 당한 탓에 보안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수석을 놓치지 않는 등 학업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장태완 전 사령관은 아들을 잃고 난 뒤 '내 생명보다 중요한 아들을 사랑의 품으로 인도하여 영생토록 해주십시오'라고 피눈물을 머금은 채 비문에 글을 새겼다.
투신자살한 부인을 곁에 두게 된 장태완 전 사령관은 쿠데타 이후 민주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쿠데타의 주역들이 '전범'이 되는 역사적 정화 과정 속에서 참군인의 표상이 됐다. 참군인 장태완부인의 투신자살 소식은 그의 영웅적 과거 행보와 맞물려 국민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