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하창수</b><br>
1960년 포항에서 태어나 영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편 「청산유감」으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1991년 장편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세 권의 중단편집과 아홉 권의 장편소설, 엽편소설집 하나,
직접 그린 만화와 짧은 글이 어우러진 카툰에세이집 두 권,
그리고 일곱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소설가이며 번역가이자 카툰에세이스트다.
옮긴 책으로 폴라 델솔의 『동양점성학 Oriental Astrology』, 러디어드 키플링의 『킴 KIM』이 있고,
상봉스님의 선화시집 『낮잠 Napping』을 영역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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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img src="http://image.yes24.com/goods/71136/L"><br>
- 글 하창수 / 시·그림 이외수
- 초판 <b>1997년</b><br></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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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8 <font size=3>[<b>쥐의 나라</b>]</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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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본시 기세가 웅장하고 담대하여 만방이 호국이라 불렀다.<br>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마땅히 호랑이가 앉아야 할 왕좌를 쥐란 놈이 차지하고 앉더니<br>
과연 다산(多産)의 짐승답게 온 나라를 바글거리는 쥐새끼의 나라로 만들었다.<br>
덩치가 커봤자 한 뼘을 넘지 못하고, 창칼을 쥐었다고는 하나 어찌 호랑이의 발톱에 미칠 수 있겠으며,<br>
밤 내 이 집 저 집 돌아다녀 훔쳐 모은 재물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게 어찌 제놈들의 것이더냐.<br>
나는 오랫동안 이 생각들을 모아 궁리하고<br>
재주 없는 글솜씨를 갈고 닦아 임금에게 올릴 상소를 만들었으니, 이제 그걸 전하려는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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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제자들에게 남긴 현자는 이른 아침 맑은 햇살이 번지는 길을 꼿꼿이 걸어갔다.<br>
그리고 스승은 돌아오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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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8c8c8c">...(중략)...</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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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제자 중에 학문이 깊고 심성이 곧은 젊은이가 있었다.<br>
그는 그림이 뛰어나고 글씨 또한 명필이라 장안에 그 이름이 높았다.<br>
그의 문장은 젊은 축에선 당대의 으뜸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br>
그러다 보니 조정에서 그를 등용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br>
하지만 그는 서른 번, 마흔 번, 때마다 거절했다.<br>
그의 부모를 설득해보기도 하고 그의 형제에 대한 벼슬자리까지 보장해준다고 해도<br>
그의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br>
어느 날,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하고 제법 지위가 높은 자가 그의 집을 찾아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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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8c8c8c">...(중략)...</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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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히 나를 등용하려면 내게 딱 하나만 가져다주시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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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br>
장수가 의아한 눈길을 하며 모가지를 쑥 뽑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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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소, 딱 하나면 되오."<br>
"그게 뭐냐?"<br>
"서수필(鼠鬚筆)이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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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퉁방울 같은 눈이 더욱 튀어나왔다.<br>
"서수필이면 쥐수염으로 만든 붓이 아니더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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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고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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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녀석이 글씨로 이름이 났다는 건 알고 있다만, 아무리 그래도<br>
천금을 마다하고 붓 한 자루를……"<br>
장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br>
입맛을 쩝하고 다시는 품이 영 찜찜하다는 듯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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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젊은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br>
그의 목소리에는 하나의 떨림도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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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 나라에서 가장 질 좋은 서수필이어야 하오."<br>
"……?"<br>
"댁이 말했듯 서수필이란 쥐수염으로 만든 붓이지요. 하여 <br>
이 나라에서 가장 질 좋은 서수필을 만들자면,<br>
이 나라 쥐들 중에 제일 가는 쥐의 수염이 필요한 건 당연하겠지요.<br>
말하자면 쥐새끼들 중에서 임금쯤 되는 쥐라야 한다 이 말입죠."<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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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의 말을 듣고 있던 장수의 얼굴에 완연히 당황하는 빛이 어리고 있었다.<br>
뭔가 뼈 있는 소리인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엇인지 확연히 짚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br>
젊은이를 찾아왔던 장수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아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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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새벽.<br>
동이 트려면 아직 이른 시각, 젊은이의 누옥(陋屋)이 있는 동네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다.<br>
전날의 그 장수가 시퍼런 군도를 쳐들고 젊은이의 방으로 뛰어들어갔고,<br>
늦은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처럼 젊은이의 목이 떨어졌다.<br>
훗날, 사람들은 그의 유작이 된 어떤 시를 대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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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버글거리는 게 쥐새끼들인데,<br>
어찌 나는 제대로 된 서수필 한자루<br>
마련하지 못하였을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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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8c8c8c">(끝)</font><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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