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LP시대] "마그마 LP 이젠 미국에서 찍어와야"
한국의 마지막 LP(레코드판) 공장인 서라벌 레코드가 지난 10월 자진 폐업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CD에 밀려 급격히 발매량이 줄어들다가 마지막 숨을 거둔 것이다. 지난 2월 <캔터베리 음악 페스티벌>을 끝으로 아예 주문이 없었다. LP는 풍부한 소리를 담을 수 있는 장점 때문에 한국과 달리 지금도 서구와 일본에서는 생산이 계속되고 있다. 더 보여줄 것이 많은데 요절해버린 가수의 빈소를 찾는 기분으로 서라벌 레코드 공장을 찾았다.
겨울을 재촉하는 을씨년스러운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9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식사동 660번지 서라벌 음향 공장으로 들어섰다. 테이프를 생산하는 서라벌 미디어 공장은 작업에 한창이었지만 별채인 서라벌 레코드 공장 건물은 유리창에 크게 'OO 유리'라고 써 있을 뿐 내부가 고요했다. 건물 뒤편에는 LP 몇 장, 제작 원판인 니켈판을 담아 놓는 종이 케이스가 진흙 땅 위에 버려져 있었다.
공장으로 들어서자 한 편에는 유리 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음반 제작에 사용되던 기계들은 모두 처분을 마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라벌 레코드 사장이자 마지막 LP 기술자인 홍창규 사장(50)이 "장비 철거가 다 끝나고 기름 탱크와 굴뚝만 남았다"고 설명하며 나타났다. "유리 가게는 3년 전부터 있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일부를 세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 사장은 1980년 서라벌 레코드에 입사해 LP 기술자로 일했다. LP가 쇠퇴하면서 사람들이 공장을 떠나는 상황에서도 2001년부터 혼자 사장 겸 종업원으로 일하며 음반을 찍어냈다. "1996, 97년부터 LP 공장들은 CD 제작으로 업종을 바꾸거나 문을 닫았다.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믿고 버텼지만 3년 전부터 급격히 줄어든 주문이 올해 들어서는 아예 없어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좋았던 시절의 추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80년대에는 하루 4000~5000장씩 찍었지. 90년대 현진영이가 나타났을 때가 가장 잘 되던 시절이고. <연인들의 이야기>를 부른 임수정 음반은 며칠 만에 수십만장이 나가 보너스도 받았는데…."
홍 사장은 "아, 이게 남았네"라며 사무실 책상 옆의 기계 하나를 가리켰다. "만들어 놓은 음반이 튀면 그 원인을 찾는 현미경"이라 설명했다. 대화를 마칠 무렵 "기계 때문에 애도 많이 먹었는데 며칠 전 막상 그 기계가 고철로 팔려 나가니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더라고. 이젠 이 공장터에서 다른 일을 할 거야. 뭘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지만…"이라 말하며 창문 밖 먼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LP를 미국에서 찍어 와야 한다."
가요 명반을 복원하는 사업자들이 작년 여름부터 속속 등장해 음악팬들을 반갑게 했다. 하지만 마지막 LP 공장의 폐업은 음반을 복원하던 사업자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이젠 LP로 음반을 복원하려면 미국에 주문 생산을 해야 한다. 제작비 상승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다.
비행선 비트볼 리버맨 등 복원 전문 레이블들은 작년 여름 등장하기 시작해 가요사의 명반들을 되살려냈다. 그동안 희귀성 때문에 중고 음반 시장에서 수십만 원에 거래되던 <그리워라>의 현경과 영애, <해야> <잊혀진 사랑>의 그룹 마그마, 그리고 1970년대 록의 전설들인 신중현, 히식스 등의 음반이 복원됐다. 현재는 70년대 포크의 전설적인 음반인 양병집의 <넋두리>가 비행선에 의해 준비되고 있다.
이런 음반들은 일부 CD로도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음반 복원 업체들은 가능한 한 LP로 제작하길 원한다. 비행선(www.bihaengsun.com)의 음반 복원 담당 손병문 씨(34)는 "복원을 할 만한 좋은 음악은 LP로 제작하는 것이 맞다. CD는 음량만 크지 낼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은 제한돼 있는 매체다. 하지만 LP는 소리의 범위가 무한대이다. 깊고 풍부한 소리를 갖고 있다"고 했다.
LP를 미국에서 찍어 올 수밖에 없어 운송료와 관세 등 제작 비용이 늘어나게 되는 시름이 손 씨에게 더 해졌다. 그래도 복원 작업을 포기할 순 없는 일. "어차피 힘든 작업이었다. 우리의 경우 회사 이름 비행선으로 발매되지만 한 음반당 600~1000장 찍을 정도로 시장이 작아 실제 작업은 나 혼자 다 했다."
손 씨는 "미국은 LP 제작 업체들이 잘 운영되고 있다. 일본도 새로 나오는 음반을 CD와 함께 LP로도 찍는 경우가 많다. 한국 영화만 봐도 정부 지원을 받아가며 과거 명작들을 찾아내 복원한다. 그에 비해 가요는 LP 공장이 없어지고 명반의 원판은 쓰레기 속에 방치돼 사라져 가고 있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최영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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