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겨울, 아마도 기말고사마저 끝나고 남은 수업을 진행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기억이 명확하진 않네요) <div><br /></div> <div>물리2를 배우고 있었는데 아주아주 뒷부분 진도를 나가고 있었습니다.</div> <div><br /></div> <div>기말고사도 끝났겠다 (만약 제 기억이 틀려서 끝나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시험에 비중이 작았을 겁니다) 그 때 보어의 원자 모형과 오비탈 같은걸 설명해주는 선생님의 수업을 그냥 귀로만 듣고 있었죠.</div> <div><br /></div> <div>공식 외우고 그걸로 문제 푸는데 지쳐있다가, 그냥 이야기 듣듯이 들으니 물리 수업도 꽤 재밌더군요.</div> <div><br /></div> <div><br /></div> <div>원자 속의 전자가 아무 곳에나 있지 않고 정해진 원궤도 반지름만큼 떨어진 곳에만 존재한다는 '보어의 원자모형'은 꽤 흥미로웠습니다.</div> <div><br /></div> <div>그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드 브로이의 물질파도 그랬고, 그를 입증하는 파셴계열이니 발머계열이니 하는 스펙트럼 같은 것들도 재밌더군요.</div> <div><br /></div> <div>그러다 문득,</div> <div><b><br /></b></div> <div><b>'전자는 정해진 궤도에만 존재하고 그 사이에는 있을 수 없다더니, 그럼 도대체 두 궤도 사이는 어떻게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건데'</b></div> <div><b><br /></b></div> <div>라는 질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div> <div><br /></div> <div>국민학교 1학년떄 '왜 쌍이응은 없어요?'라는 질문에 반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들어야 했던 기억 이후로 질문을 결코 하지 않던 학생이었던 저는</div> <div><br /></div> <div>그 순간부터 수업은 듣지 않고 교과서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b>그런 설명 같은건 안나옵니다.</b></div> <div><br /></div> <div>수업이 끝나고 반에서 과학 제일 잘한다는 친구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b>그런거 알지도 못하고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b></div> <div><br /></div> <div>용기내서 선생님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질문을 남깁니다. <b>물어보는 질문에 답은 안하고 뭔 책들만 권하며 읽어보랍니다.</b></div> <div><br /></div> <div>그래서 아쉬운대로 선생님이 읽어보라고 했던 <b>칼 세이건의 코스모스</b>(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습니다. 이 책이랑 양자역학이랑 뭔 상관이 있다고)를 사서 읽기 시작합니다.</div> <div><br /></div> <div>세상에, 재밌습니다. 그래서 또 서점에 가서 코스모스를 샀던 책꽂이 근처에서 <b>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b>를 사서 읽습니다.</div> <div><br /></div> <div>아놔. 이건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또 서점에 가서 그 책꽂이 근처에서 <b>조지 가모브의 물리열차를 타다</b>를 사서 읽습니다.</div> <div><br /></div> <div>오예, 재밌습니다. 이렇게 그 서점에 있는 비슷한 부류의 책들을 다 봤습니다.</div> <div><br /></div> <div>맨날 새벽까지 디아블로만 하던 아들놈이 십년만에 책을 읽기 시작하니까 엄마는 이때다 싶었는지 책을 사달라는 대로 잘 사주십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근데, 이 책들을 열심히 읽다가 문득 <b>'아 그래서 전자가 궤도 사이를 어떻게 다니는건데, 뭐 순간이동이라도 하는겨 뭐여.'</b>라는 궁금증이 또 떠오릅니다.</div> <div><br /></div> <div>이제 주워들은 것들도 좀 있겠다, 자신감이 생겨서 선생님한테 또 물어봅니다. <b>아놔 또 안알려줍니다. 아마도 선생님도 모르는거 같습니다.</b></div> <div><br /></div> <div>그래서 생각합니다. <b>물리학과에 가면 알려주겠지.</b></div> <div><br /></div> <div>이 때가 고3 하고도 여름방학을 향해 달려가던 시점이었습니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그렇게 제가 사는 도시에 있는 국립대학교의 물리학과에 진학했습니다.</div> <div><br /></div> <div>대학교에 오니 말그대로 신세경이더군요. 재미없는 화학이니 생물이니 사회니 이런거 하나도 안배우고</div> <div><br /></div> <div>재미있는 물리만 공부해도 점수가 나옵니다. 비록 수학 때문에 조금 힘들긴 하지만 하다보니 수학도 재밌습니다. 이 쉬운걸 왜 고등학교땐 못했을까 싶기도 합니다.</div> <div><br /></div> <div>그러다가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해서 양자역학을 접합니다.</div> <div><br /></div> <div>아 <b>파동함수</b>. 이거였습니다. 드디어 한 5년간 묵혀왔던 궁금증이 풀립니다.</div> <div><br /></div> <div>이 때의 희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div> <div><br /></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그리고 정신차려보니 물리학자가 되어있습니다.</span></div> <div><br /></div> <div><br /></div> <div>돌이켜보면, 시험에 나오지도 않고 점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저 해괴한 궁금증 하나가</div> <div><br /></div> <div>시험만 봤다하면 수학과 과학은 양,가를 받길 일쑤였던,</div> <div><br /></div> <div>근의 공식도 하나 못외워서 이차방정식 풀려면 일일히 전개해서 풀어야 했던,</div> <div><br /></div> <div>고3이 되어서도 새벽까지 디아블로한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특별할것 하나 없던 학생 하나를 물리학자로 만들었네요.</div> <div><br /></div> <div>여러분들은 어땠나요?</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