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돈의 가(歌)
Two Prophets
//2//
- 태 바 리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반사적으로 손이 전화를 찾는다. 귀 언저리에 흐르는 땀을 쓰윽 닦고는 머리맡의 전화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유태일 선생님 계십니까?”
어디선가 많이 듣던 유쾌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네. 제가 유태일입니다만….”
“예. 아름다운 출판사인데요, 원고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죄송합니다. 또 원고가 늦었군요. 이번엔 제 날짜에 맞추려고 했는데, 요즘 자꾸 학교에 일이 많아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하시기까지 하실 건 없고요. 여러 선생님들께서 원고가 늦어지셔서 출판에 어려움이 있을까하고 걱정이 되어서요. 학기 초라 바쁘신 줄을 알지만 빨리 좀 부탁드려요.”
“예. 죄송합니다.”
“죄송하실 것은 없다니까요. 오히려 쉬시는 날 전화 드린 제가 더 죄송한걸요?”
그녀는 늘 밝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원고가 늦다고 화를 내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쉬는 일요일에도 전화를 거는 것으로 미뤄 짐작컨대, 그녀는 자신의 일에 매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던데, 혹시 그녀는 후자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별로 재미없어 보이는 출판사 잡무가 그리도 신나는 것을 보면 말이다.
“네. 그럼 오늘 중에 메일로 원고 보내드리고 전화 드릴게요.”
“그럼.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쓰시는 동화, 제 조카도 재미있다고 원고 나오면 먼저 보여 달라고 난리예요.”
“네? 아, 네.”
처음엔 자신의 반 1학년 코흘리개들을 위해 매일 아침 3분씩 들려주려고 시작했던 황당무계한 이야기였다.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는데, 몇 년을 하고나니 조금씩 이야기가 다듬어지면서 꽤나 괜찮은 동화가 되었다. 학부모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더니, 그들 중에 어린이 잡지를 만드는 출판사의 편집장인가 하는 사람이 있었나보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벌써 1년 하고도 6개월이 되었다. 그 때부터 이 상냥하고 밝은 목소리와 한 달에 한 두어 번 통화하게 되었다.
“제가 원고를 미리 보여줄 수는 없고 해서, 대충 몇 부분만 먼저 이야기 해주는데, 실례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요. 그 정도야 뭐. 어차피 글로 먹고사는 사람도 아닌데요.”
“네. 다행이네요. 호호. 그럼 좋은 주말 보내시고요.”
“아 네. 간사님도…. 그러고 보니 성함도 아직 모르네요.”
“아. 네. 그런가요? 제 이름 아시려면 돈 내셔야되는데? 좀 비싼데요?”
“예? 예. 너무 비싸지만 않았으면 좋겠네요. 후후.”
그녀는 정말 밝은 사람이다. 어두웠던 그의 마음을 전화 한 통으로 밝혀놓았으니 말이다.
“실은요. 이름이 좀 촌스러워서요. 제 이름 듣고 웃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말해드릴게요.”
“제 친구 중엔 삼순이도 있는데요 뭐. 남자인데도 말입니다. 하하하.”
“웃으실 거죠?”
“아니요. 절대로 안 웃을게요.”
“웃으실 것 같아요.”
“아니라니까요?”
이 사람 참 귀엽다.
“오월이에요. 오월….”
“아. 이름 예쁜데요 뭐. 저는 웃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의미가 있는 이름 같네요. 좀 옛날이름 같기는 하지만요.”
“우리 아빠가 엄마한테 보름달을 선물한 밤에 저를 가지셨다고 그렇게 지으셨대요. 보름달이 당신들 것도 아니면서, 좀 괴상한 분들이에요.”
“그렇다면 의미도 좋잖아요? 괴상한 분들이 아니라 낭만적인 분들이네요.”
“그래도 친구들한테 놀림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이 ‘워리! 워리!’하면서 강아지 부르듯이 놀리고 그랬다고요.”
“워리?! 워리!!! 하하하!”
“잉~ 거봐요. 웃으시잖아요.”
“죄송해요. 안 웃기로 했는데, 갑자기 ‘워리! 워리!’하시니까, 하하.”
“괜히 말해줬어. 어~어.”
귀엽게 우는 척하는 그녀가 왠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참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치가 있는 사람이다.
“죄송해요. 제가 그 대신 맛난 거 사드릴게요.”
“맛난 거요? 그렇다면 좀 봐드리죠. 언제 사주실건데요? 언제요?”
“지금이라도 당장 사드리죠. 수염도 안 깎은 서른 살 노총각이 사주는 것도 괜찮으시다면….”
왠지 그녀가 만나고 싶어졌다. 그녀를 만나면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악몽의 그늘에서 하루 종일 우울한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하지만 오늘은 11시에 교회에 가야해서 좀 곤란한데요.”
“교회요? 어느 교회에 다니시는데요?”
“선생님도 교회에 다니시나요?”
“아니요. 저는 다녔었죠. 예전에.”
“그럼 잘됐어요. 같이 예배드리고 점심 사세요.”
“네? 네. 그러죠. 뭐. 교회가 어디죠?”
“네. 정동에 있는 정동교회요.”
“아. 정동에 있는 오래된 교회 말인가요?”
“네. 바로 거기예요.”
“이 시골구석에서 거기까지 가려면 지금부터 빨리 씻어야 되겠는데요?”
“수염도 안 깎으실 거라면서요?”
“그렇담 처음 뵙는 숙녀에게 예의가 아니죠. 후후. 그럼 있다가 뵈어요.”
10년 만에 우연히 교회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교회에 간다는 것이 대단한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다만 밝은 웃음소리의 그녀를, 1년 반 동안 알았지만, 오늘에서야 그 이름을 듣게 되고 호감을 느끼게 된 그녀를 만나는 것일 뿐이다. 더 의미를 만들자면, 15년 간 우울했던 일요일오후가 비교적 즐거워질 것이라는….
일(日)은 서둘러 준비했다. 9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기차를 타야했기 때문이다. 기차만 타면 한 시간 남짓 걸릴 거리이지만, 놓치면 약속시간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열차출발시간 15분 전이 되어서야 낡은 연립주택 현관 앞에 섰다. 100미터 단거리 선수가 출발선에 선 것처럼 큰 숨을 쉬고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역까지 단숨에 달릴 셈이었다. 그런데, 문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어엇! 왜 이러지?’
너무 오래되어 낡은 탓일까? 문은 뒤에서 무언가 밀고 있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문을 밀쳤다. 그러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어깨로 밀었다. 조금 열리는듯하더니 다시 어떤 힘에 의해 “쿵”하고 닫혔다.
“그르렁 그르렁….”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커다란 짐승이 내는 소리인 것처럼 들렸다. 갑자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듯 느껴졌다. 머리카락부터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어깨와 목 뒤로 소름이 쫙 끼쳤다.
‘이 소리는 뭐지? 잘못 들었나?’
하지만 그 거친 숨소리는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더 거친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맹수가 먹이를 궁지에 몰아넣고 나서 내는듯한 소리였다. 비록 산 아래 있는 낡은 연립주택이라고는 하지만, 이 뒷산에 이런 맹수가 살리는 없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이른 일(日)은 이것이 꿈이거나 정신의 착란(錯亂)이라는 판단을 했다.
“이게 뭐야!!”
자신에게 화가 난 일(日)은 온힘을 다해 현관을 걷어찼다.
“끼야아악!!!!!"
"쾅!!“
괴상한 비명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계단을 한 바퀴 돌더니 계단으로 난 창밖으로 쑤욱 빠져 나갔다. 하지만 잠시 일(日)은 패닉상태에 빠진 것처럼 느껴졌다.
‘뭐였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쳇. 보약을 먹어야겠군. 별게 다 보이네.”
이건 그냥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가 십대의 소년이었다면 이 일을 사실 그대로 믿었을 것이다. 아니, 열 살만 더 어렸어도 이 일은 뭔가 수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그저 몸이 허해서 헛것이 보인 것일 뿐이었다.
시계를 보았다. 기차출발 10분 전이다. 그는 문을 잠그고는 단거리 선수처럼 역을 향해 달렸다. 바람이 얼굴에 부딪히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 바람이 그의 모든 찌꺼기들을 씻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꿈과 조금 전의 그 일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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