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class="MsoNormal"><font size="2"><span lang="en-us">“</span>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어서 다행이야<span lang="en-us">.”</span></font></p> <p></p> <p class="MsoNormal"><span lang="en-us"><font size="2"> </font></span></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font size="2"><span lang="en-us"><</span>아가씨<span lang="en-us">></span>가 개봉된 후로 영화에서 비판 받은 부분은<span lang="en-us">, </span>이야기 상으론 남성 권력에서 자유로운 레즈비언 연인을 설명하면서 카메라로는 그녀들의 육체를 탐미적으로 전시하는 데서 오는 내용<span lang="en-us">-</span>형식 간의 불일치였다<span lang="en-us">. </span></font></p> <p></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font size="2">물론 박찬욱 감독이 반여성주의자라는 소리를 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span lang="en-us">. </span>그는 그저 장르 영화의 선봉장이자 지독한 탐미주의자로서<span lang="en-us">, </span>그녀들의 육체 관계를 아름답게 묘사해야 하는 의무를 성실히 한 것뿐이다<span lang="en-us">. </span>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span lang="en-us">. </span>사실 박찬욱의 영화만큼 한국 주류 영화계에서 여성 인물들의 위치가 두드러지는 영화가 또 있던가<span lang="en-us">. </span>물론 그의 영화 속에서 여성은 많은 폭력에 노출되지만<span lang="en-us">, </span>그래도 수두룩한 다른 한국 영화의 속없는 아녀자들보다야 천배 만배 당당한 그녀들이다<span lang="en-us">.</span></font></p> <p></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font size="2">그렇다면 여기서 생각을 달리해볼 수도 있겠다<span lang="en-us">. </span>만약 박찬욱 감독이 자기 영화의 이러한 맹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span lang="en-us">? </span>오히려 그는 이러한 모순을 전경화시키고자 하려던 게 아닐까<span lang="en-us">. </span>그렇다면 <span lang="en-us"><</span>아가씨<span lang="en-us">></span>는 여성 주체들의 탈주극임과 동시에 분열하는 무력한 <span lang="en-us">‘</span>자지<span lang="en-us">’</span>들의 자화상이기도 하지 않을까<span lang="en-us">.</span></font></p> <p></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span lang="en-us"><font size="2"> </font></span></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span lang="en-us"><font size="2"> </font></span></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font size="2">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인물들은 여성을 자신들의 성적 판타지에 감금시키려는 압제자들이고<span lang="en-us">, </span>코우즈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인물이다<span lang="en-us">. </span>그가 주최하는 낭독회는 사실 <span lang="en-us">‘</span>신사<span lang="en-us">’</span>들의 변태 성욕을 채우는 음란서적 낭독회였고<span lang="en-us">, </span>그의 서재는 온갖 기이한 종류의 성벽을 묘사한 서적과 춘화로 넘쳐난다<span lang="en-us">. </span>그에게 있어 여성은 자신만의 춘화를 완성시키기 위한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span lang="en-us">. </span></font></p> <p></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font size="2">백작은 코우즈키보다야 온건해 보이나 어쩔 수 없는 억압적 남성이다<span lang="en-us">. </span>그는 히데코 앞에서 자신을 이성적으로 욕구를 조절할 줄 알며 신분상승과 성공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고<span lang="en-us">, ‘</span>코우즈키에게서 해방시켜주겠다<span lang="en-us">’</span>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접근한다<span lang="en-us">. </span>하지만 그도 코우즈키의 낭독회에 연루된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통제를 꿈꾸며<span lang="en-us">, </span>결국 히데코가 던진 미끼에 <span lang="en-us">“</span>여성은 사실 강제로 하는 성교에 극상의 쾌락을 느낀다<span lang="en-us">”</span>는 헛소리와 함께 그 욕망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만다<span lang="en-us">.</span></font></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font size="2">백작은 히데코와의 수 싸움에서 패하고 지하실에서 코우즈키에게 고문을 당한다<span lang="en-us">. </span>여기서 백작은 코우즈키에게 히데코와의 성관계를 묘사하라는 요구를 받는데 이는 떠나버린 히데코를 자신의 성적 판타지 속에서라도 종속시키려는 코우즈키의 마지막 발악이다<span lang="en-us">. </span>백작은 꾀를 내어 첫날밤 이야기를 하는 척하다 수은 담배로 동반 자살을 한다<span lang="en-us">. </span>그는 히데코와의 성교를 묘사하기를 거부하고 함께 죽음으로써 그녀를 코우즈키의 음험한 세계에서 최종적으로 해방시킨다<span lang="en-us">. (</span>여기서 그가 실제로 히데코와 성교를 나누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span lang="en-us">. </span>그는 고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span lang="en-us">. </span>중요한 것은 그가 이야기를 함으로써 히데코를 코우즈키의 섹스 판타지에 종속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다<span lang="en-us">) </span>이 때 그는 <span lang="en-us">“</span>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어 다행이야<span lang="en-us">.”</span>라고 독백한다<span lang="en-us">.</span></font></p> <p></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font size="2">이 대사는 실제로 코우즈키가 실제로 백작의 자지를 자르려고 한 상황에서 한 말이지만<span lang="en-us">, </span>그럼에도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들린다<span lang="en-us">. </span>그는 다른 <span lang="en-us">‘</span>자지<span lang="en-us">’</span>를 경멸하면서도<span lang="en-us">, </span>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한 <span lang="en-us">‘</span>애기 장난감<span lang="en-us">’ </span>같은 자기 자지는 끝까지 간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span lang="en-us">. </span>이는 다소 이중적인 태도다<span lang="en-us">. </span>그는 이성적으론 코우즈키를 혐오하며 히데코를 그의 손에서 해방시킨다 했지만<span lang="en-us">, </span>한편으론 그 역시도 그녀를 자신의 성적 판타지에 종속시키려 했다<span lang="en-us">. (‘</span>자지<span lang="en-us">’ </span>대사 이전에 그가 내뱉은 대사는 <span lang="en-us">“</span>히데코는 나의 아내다<span lang="en-us">.”</span>였음을 명심하자<span lang="en-us">) </span>일종의 내로남불이라고 해야 할까<span lang="en-us">, </span>백작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히데코<span lang="en-us">, </span>숙희와 같은 여성을 마주한 대다수의 무심한 남성들을 대변한다<span lang="en-us">. </span>성 상품화와 억압적 질서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의식적으론 여성 해방에 동의하면서도 무의식 저변엔 여성을 향한 통제에 동참하는 <span lang="en-us">‘</span>우리<span lang="en-us">’</span>들<span lang="en-us">. </span>이 무리에는 퀴어 영화에서 여성 육체를 보기 좋게 전시하는데 공을 들인 박찬욱 감독이 속할 수도 있고<span lang="en-us">, </span>퓨리오사나 숙희<span lang="en-us">-</span>히데코 커플의 탈주극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길가의 설현 입간판에 감탄하거나 프로듀스<span lang="en-us"> 101</span>은 꼭 챙겨보던 내가 속할 수도 있다<span lang="en-us">.</span></font></p> <p></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span lang="en-us"><font size="2"> </font></span></p> <p class="MsoNormal" style="text-indent:10.5pt;"><font size="2">비겁하지만<span lang="en-us">, </span>나는 남성들의 이러한 이중성 앞에서 딱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span lang="en-us">. </span>심지어 내 깜냥으로는 여성을 향한 남성의 통제욕구가 윤리학의 문제인지<span lang="en-us">, </span>생물학의 문제인지도 단정지을 수가 없다<span lang="en-us">. </span>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span lang="en-us">, </span>우리들의 애기 장난감 같은 물건으로는 어떤 여성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span lang="en-us">. </span>나는 우리가 이 사실을 백작처럼 수은 연기와 함께 깨닫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font><span lang="en-us"><font size="2">.</font></span></p> <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