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font size="2">1. 액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재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지는 그런 날 말이다. 종국에 가서</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운수 더러운 날. 왜 액운이 끼였다고 표현하</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 그런 날 있지 않은가.</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일요일이었지만 남편은 아침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동호회 사람들과 등산을 갔을 테지만, 일</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언반구도 없이 사라진 남편에 대해 형순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깨우지 않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지만, 어제라도 자신에게 말했어야 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건 기본적인 예의 문제였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사랑니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치과 치료를 받았어도 전혀 내색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형순이 카드 명세서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을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때 남편은 놀랄 정도로 무덤덤하게 대답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게 뭐 대수라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몸에 깊이 베인 습관이었다. 부부라면 소소한 것마저도 공유해야 한다고 믿고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있는 형순에게 남편의 행동들은 짜증을 넘어서 스트레스로까지 다가왔다. 형순은 소파에 앉아서 티비도 켜</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생각하면 할수록 심각한 결론으로 치달았</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엄마, 왜 그러고 앉아 있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딸 영미가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로 나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형순이 영미를 쳐다봤다. 입덧한지가 엊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제 같은데 어느새 아이의 가슴이 불룩하다. 잠옷을 입었지만 드러난 굴곡들로 인해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젖</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먹이 꼬마는 없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배고프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9.5px;">”</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부추전 먹고 싶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가 며칠 전부터 노래를 부르던 그 부추전이었다. 형순은 기분전환도 할 겸 외출을 하기로 결심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의 손을 잡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빽빽하게 들어찬 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요일 오전이라 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런지 주차장 전체가 만원이었다. 차에 다가갈수록 형순의 가슴속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주차해 놓은 통로 쪽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씨발, 어떤 새끼인지 잡히기만 해봐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내부사람 짓이예요, CCTV 화면에 안 잡히는 차들만 골랐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기, 무슨 일이시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다가가자 욕설을 하던 남성이 손가락을 가리켰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기 보세요, 어떤 후레자식이 싹 다 긁고 갔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일렬로 늘어선 차들에 하나같이 굵은 줄이 그여 있었다. 뒤 트렁크부터 범퍼까지 날카로운 뭔가가 모조리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훑고 지나간 상태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자신의 경차도 그 속에 포함된 것을 확인하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주차장을 빠져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나가자, 저만치 순찰차 한 대가 오는 것이 보였다. 범인을 찾아내서 변상을 받을 거라는 희망은 가지지 않</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았다. 혼자였으면 못하는 욕이라도 내뱉었겠지만 영미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부동산에 잠깐 들른 다음에 마트로 갔다. 부동산에선 여전히 소식이 없었고, 마트의 물가는 삼일 전</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에 비해서 또 올라 있었다. 오천 원이면 충분하리라 여겼던 부추와 홍합의 가격이 팔천 원 가까이 육박하</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자 형순의 앙다문 입에서 옅은 신음소리가 삐져나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계산 안 하실 거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펑퍼짐한 몸매에 뿔테 안경을 걸친 점원이 신경질적으로 재촉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잠깐만요, 동전 좀 찾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걸치고 있던 가디건까지 벗고서 동전을 찾았지만 애초에 존재여부가 불투명했던 동전은 쉽사리 발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되지 않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거 좀 빨리빨리 합시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뒤로 어느새 서너명의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대체 지갑을 왜 안 가져 왔을까. 평소 충동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구매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돈만 들고 다니는 형순이었지만, 어느덧 그런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저 지갑을 가져오지 않은 자신에게 화가 났을 뿐이다. 결국 포장된 비닐을 뜯어 내용물을 덜어내고 나서야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간신히 가격에 맞출 수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현금영수증 할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라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현금영수증 한다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점원의 말투에서 묘한 불쾌감이 전해져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리 말씀하셨어야죠, 이런데 처음 와 보셨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 하자 점원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알았으니까, 거기 번호 누르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봐요! 당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 그냥 닥치고 빨리 좀 갑시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형순이 돌아보자 어느새 십여명으로 불어난 사람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있었다. 피카츄 빵을 손에 든 꼬마애 까지도 자신을 원망하듯 쳐다보자 맥이 탁 풀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돼지 같은 년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집으로 오는 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동산만 아니면 가지 않았을 곳이었다. 점원의 눈알을 세 번째로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뺐다가 끼웠을 때 형순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설 수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영미에게선 아까부터 싸늘한 침</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묵만이 풍겨져 나왔다. 자신이 창피했을 것이다. 딸의 입장이 이해는 가면서도 못내 섭섭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쿵”</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순간 육중한 충격에 형순의 고개가 속절없이 젖혀졌다. 놀란 영미의 눈동자가 형순을 향한다. 정말 오늘 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슨 날인가 보다. 형순이 재빨리 앞쪽을 쳐다봤지만 다행스럽게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자신의 잘못은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아닌 것이다. 백미러에 궁시렁 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사내 하나가 비쳤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내려 봐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단정히 깎은 스포츠머리에 갈색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였다. 40대 초반인 형순 보다는 어려 보였지만, 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리 차이가 날 터울은 아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시간 없으니까 빨리 말할게요, 아줌마가 사과하시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보험회사 부르면 되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까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의 말에 형순의 뱃속에서 뜨끈한 뭔가가 울컥 솟구쳤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쪽이 제 차에 박았잖아요, 지금 누구더러 사과 하라는 거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감정이 격양된 듯 커다란 소리가 튀어 나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제 말을 못 알아 들었군요, 전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 사과를 요구하는 겁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불현듯 사내의 전두엽 어딘가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러니까 아저씨가 사과를 해야지 내가 왜 하냐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시비 그만 거시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지금 누가 시비를 거는데요, 그쪽이야말로 헛소리 그만하시고 전화번호나 주시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두 사람 근처로 어느새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대부분 눈에 익은 얼굴들이었고, 몇몇은 같은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동에 사는 이웃이기도 했다. 형순의 시선에 자주색 주름치마를 입은 여성의 모습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옆</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집 사는 경주 엄마였다. 떨떠름한 느낌과 함께 눈앞의 사내에 대한 적개심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전화번호 줄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의 얄팍한 입술이 살짝 실룩 거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가 사과하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저씨 정신 나갔어? 우리 엄마가 왜 사과를 해야 되는 건데? 아저씨가 멀쩡히 있는 우리 차에 냅다 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박았잖아! 아저씨 치매야? 방금 전 일도 기억 안나나 보지?”</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머릿속이 분노로 새하얗게 변해있는 사이 영미가 사내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눈꺼풀이 반이나 덮여 내리자, 얇게 변한 눈 속에서 사나운 살기가 뿜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져 나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만히 있어, 어른들 일에 나서는 거 아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영미를 나무랐지만, 내심 통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다시 한 번 말해 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서 영미에게로 다가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까이 오면 겁낼 줄 알아요? 정신병원이나 가보...컥”</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가 순식간에 영미의 목을 움켜쥐었다. 부드러운 안무라도 추는 것처럼 그의 손이 재킷을 쓰다듬자 잭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프 한 자루가 어느새 손에 들려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악! 영미야, 오 맙소사. 무슨 짓이야 미친놈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꺽...억..”</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의 억센 손줄기에 영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영미가 반사적으로 사내의 손을 쥐어뜯었지만, 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것은 요지부동 이었다. 형순이 사내에게 달려들어 미친 듯이 팔에 매달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철컥”</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어느새 튀어나온 잭나이프의 칼날이 형순의 턱밑으로 파고들었다. 사내는 영미를 아무렇게나 밀어버리고선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남은 손으로 형순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악”</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두피 가죽이 생으로 뜯기는 듯한 고통에 형순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들었다. 단순한 접촉사고로 생각했는데, 칼이 튀어 나오고 비명이 터지자 모두가 꼼짝도 않은 채 사내를 지</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켜봤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잘 들어, 예전 같았으면 면상에 그림이라도 하나 그려 줬을 거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목에 닿아 있는 칼날에서 차가움 이상의 한기가 느껴졌다. 머리채를 붙들린 형순의 눈에 잔기침을 해대는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영미의 모습이 보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제 사과는 필요 없어, 그렇다고 변상을 안 하겠다는 말은 아냐. 그냥 좆같은 년들 만났다고 넘길 테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까 더 이상 엉겨 붙지마”</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칼날을 피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리고 거기 아줌씨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의 잭나이프가 하얗게 질려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얼굴 모조리 외우고 있으니까, 혓바닥 함부로 놀리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가 칼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로로 긋는 시늉을 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장담하건대 편하게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내 기억력을 시험하고 싶다면 한 번 해 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내가 형순을 놓자, 뽑혀나간 머리카락들이 꽃잎처럼 흘러 내렸다. 고통에 비해서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형순은 떨어진 머리카락들을 멍하니 주워들었다. 사내가 떠나고 난 뒤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정확하게 떠오</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르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엘리베이터를 탔을 테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 주위에 있</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꿈속을 헤매는 듯이 몽롱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정신을 차린 것은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고 나서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등산복 차림의 상준이 의아한 눈빛으로 형순을 바라보자 그만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오전까지 가졌던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남편에 대한 원망은 봄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형순이 자신을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자 상준은 당혹해 하</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면서도 형순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참을 울던 형순이 입을 열었다. 주차장사건부터 해서 마트, 그리고 칼로 협박하던 사내까지 남김없이 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어 놓았다. 얘기를 듣는 도중에 남편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사내가 영미의 목을 조르던 부분에서</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 굵은 눈썹이 위아래로 크게 꿈틀거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는 어딨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방에 있을 거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남편이 벌떡 일어섰다. 영미의 방에 들어간 남편이 일분도 되지 않아 다시 거실로 나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전화번호 받은 거 이리 줘 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남편도 영미의 목에 남겨진 손자국을 보았을 것이다.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뱀처럼 영미의 목을 휘감고 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었다. 붉게 물든 손가락 하나하나에 사내의 더러운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근데 신고하면 죽여 버린다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 상태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얼마나 악질적인 놈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넘어가면 안 돼, 당신이나 나나 영미 부모 노릇 계속 하고 싶으</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면 반드시 신고해야 돼”</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당신이 못 봐서 그래, 사람들 없었으면 진짜 찔렸을 수도 있단 말이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불안해하면서도 사내가 내던지고 간 명함을 건네주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천도 캐피탈... 상무 박용식?”</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은 곧 어딘가로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준의 모습에 형순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형순</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본 사내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애당초 신고 따위가 겁났다면 결코 칼을 꺼내들지는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않았을 것이다. 통화를 하는 상준을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충격에 빠져 있을 영미를 떠올리자 그마저도 쉽</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지 않았다. 상준이 한참 만에 통화를 끝내고 형순에게 고개를 돌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동호회에서 알게 된 형사가 하나 있는데, 전화해 보니까 걱정하지 말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걱정하지 말라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응, 양아치 같은 놈들이 그냥 겁주는 거래.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일이 벌어지나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정말 그랬으면 좋으련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은 형사의 말에 심히 안심하는 눈치였지만, 형순은 그렇지 못했다. 까닭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라 왔다. 사내의 가늘게 희뜬 두 눈이 형순의 전신을 훑는 듯 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다음 날 형사가 초인종을 누른 시각은 점심도 먹지 않은 오전이었다. 남편은 출근했지만, 영미는 방문을 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어 잠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문 앞에서 한참을 실랑이 할때 형사가 찾아 온 것이다. 형사는 건장한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체격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호남형 이었다. 자신을 한지욱으로 소개한 형사는 뜨거운 커피를 서너 모</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금 만에 비워버리곤 수첩을 꺼내들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칼로 협박하고 따님의 목을 졸랐다 이거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거기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협박하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 맞아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전형적인 동네 건달입니다, 아주머니께서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진짜 프로들은 그런 식으로 겁</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을 주진 않거든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진짜 프로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프로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냥 또라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앞뒤 안가리고 덤벼드는 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식한 놈들 있잖습니까”</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정말 그럴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 저만 믿으세요. 그냥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참 명함이 있다고 들었는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 여기 있어요! 명함”</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사는 명함을 잠시 훑어 본 뒤 형순에게 입을 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따님은 학교에 갔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고개를 저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창피하다고 방에서 안 나오네요, 학교에 말해놓긴 했는데 걱정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제가 잠시 따님을 봐도 될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를요? 아, 잠시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영미의 방문이 삐그덕 열렸다. 폴라티로 목 전체를 꼼꼼히 감싼 영미가 쭈삣</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쭈삣 거실로 나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형사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삼일이나 지난 후였다. 손자국이 눈에 띄게 희미해지자 영미는 학교에 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갔고, 형순의 마음도 안정을 되찾아 가던 중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지욱 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 안녕하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다름이 아니고 박용식이 때문에 말인데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박용식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칼들고 협박하던 놈 말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 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약간 문제가 생겼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뜬금없는 형사의 말에 형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문제라뇨?”</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 놈이 오리발을 딱 내밀고 있어요, 자기는 죽어도 그런 적이 없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말도 안 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번거로우시겠지만 목격자 진술이 필요해요, 이 놈 배짱이 두둑해서 웬만한 말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수화기를 든 형순의 팔이 파르르 떨려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목격자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데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증거불충분으로 석방해야 합니다, 구경꾼이 많다고 하셨으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석방 된다면 조</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금 위험할 수도 있어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사가 이웃 나라 뉴스라도 전하듯 덤덤하게 대꾸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슨 말이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왜 일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진짜 프로들 말이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괜찮을 거라면서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슴을 졸이며 형사의 말을 듣던 형순이 소리를 빽 질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괜찮습니다, 제 실수도 있는데요 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 명만 있으면 됩니다,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사람 중에 한명만 진술해 주면 최소 오년이상은 감옥에 쳐</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넣을 수 있어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통화를 끝낸 형순이 습관적으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그냥 풀려나게 하든</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지 아니면 오년간 감옥살이를 시켜야 했다. 지금 풀려난다 하더라도 해코지를 안 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경</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찰서를 나온 사내가 아파트 단지 입구에 숨어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사내는 형순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잭</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나이프를 정성스레 닦고 있을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문득 남편에게 말을 꺼낸 사실이 후회됐다. 애당초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사내와의 인연은 며칠 전으로 끝</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났을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하나였다. 감옥살이를 시킨 다음에 멀리 이사 가서 사는 것이</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때마침 집도 부동산에 내놓질 않았는가. 그곳까지 따라오지는 못할 터였다. 우리나라의 수사 제도가 그</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렇게 허술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심이 서자 바로 실행으로 옮겼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누구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예요, 705호 영미엄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문이 열리고 곱슬곱슬한 파마머리의 여인 한 명이 형순을 반겼다. 여인은 형순이 들어오자 며칠 전의 사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을 냉큼 화젯거리로 올려놓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진짜 무슨 일 나는 줄 알았어, 세상에 그런 미친놈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과일 쟁반에 한과까지 한상 차려지자 형순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 그 놈은 잡혔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 지금 경찰서에 있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흥, 쌤통이다. 그런 놈은 아주 그냥 푹 썩게 해 버려야 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같은 동에 사는 명희엄마였다. 반상회 날이면 어김없이 목소리를 높이며 분기</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탱천해 하던 그녀였다. 관리비부터 시작해서 물탱크 청소문제, 입주자들의 조망권 문제에까지 불만을 터트</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리던 그녀였다. 그녀의 당찬 성격에 형순의 가슴속까지도 시원해지곤 했던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서 말인데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명희엄마가 썰어놓은 과일 조각을 먹는 틈을 타 형순이 말을 꺼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응?”</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증거가 부족하대요, 목격자 진술이 필요하다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증거가 부족한 것이 마치 자기 잘못인 냥 형순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냥 봤던 사실만 그대로 얘기해 주시면 돼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명희엄마는 말없이 과일만 씹고 있었다. 오물거리는 입술 끝으로 형순의 신경이 집중됐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나도...해주고 싶은데, 요즘 우리집 분위기가 좀 안 좋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는 형순의 시선을 피한 채 손가락으로 바닥 장판을 쓱쓱 문질러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명희아빠 건강도 좀 안 좋고, 영미엄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얘들이 셋이나 있잖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저리 말을 돌렸지만 결론은 꺼림칙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font><font size="2">때</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까지는 분명 희망이 있었다. 두 번째를 지나 세 번째 집을 나섰을 때도 약간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희망</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을 버리진 않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사방이 불그스름해졌을 때 형순은 다섯 번째로 들렀던 현수네 집에서 나왔다. 지평</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선 끄트머리에 샛노란 노을이 잉크처럼 번져 있었고, 아파트 단지 전체가 음울한 빛깔에 깔려 있는 초저녁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무렵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띵동”</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마지막으로 207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혼자살고 있는 이혼녀의 집이었다.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으</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니 분명히 도와줄 거라고 믿으며 남겨둔 히든카드였다. 두 번째로 초인종을 눌렀을 때 현관문 아래로 새어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형순은 한번 더 눌러볼까 망설이다가 그냥 돌아섰다. 누가 전해주었는지는 몰라도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그녀는 이미 형순의 방문목적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방은 이제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고, 형순이 지나</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갈 때마다 복도 등이 하나씩 켜질 뿐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집으로 오자 아무도 안온 듯 불이 꺼져 있었다. 열쇠를 꺼내 구멍에 꽂으려는 순간에 옆집의 문이 눈에 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어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 경주 엄마도 있었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자주색의 주름치마를 입고 있던 경주엄마가 떠올랐다. 퀭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그녀가 떠오르자 형</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순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차마 그녀에게는 부탁할 수가 없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니야, 혹시...’</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도 모르는 일이었다. 형순은 정말로 내키지 않았지만 한 번 말을 꺼내 보기로 했다. 초인종의 감촉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괴물의 눈알을 누르는 것처럼 소름이 돋아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띵 동”</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잠시 후 문이 열리고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2. 기억</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대략 십년 전쯤일 것이다. 영미가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니 아마 그쯤 되었을 것이다. 보다 나은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학군을 찾아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형순은 경주엄마를 처음 만났다. 새로 분양중인 아파트인지라 한창 이</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삿짐 센터의 차들로 북적거릴 때였다. 형순이 이사를 오던 날 공교롭게도 옆집 경주네도 이사를 왔다. 먼저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온 형순 탓에 두어시간이나 컨테이너차를 대기시켜야 했지만, 군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본 경주엄마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뽀얀 피부는 처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웠</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엄마를 쏙 빼닮은 경주도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아마도 경주와 영미가 친해진 건 당연한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수순이었을 것이다. 동갑 터울에 새로 입학한 초등학교까지 똑같자, 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다녔다. </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아빠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는데 주말만 되면 엽총 한 자루를 들고서 이 산 저 산으로 돌아다니는 특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밀렵이 불법인 것도 모르는 형순의 가족에게 꿩이며 토끼 고기를 나눠주던 그가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떠올랐다. 제법 솜씨가 좋은 모양인지 멧돼지를 잡아오는 날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형순의 남편까지 나서</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서 피에 절은 포대자루를 옮겨오곤 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다시 그 날로 돌아간다면 되돌릴 수 있을까. 형순은 가끔씩 그 날을 떠올려 본다. 경주와 영미가 안방에서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놀고 있었고, 형순은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그야말로 평범한 날이었다. 별안간 찢어지는 폭발음에 형</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순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황급히 안방으로 들어가자 바닥 곳곳이 불구덩이였다. 거칠게 찢겨 발겨진 스프레</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통이 나뒹굴고 있었고, 아이들은 기절한 듯 움직임이 없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재빨리 영미를 들쳐 업고 거실로 나왔다. 다리에 붙은 불을 자신의 겉옷을 벗어 대충 끈 뒤 다시금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안방으로 뛰어갔다. 경주가 불구덩이 속에 얼굴을 처박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경주를 일으키려던 찰나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막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한 도화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미가 좋아하던 세일러문도 보지 않은 채, 학교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숙제로 그린 가족그림이었다. </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당시의 형순은 불가사의한 힘에라도 이끌린 듯 도화지</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를 집어 들었었다. 손바닥을 털어 도화지에 붙은 불을 끈 뒤 이빨로 그것을 물었다. 그러고 나서 경주를 안</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거실로 나왔는데, 경주의 얼굴은 이미 처참하게 훼손된 후였다. 한쪽 눈꺼풀은 거진 타버려서 희멀건 동</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공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인중 쪽으로 뒤집혀 올라간 입술에서는 기괴한 수포들이 울룩불룩 솟아 있었</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충격을 받은 형순이 멍하게 있는 사이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폭발음을 듣고 들어 온 사람들이 안방에 붙</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은 불을 끄고 119까지 불러 주었지만, 형순은 경주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듣고 허겁지</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겁 병원으로 달려 온 경주 엄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신이 도화지를 줍지 않고 경주를 먼저 빼냈다면 괜찮을 수 있었을까. 수 백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번 생각해 봐도 대답은 ‘아니오’였다. 2초도 안 되는 시간을 줄인다고 해서 경주의 얼굴이 달라질 것 같</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지는 않았다. 수포 한 두개쯤은 없앨 수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결과는 비슷했을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화상의 치료과정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형순도 잘 안다. 종아리에 난 손바닥만한 화상 치료에도 영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 있는 대로 비명을 질러댔었다. 하물며 경주는 오죽했을까. 둘은 같은 병원에 입원했고, 형순은 경주의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치료과정을 여과 없이 목격할 수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오랜 만이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엄마의 건조한 음성에 형순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습한 공기와 함께 퀴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한 냄새가 확 끼쳤다. 곰팡이 냄새에 옅은 지린내를 섞어 놓은 듯한 악취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거실로 올</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라서자 기이한 광경들이 나타났다. </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냉장고를 제외한 모든 가구에 나일론 비닐들이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티비, 에어컨, 소파 할것 없이 모조</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리 불투명한 비닐 속에 들어가 있었다. 전화기는 아예 코드가 뽑힌 채로 비닐에 둘둘 말려 있었다. 경계심</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을 품고 형순이 주위를 살폈다. 전체적인 골격은 자신의 집과 비슷했지만 을씨년스러운 내부는 완전히 달랐</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어정쩡하게 서 있노라니 그녀가 앉을 것을 권했다. 바닥에 앉자 엉덩이를 통해 서늘한 기운이 전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져 왔다. 그러고 보니 집안 전체가 싸늘했다. 형순의 머릿속에 비닐로 덮여 있을 보일러가 떠올랐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대접할게 이것 뿐이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가 오렌지 주스 한잔을 건네고는 형순의 맞은편에 앉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괜찮아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건네받은 오렌지 주스를 슬며시 내려놓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근데 무슨 일로...”</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의 시선이 형순의 주스 잔으로 향한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자주 찾아왔어야 했는데, 살다보니까 그게 잘 안 되더라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가 침묵하자, 형순이 놓았던 잔을 슬그머니 다시 들어 올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는 잘 있나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억지로 주스를 한 모금 밀어 넣자 식도 입구에서부터 거북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주스가 상하거나 하진 않았겠지만</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 부패한 우유를 마신 것처럼 기분이 메스꺼웠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야, 나와 보거라. 영미아줌마 오셨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가 형순의 뒤쪽으로 고함을 치자 당황한 형순이 그녀를 말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놔두세요, 자는가 봐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가 아랑곳 하지 않고 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몇 년 만에 손님이 오셨는데, 계속 방구석에 숨어 있을 작정이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한 번 더 말리려는 찰나에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경주의 방은 형순의 뒤편에 있었지만 정면에 매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린 전신거울로 인해 모든 것이 비춰지고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스륵”</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시커먼 뭔가가 방바닥을 쓸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머리카락인 것을 깨달았을 때 형순의 입은 저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로 벌어졌다. 그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듯 시커먼 머리카락들이 허리와 다리를 지나 바닥까지 내려와 있</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었다. 기다란 레이스 치마 역시 발끝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그것이 머리카락과 함께 바닥을 쓸자 기분 나</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쁜 마찰음이 생겨났다. 발이 보이지 않아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귀신같은 경주의 등장</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에 형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안녕...하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입에서 철판 긁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두암 말기 환자가 성대에 기계를 연결해서 내는 소리와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비슷했다. 경주의 음성에 형순의 목덜미에서 소름이 쫙 돋았다. 별안간 이 집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맹</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렬히 솟구쳤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그래, 오랜만이구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잠시 멈췄던 경주가 슬금슬금 걸어 형순을 지나쳤다. 제 엄마 옆에 선 그녀가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헉’</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얼굴에 형순이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의료용 마스크를 쓴 상태였지만, 두 눈만은 오롯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드러난 상태였다. 오른쪽 눈은 눈꺼풀부터 눈썹 중간까지 피부 가죽이 아예 사라진 상태였는데, 그 자리를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돌출된 안구가 차지하고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제 말해 봐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엄마가 정적을 깨며 형순에게 말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다...다름이 아니구요, 목격자 진술을 부탁하려고 이렇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슨 말이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경주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자초지정을 설명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서 말하면 되나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냥 본 대로 말하면 되냐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그래요..그냥 몇 마디 말만 하시면 끝납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렇게 할게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허탈할 정도로 그녀는 쉽게 승낙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위험할 거 같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조용하게 서 있던 경주의 입에서 다시금 쇳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녀는 딸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은 채 물끄러미 형순을 바라봤다. 무심한 듯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형순은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는 삼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소독을 받았다. 검붉은 피딱지와 함께 싯누런 진물이 범벅이 된 붕대를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풀 때면 경주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었다. 소독이라고 해봐야 뭉개진 얼굴에 과산화수소를 붓는 것이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전부였지만, 장정 두 명이 달려들어야 할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기도 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소독약이 경주의 얼굴로 쏟아지면 새하얀 포말들이 끓는 것처럼 솟구쳤다. 고통이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경</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주는 매번 경기를 일으켰다. 경주를 붙잡은 장정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힐 때야 비로소 소독은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끝났는데, 어찌나 심하게 몸부림 쳤던지 경주의 환자복은 땀에 흠뻑 절어 있는 상태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소독이 끝나면 간호사가 들고 있던 대바늘로 수포들을 터트렸다. 분화구처럼 부풀어 오른 수포들이 경주의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는데, 그것을 터트릴 때마다 역한 고름 찌꺼기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곤 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는 그런 딸의 모습을 한 순간도 피하지 않고 함께 했다. 모든 과정이 끝나고 새 붕대로 얼굴을 감쌀 때</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면, 경주의 손을 잡고 안쓰러울 정도로 오들오들 떨어대는 것이었다. 그녀는 형순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저 꺼멓게 죽은 눈으로 형순을 바라볼 뿐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분사되는 스프레이에 불을 붙이고 놀다가 일어난 우발적 사고였다. 불씨 하나가 주입구를 통해 통 안으로 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어갔고, 압축된 가스가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리 딸은 병신이 됐는데, 왜 영미는 무사한 거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아빠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을 때 형순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과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되면 정말 자신이 잘못한 것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 해 겨울 경주아빠는 만취 상태에서 도로를 건너다 덤프트럭에 깔렸다. 아파트 단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데, 목격한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몸 전체가 아스팔트에 납작하게 펴져 있었다고 한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폭발 사고 후 영미는 병원에 있는 한 달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형순이 갖고 나온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그림 역시 제출 되지 못했다. 형순은 영미를 데리고 도망치듯 퇴원했고, 그 후 경주엄마와 경주를 다시는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찾아가지 않았다. 일 년쯤 지나 경주도 퇴원했지만, 형순은 의식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그들을 피해 다녔</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던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위험 할 것 같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재차 입을 열었을 때 형순이 대답을 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렇지 않아, 모두 비밀로 하고 게다가...증인보호 프로그램도 있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시사 프로그램에서 들은 단어를 급한 대로 빌려 썼다. 경주가 진의를 확인하려는 듯 고요히 바라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떳떳하다는 표시로 경주의 허연 눈알을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려 주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신발을 신고 현관을 빠져 나갈 때 두 모녀가 나란히 서서 배웅을 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선 문을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닫으려는 순간에 경주가 빠르게 다가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슨 일 생기면 아줌마가 책임져야 합니다”</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다음 날 형순은 경주엄마와 함께 경찰서로 출두했다. 이중유리로 이루어진 취재실안에서 형순을 협박하던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사내가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자 한형사가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책</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상으로 향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용기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구속까지 일사천리로 진행 시킬 수 있게 됐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형사는 경주엄마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두 달이나 세 달쯤 후에 재판이 열릴 겁니다. 그때 두 번 정도만 더 법정에서 진술해 주시면 놈은 꼼짝없</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교도소행 입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또 말해야 한다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의 반문에 형순이 초조한 낯빛을 띄었다. 한형사가 형순을 한 번 슬쩍 쳐다보고는 그녀에게 또다시 넉</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살 좋은 미소를 지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간단합니다. 판사가 물어보는 대로 대답만 하면 끝납니다, 요즘은 많이 나아져서 한 두 번 만에 끝내거든</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요. 재밌는 경험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는 전혀 재밌어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말없이 손가락만 꿈지럭거리고 있었는데, 지켜보던 형순도 덩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아 침묵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알았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찰서를 나와 두 사람은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흉물스런 자국이 뒤 트렁크에 여전히 나 있었지만 형순</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런데 집에 비닐들은 왜 씌워놓은 거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용하지도 않는 걸요, 돈도 없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뿔싸.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녀에겐 월급을 가져다주는 남편이 없다. 그녀도 별다른 직업이 없는 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당에 당연히 돈이 부족할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태껏 보험금 때문에 먹고 살았는데 이젠 그것도 거의 안 남았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 죄송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어디 식당이라도 나가야 되겠어요, 경주 그년이 지 아빠 닮아 고기를 좋아하거든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CCTV가 보이는 곳으로 골라서 주차를 마치자 둘은 차에서 내렸다. 같은 동에 사는 주민 두 명이 둘의 모습</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바로 옆에 살면서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었다. 집에 오자 영미가 간식을 먹고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어디 갔다 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엄마랑 경찰서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 누구랑 갔다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는 입 안에 있던 과자 부스러기들을 마구 뱉어내며 되물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너도 가끔 경주한테 찾아가봐, 그래도 어릴 땐 친했잖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가 고개를 흔들면서 작게 중얼거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말도 안 돼, 말도 안 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영미가 다짜고짜 화를 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엄마, 좀 치사한 거 아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슨 말이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때까지 모른 척 하다가 필요해 지니까 찾아가고 말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너, 말이 심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봐! 엄마가 경주엄마라면 기분 안 나쁘겠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의 말에 형순이 울컥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영미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럼 어떡하란 말이야? 응? 다들 증언해주기 싫어하는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안 하면 되잖아! 누가 신고하래? 그냥 넘어 갔으면 아무 일 없잖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철썩. 형순이 영미의 뺨을 모질게 후려쳤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영미의 몸이 잔 경련으로 떨리기 시작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영미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형순이 넘어질 듯 소파에 주저앉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나쁜 년, 내가 누구 때문에 그랬는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녁에 퇴근한 상준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고 물어 보았지만, 둘 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며칠이 지난 어느 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집을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형순이 하루 종일 집안을 쓸고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닦자 새 집 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만족할만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저녁 무렵에 노부부 한 쌍이 방문</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했는데, 시종일관 깐깐한 눈빛으로 집안을 살폈다. 형순과 상준이 열심히 입방정을 떨어댔지만, 별로 탐탁</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들이 돌아간 후 형순과 상준은 깨끗이 포기했다. 그들의 태도로 봐서는 전혀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가망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하지만 둘의 예상과 달리, 다음 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노부부가 집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이다. 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로 울적해 있던 형순이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머리가 허옇게 센 부동산 할</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아버지한테 마구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녁에 영미와 상준이 돌아오자 미리 손질해 둔 소갈비를 구웠다. 영미는 여전히 뾰로퉁해 있었지만 아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렴 어떠냐 싶었다. 상준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식사가 이루어졌다. 모두</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의 밥공기가 거의 비워졌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누구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밖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누구세...”</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현관문을 벌컥 열었을 때 문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구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리 엄마 보셨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끼륵 거리는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니, 못 봤는데...엄마 아직 안 오셨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쓴 경주의 코 부위가 들썩거렸다. 비록 코가 있어야 할 부분</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평평했지만 어림짐작으로 그곳이 코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불에 녹아 버렸겠지만 후각은 살아</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있는 모양이었다. 경주가 갈비냄새에 반응을 보이자 형순이 마음을 먹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직 저녁 안 먹었지? 들어와, 같이 저녁먹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는 형순의 말에 선선히 따랐다. 경주가 거실을 지나 식탁 쪽으로 갔을 때 상준과 영미의 움직임이 일제</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히 멈췄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오랜만에 왔네, 당신도 알지? 옆집 사는 경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그래 당연히 알지. 너 오랜만이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어색하게 웃자 경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영미는 입을 떡 벌린 채 굳어 있었는데, 상준이 툭툭 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드리자 더듬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세상에... 진...진짜 경주구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는 식탁대신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소파 전체로 퍼지자 거실 가득 그로테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크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배가 고팠을 테지만 웬일인지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마 엄마가 걱정됐기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때문이리라.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긴 침묵이 흘렀다. 습한 날씨에 분위기까지 고요하자 형순의 가슴속에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생겨났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따르르르릉”</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적막을 깨고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형순이 흠칫 놀라며 수화기를 들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보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 한 형사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 잘 지내셨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잠시 동안 수화기에서 침묵이 흐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말씀하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상준을 바꿔 주려다가 묘한 기분이 들어 그만 두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거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참...”</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의 음성에 강한 껄끄러움이 묻어 나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신명희씨 있잖습니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누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진술하러 같이 오신 분 말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 네, 그런데 무슨 일이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또다시 침묵이다. 소파에 앉아 있던 경주가 고개를 들어 형순을 바라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죽었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3. 탈출</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수화기를 든 형순이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형순</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을 움직이게 한 것은 경주의 시선이었다. 경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주시하자 형순이 억지로 입</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을 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어쩌다가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슴에 칼을 찔렸어요, 천만다행으로 찌른 놈을 잡긴 했는데 아무래도 박용식이 똘마니 같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렇군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철저히 비밀로 했거든요.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있으십니까?”</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뇨, 없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리는 것을 주민들 몇 명이 쳐다보고 있던 광경</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었다. 형순이 버릇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반나절도 되지 않아 아파트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진술을 부탁하기 위해 방문한 집만 해도 제법 되니 소문은 더 빨리 퍼졌을 수도 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무서울 정도로 덤덤한 대답에 그의 말이 잠시 끊겼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목격자가 있으니까 곧 자세한 정황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니 그때까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목격자. 목격자. 그놈의 목격자가 문제였다. 안전할거라고 장담하던 형사의 혓바닥을 다리미로 지져 버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싶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혹시 가족 분들 폰 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조회해 보니 따님이 한 분 있는 걸로 나오는데, 집으로는 아</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무리 전화해 봐도 안 받더라구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뇨, 모르겠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렇군요, 죄송한 부탁이지만 따님을 보시거든 제 연락처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직접 가야 되는 건데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갑자기 비상이 걸려서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는 송구스럽다는 음성으로 형순에게 부탁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알겠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의 뒷말을 적당히 끊은 채 형순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누구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관리실 아저씨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응? 그 사람이 무슨 일로?”</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별거 아닌데, 도시가스 파이프 하나가 얼었나봐. 가스 잘 나오는지 물어보더라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으...응”</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눈짓을 보내자 상준이 어색하게 수긍을 해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형순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있었다. 경주의 시선이 상준을 향했다가 다시금 형순을 향한다. 희멀건 안구가 또르륵 굴러가는 것을 보며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형순이 생각을 굳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주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었지만 지금은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죽은 사실을 알면 경주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슨 일 생기면 아줌마가 책임져야 합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며칠 전 들었던 말이 다시금 귓전을 울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야 일단 밥 먹자, 엄마 오늘 안 오실지도 몰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리 말했어야 하는데 당분간 비밀로 하라고 하셔서...”</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비밀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응,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 일자리 구한다고 잠시 어디 가셨거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일자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마스크가 불룩하게 솟았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지면서, 두 눈 가득 의심의 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초리로 채워졌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너...너도 알고 있었잖아. 느이 엄마 요즘 일자리 구한다고 하시는 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맞아요, 근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형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나도 모르는 사실까지 아줌마가 어떻게 알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상준과 영미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지켜만 보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침착하자, 유형순! 이 아이는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어. 섣불리 대답했다간 금방 들통날 거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건 나도 모르지, 오시거든 한 번 물어봐. 왜 나한테만 말했는지 말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입술은 다문 채 볼 근육만을 이용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도대체 무슨 일이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돌아가자 상준이 다급하게 물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 엄마가 죽었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정말이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과 영미의 입에서 동시에 반응이 튀어 나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까 전화, 관리실 아저씨가 아니라 경찰서에서 걸려온 거였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왜 죽어?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살해 당했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자세히 좀 얘기해봐, 그러니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살해를 당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당신이 그 빌어먹을 형사한테 신고했기 때문에 죽은 거라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한 대 얻어 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근데 왜 경주한테 말 안했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당신 같으면 그 상황에서 말이 나왔겠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럼 어떡해, 어차피 경주도 알게 될 텐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안전할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경주한테 말했었다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버럭 고함을 지르던 형순이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아찔한 두통이 미간에서부터 정수리까지 할퀴고 지나갔</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형순의 말에 상준이 말없이 소파에 앉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가 형순에게 물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사 갈거야. 경주에게는 며칠만 비밀로 하면 돼. 여기 계속 있다간 우리까지 위험해져”</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세상에...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아빠 무슨 말 좀 해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버리자 영미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쳤어, 다들 미쳤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다음 날 상준은 몸살을 핑계로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사실 결근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형순의 강경한 태</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도에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둘은 오전에만 열 집 가까이 방문했다. 아파트든 빌라든 상관없었지만, 지금 사</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 곳과는 최대한 떨어진 곳이어야 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의 회사야 어차피 중심가에 있었기 때문에 교통 상 거리낄 것은 없었다. 점심은 이동 중에 햄버거로 때</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웠고,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망설이지 않고 빠져 나왔다. 아마도 집 주인들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황당</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후에도 번번이 허탕을 쳤다. 상준이 관심을 보이는 곳은 더러 있었지만 형순이 마음</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에 들어 하지 않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늦은 저녁을 다시 햄버거로 때우고는 대방동으로 향했다. 시간상으로 볼 때 이 집이 거의 마지막일 듯 싶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신축한 지 삼년도 안 된 아파트였는데, 급매물로 올라온 것을 운 좋게 발견한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집 주인은 사는 곳이 따로 있었는데, 투자 개념으로 사둔 것을 좀처럼 값이 오르지 않자 내놓은 것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주인이 잠금 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인테리어가 깔끔한 것이 형순의 마음에 들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베란다와 보일러실까지 돌고 온 상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형순이 주인한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형순이 선금으로 오백만원을 내자 주인이 양도계약서를 작성해 주었다. 이제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중도금과 잔금만 치르면 계약서에는 자신들의 붉은색 인장이 찍힐 터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자정이 가까워서야 집에 도착했다. 지하주차장은 퇴근한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리저리 돌아봐도 빈자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을 때 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어, 한형사, 그래 지금 나랑 있어. 왜?”</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의 말에 형순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툭툭 건드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 아, 잠깐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용케 알아듣고는 핸드폰의 스피커기능을 작동시켰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두 분이서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응, 볼일이 있어서 말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모님 좀 잠깐 바꿔 주시겠습니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도 듣고 있어요, 말 하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대답에 그가 멋쩍은 웃음소리를 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하하. 그러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신명희씨 말인데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무래도 부검을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사인이 명확하지가 않아요. 흉부관통상으로 봤는데, 검의관 말</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로는 아닐 수도 있답니다. 신명희씨 집에서는 계속 전화를 안 받구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부검하는데 가족들 동의가 꼭 필요한가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렇진 않습니다. 연고자 없는 사체의 경우에는 임의로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래도 조금 꺼림칙한 면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있죠”</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럼 일단 하세요. 제가 그 집으로 직접 찾아 가볼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날 밝는 대로 방문할 생각이거든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과 상준의 시선이 중간에서 얽혔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무슨 핑계를 대야 그가 찾아오는 걸 막을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수 있을까. 형순이 잠시 고민하느라 말이 없자 한 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사실 약간 걱정이 돼서 전화 드렸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걱정이라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의 반문에 그가 가볍게 대답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전화해도 아무도 안 받길래 혹시나 했죠, 신명희씨처럼 무슨 일 생긴 건 아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잠깐만요! 전화한 시각이 언제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방금 전이요, 십 분도 안됐을 겁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오, 맙소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미친 듯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오층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가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형</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순에게는 지독히도 느리게 보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입술을 물어뜯으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 시간에 영미가 잠들었을 리는 없다. 늘 새벽까지 영화를 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운 받아 보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된 일일까.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할 정도로 영미는 느긋한 성</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격이 아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대체 왜 안 받은 거지? 피곤해서 일찍 잠든 걸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띵, 두둥”</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형순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엘리베이터로 옮겨 놓자 상준이 칠층의 버튼을 눌</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렀다. 칠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형순이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집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던 영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형순을 쳐다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야 이 망할 기집애야, 집에 있으면서 전화는 대체 왜 안 받았어, 응?”</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깊은 안도감이 지나간 후에는 억울한 감정이 찾아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악, 아퍼! 왜 때리고 난리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팔뚝을 철썩 때리자 영미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러게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것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형순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화장실에 있었단 말야, 그럼 나보고 일보다 말고 전화 받으란 말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밤새 뒤척거렸다. 내일 한형사가 찾아 올 것을 생각하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틀 정도</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만 더 있었다면, 아니 하루만이라도 좋았다. 딱 하루만 늦게 온다면 그 사이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빠져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도의적인 비난은 받을지언정 법적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혼자 남</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겨질 경주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뒤이어 떠오르는 그녀의 추악한 용모에 그런 생각은 슬그머니 사</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라져 버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날이 밝자마자 형순이 침실을 빠져 나왔다. 전신이 욱신거리고 뻑뻑한 눈알에서는 이물감이 느껴졌지만 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녀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새벽녘에 이르러서야 계획하나가 떠올랐고, 그것 외에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보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선 용역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인부 세 명과 용달차 한 대를 요구하자 직원이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제가 말씀 드린 장소로 오셔서 대기하고 있어 주세요, 바로 작업할 수 있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조금 특이한 요구였지만, 직원은 별다른 질문도 없이 승낙했다. 통화를 끝내고서 출근하려는 상준을 붙잡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오늘 그 사람들한테 돈 받아서 입금 시킬 테니까 저녁에 영미 데리고 새 집으로 가 있어, 당신이 더 빨</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리 마치잖아”</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벌써? 아직 가구도 안 옮겼잖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옮길 거야, 맨바닥에서 자게 하진 않을 테니까 내 말대로 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미덥잖은 표정으로 형순을 쳐다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냥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는게 어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당신이 말해 준다면 기꺼이 찬성하겠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니다, 그냥 새 집으로 갈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과 영미가 나가고 나자 형순이 다시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CF에서 자주 들어 봤던 클래식 선율이 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러나오고 잠시 후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보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안녕하세요, 저 영미엄마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찾아갈 생각이었는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지금 아무도 없어요, 학교에 간 것 같은데 불러도 대답이 없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요? 이거 어쩐다...그래도 일단 제가 가겠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러지 말고 이따가 밤에 와보세요, 고등학생들 보충수업 여덟시 넘어서 끝나거든요. 지금 와봤자 헛걸음</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만 할 텐데요 뭘”</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찰칵. 한형사와의 통화를 마친 후에도 형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노부부에게서 오전까지 입금을 약속 받</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나자 일이 술술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용도실에 처박혀 있던 박스들을 꺼내 귀중품부터 차근차근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챙겨 넣었다. 장식품이나 전시된 물건들은 가급적 피하고 서랍이나 장롱속에 있는 것들을 위주로 차곡차곡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담아 나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안방과 영미 방에 있는 옷들을 모조리 꺼내서 거실 중앙으로 모았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어서 나중에는 박</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스뿐만 아니라 보자기, 심지어는 담요까지 동원해 말아 넣었다. 고된 작업이 끝났을 때 시간은 어느새 정오</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가 훌쩍 넘어 있었다. 문득 공복감이 밀려왔지만 이 상황에서 도저히 뭘 넘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혹</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시 그 사이에 경주라도 찾아온다면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용역센터 직원이 알려준 인부 한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명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지금 705호로 올라오세요, 최대한 조용하게요. 아셨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들의 입장에서는 횡재한 날일 것이다. 기껏 잡담이나 나누면서 반나절을 때웠으니 말이다. 혹시나 싶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현관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경주의 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지만 금세라도 벌컥 문이 열리고 경주가 튀</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어 나올 것만 같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오 분쯤 지나자 인부 셋이 라텍스 장갑을 낀 채 나타났다. 형순이 재빨리 그들을 안으로 들인 다음 문을 닫</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기 있는 짐들을 차에다 옮겨 주세요, 최대한 조용하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아침도 못 먹었는데 밥 먹고 하죠, 자장면 세 그릇만 시켜 주세요. 기다린다고 배가 고프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사내 하나가 능글맞게 말하자 남은 두 명이 낄낄거리며 웃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거 다 옮기시면 자장면이 아니라 탕수육도 시켜 드릴 테니까, 우선 옮겨 주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조용하게요, 시끄럽게 하시면 탕수육은커녕 자장면도 없습니다, 아셨죠? 끝</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내신 다음에는 아까처럼 차에서 대기해주시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재차 정숙을 강조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 알겠습니다. 양도 얼마 안 되는데 끝내고 먹는 것도 괜찮겠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대머리 사내가 찬성하자 형순이 검지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정확히 십 분 후에 움직여 주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띵 동”</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초인종이 울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띵 동”</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두 번째 초인종이 울렸을 때 현관문 건너편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야, 영미 엄마야! 문 좀 열어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문이 열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엄마는 아직 안 왔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성큼성큼 들어서는 형순의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인부가 짐을 옮길 동안 시간을 버는 것. 그것</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방문의 목적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무래도 직장을 구하신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늦겠니? 지금쯤 교육 같은 거 받고 집으로 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있을 수도 있잖아. 안 그래?”</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짐짓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응?”</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 숨기다니? 숨기긴 내가 뭘 숨겨”</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안면부로 더운 피가 확 몰렸지만, 형순은 용케 말을 더듬거나 하진 않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기분이 이상해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순간 바깥 통로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주의 고개가 현관으로 돌아가자 다급해진 형순이 아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말이나 꺼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찰에 신고 해 볼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속으로 인부들을 저주하며 형순이 경주의 반응을 살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말이 조금 이상하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응? 이상하다니, 뭐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좀 전에는 분명히 집으로 오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형순의 고개가 슬쩍 바닥을 향한 뒤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다시 정</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면으로 올라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혹시 모르니까, 만약을 대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만 하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입에서 비명 같은 짐승소리가 흘러나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번에 얘기했죠, 아줌마 말에 책임지라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천천히 목을 젖히고 눈알만을 내리깔았다. 그 탓에 마스크 아래 공간을 통해서 그녀의 문드러진 입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부분이 드러났다. 아랫입술은 바싹 말린 동태처럼 쭈글쭈글 오그라들어 있었고, 윗입술은 절반만이 인중 쪽</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으로 말려 올라가 시뻘건 잇몸이 그대로 노출된 상태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겨...경주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는 자신의 어떤 포즈가 상대방에게 겁을 주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쿵 쿵”</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또다시 통로에서 소음이 들렸지만, 경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누가 이사 가나 봐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덜덜 떨리는 팔을 슬며시 뒤로 감췄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혹시 아줌마네 집은 아니겠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사전 동작도 없이 벌떡 일어섰다. 공기의 압력으로 그녀의 머리카락들이 양옆으로 휘날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확인해 봐야겠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말려야한다. 형순의 머릿속에서 세찬 경보음이 울려댔다. 본능적으로 형순도 따라 일어섰다. 경주가 현관으</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로 몸을 비틀려는 순간 형순이 경주방의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여기가 네 방이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건드리지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형순을 거칠게 밀어 버리곤 부서질 듯이 방문을 닫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악”</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부엌 쪽으로 난 벽에 형순의 등이 모질게 부딪혔다. 엄청난 힘이었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몇 초간 숨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기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경주는 그런 형순을 버려둔 채 현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철컥”</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문을 열고서 경주가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한참을 살피던 그녀가 다시 형순에게 다가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앞장서세요...아줌마 집에 한 번 가봐야겠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뭐라고? 대체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확인만 할게요, 엄마 오실 때까지 아줌마가 도망가면 안 되잖아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의 음성은 단호했다. 형순이 집을 나와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 때까지 그녀의 끈적거리는 시선이 거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리처럼 따라붙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철컥”</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문이 열리자 형순을 제치고 경주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집은 변한 것이 없었다. 가구도 그대로였고, 액</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자와 전시해 놓은 양주병도 그대로였다. 적어도 외관상 형순의 집은 경주가 보았던 며칠 전과 조금의 차이</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도 없었던 것이다. 베란다에 널려 있는 빨래까지 확인하자 그녀가 선뜻 고개를 숙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죄송해요...제가 아줌마를 잠깐 의심했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형순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려 하자 그녀의 어깨를 형순이 재빨리 붙잡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밥 먹구 가, 너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마스크가 조금 떨려왔다. 형순의 말이 무척이나 의외였던 모양이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괜찮으니까 먹어도 돼, 배 많이 고프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다 식탁으로 옮겼다. 밥까지 푸짐하게 푼 다음에 경주에게 손짓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리로 와서 먹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망설이자 형순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정말 괜찮으니까 어서 먹어, 불편하면 딴 데 가 있을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고마워요...사실 어제부터 못 먹었거든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식탁에 앉자 형순이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왔다. 경주는 형순이 완전히 베란다로 나간 것을 보고서</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야 마스크를 벗고 식사를 시작했다. 경주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언뜻 언뜻 드러나는 피부는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구토가 치밀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형순이 밑에서 대기하고 있을 인부들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안 그래도 지금 막 올라가려던 참입니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밥은 왜 안주는 겁니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토록 당부했건만 쿵쿵거리며 소리를 내던 그들을, 형순은 이빨이 덜덜거릴 정도로 죽여 버리고 싶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지금 손님이 와 있거든요, 그러니까 요 근처에 중국집으로 가서 드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리 돈으로 사 먹으라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무것도 안 했잖아, 뻔뻔한 새끼들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간신히 삼킨 뒤 입을 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나중에 드릴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이내 전화를 끊어버렸다. 형순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식사를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하고 있는 경주에게 시선을 돌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추악한 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원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경주를 속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문득 현기증이라도 난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것처럼 어지러웠다. 귀속이 웅웅거리며 시야가 깜깜해지자, 손을 더듬어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밀</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물처럼 들어온다. 그렇게 바깥바람을 쐬고 있자니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베란다가 열리고 경주가 나타났다. 마스크까지 쓴 걸 보니 식사를 끝낸 모양이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잘 먹었습니다...이만 가볼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려구? 그래...가서 좀 쉬어. 기다리면 연락 올 거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돌아간 뒤 형순은 제일 먼저 부엌으로 달려갔다. 식탁이 깨끗했다. 반찬들은 냉장고에 들어가 있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그릇과 수저도 씻어 놓은 상태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젠장”</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줄기 불쾌한 기운이 목덜미를 간질거렸다. 건조대를 뒤져 경주가 씻어 놓은 그릇을 집어 들었다. 물방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주르륵 흘러 내렸지만, 그것이 마치 냄새나는 고름처럼 느껴졌다. 그릇을 쓰레기통에 박아버리고 수저통</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을 뒤졌다. 한참을 뒤져봐도 구별이 안 가자 그것들도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긴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주변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는 상태였다. 물먹은 솜 마냥 온몸이 축 늘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졌지만,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계획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다. 경주가 돌아간 뒤 형순은 노부부에게</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서 입금된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인출한 다음 인부들과 대방동으로 향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연락으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주인에게 돈을 건네 준 뒤 열쇠를 받았다. 싣고 온 짐을 모두 옮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뒤 곧바로 인부들을 돌려보냈는데, 저녁까지 요구하는 그들에게 형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음으로써 노골</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적으로 무시해 버렸다. 오는 길에 약국도 잠깐 들른 다음, 입력해 둔 이삿짐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공동주택 이상에서는 원칙적으로 해가 저문 이후에 이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법에 명시된 것은 아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었다. 약간의 웃돈을 지불하자 어렵지 않게 예약을 할 수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집으로 온 형순이 제일 먼저 한 것은 먹다 남은 갈비를 꺼내 불판에다 올려놓는 일이었다. 불판에서 갈비</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가 익어 가는 동안 약국에서 사온 삼 일치 수면제를 잘게 부수었다. 그것이 고운 가루로 빻아지자 적당히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흠집을 내두었던 갈비살 사이로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뿌려 넣었다. 이윽고 연한 속살이 검붉은 갈비소스를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머금은 채 노릿노릿 익었고 매콤한 연기과 함께 군침 도는 냄새가 한가득 풍겨 나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띵 동”</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갈비접시를 손에 든 형순이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시각 저녁 일곱 시. 앞으로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쯤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후에는 한형사가 올 것이다. 그 전에 경주를 재워야 한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것 좀 먹어봐, 너 고기 좋아하잖아. 설마 벌써 저녁을 먹은 건 아니겠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들고 있던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자 경주가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도 기다림에 한계가 온 모양이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 그러자, 안 그래도 신고할까 생각 중 이었어. 그건 아줌마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식기 전에 어서 먹</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자”</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은색 호일 사이로 진한 갈비향이 풍기자, 경주의 마스크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소식없는 엄마가 걱정이 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면서도 생리적인 욕구는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경주의 문드러진 콧구멍이 벌렁대고 있을 것을 생각하</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자 경멸스러운 감정이 일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잘 먹을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마스크를 벗는 순간 형순이 고개를 돌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넉넉하게 구웠으니까 실컷 먹어, 아줌마는 저쪽에 앉아 있을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매끄러운 비닐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했다. 쩝쩝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주가 갈비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동안 꼼짝 않고 있으려니 쩝쩝거림과 함께 간간이 들리던 역겨운 트림소리가 잦아들었다. 식사를 끝내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나 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후아암, 오늘 좀 피곤하네. 경주야, 아줌마 잠깐 눈 좀 붙일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금세 몸 전체로 으스스한 한기가 찾아왔지만 아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후아아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또 한 번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하품을 해댔다. 식사를 끝낸 경주에게선 말이 없다. 틀림없이 자신을 쳐</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보고 있을 테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십 분이나 흘렀을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삭 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방문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열리는 소리가 났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철커덕”</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에도 형순은 한참을 누워 있었다. 현재 시각 여덟시 십분. 형순이 유령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럼 몸을 일으켰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야, 자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무 대답이 없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야, 자니? 아줌마가 잠깐 들어가도 될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음성을 조금 높였지만 역시 반응이 없다. 방문을 열자 컴컴한 어둠 속 한쪽에 시커먼 덩어리가 보였다. 경</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주는 이불도 깔지 않은 채 잠들어 있었고 형순은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 나왔다. 통로에서 내려다보자 대형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크레인 한 대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각이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곧 자동 응답기로 연결이 됐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형사입니다. 어디 가셨나 봐요? 지금 그리로 가는 중입니다. 거의 다 왔어요. 오시면 연락 주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문을 걸어 잠근 뒤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불까지 모두 끄고 나자 집 전체에 적막이 흐른다. </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몇 분 지나지 않아 한형사가 도착했다. 그는 경주의 집 초인종을 서너번 눌러 보더니 반응이 없자 이번에</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 형순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반응이 없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딘가로 전화를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걸었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짐작컨대 상준에게 전화를 거는 듯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 버리자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형순이 방범구멍에서 눈을 뗐다. 크레인이 올라오고 있는 듯 멀찍이서 진동 소리가 웅웅 울렸다. </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타이밍이 예술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사는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진행됐는데, 낮에 만난 인부들과 달리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형순의 요구를 착</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실하게 따라 주었다. 하긴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형순의 요구가 없었어도 조용히 움직였을 터였다. </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구들이 하나씩 옮겨지자 집안이 조금씩 비기 시작했다. 침대를 크레인으로 막 옮기고 난 뒤 직원 중 한 명</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형순에게 말을 걸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장롱이 커서 문으로는 못 나오네요, 아무래도 창문을 뜯고 그리로 빼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오래 걸리나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 삼십분쯤 더 걸릴 겁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럼 그렇게 하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사단이 발생했다. 직원 중 하나가 화분을 옮기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다. 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기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흙덩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조심하셔야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도 시끄러운 것을 깨닫자 입을 다물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제 끝났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집안은 형순이 예전에 이사 왔을 때처럼 완전히 비어있었다. 가구들이 모두 빠지자 공간이 훨씬 넓어졌지</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뇨, 이제 창문을 뜯어내고 장롱을 빼야 합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직원 중 하나가 창문에 손을 올리자 형순이 황급히 제지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냥 두세요. 장롱은 안 옮기셔두 돼요. 그럼 진짜로 끝난거 맞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무래도 불안했다. 화분 소리에 경주가 잠에서 깰 것 같은 기분이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 주소예요. 이리로 가시면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메모지를 건네자 직원들이 철수했다. 길게 뻗어 있던 철제 크레인도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 가버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형순 혼자 남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위이이잉”</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꺼두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자 밀린 메시지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부재중 36통?”</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형사에게서 걸려온 두 통을 제외하고는 모두 상준의 전화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철컥”</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바로 그 순간이었다. 열려 있던 현관문 사이로 이질적인 소음 하나가 흘러 들어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맙소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안방으로 도망친 형순이 장롱 문을 엶과 동시에 밖에서 누군가가 거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로 들어왔다. 형순이 장롱 속에 숨은 뒤 문을 닫고 나자 비명소리가 터졌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아악, 뭐야 이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르렁거리는 쇳소리. 바로 경주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어디 간 거야...설마 도망간 건 아니겠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미친 듯이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래고래 악을 써 가면서 중간 중간 알아듣지 못 할 말들을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중얼거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따르르르릉”</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컴컴한 장롱 속에서 떨고 있던 형순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전화가 울린 것이다. 경주의 소리도 일순 멈췄</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따르르르릉”</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참을 울리던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자 자동 응답기로 연결이 됐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직도 안 오셨나 보군요. 아까 신명희씨 집에 갈 때 잠깐 들렀었는데 안 계시더라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형사의 전화였다. 한형사는 혼자 말하는 것이 어색한지 조금 뜸을 들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직접 말씀드려야 하는데 바쁘신 것 같으니까 여기다 말할게요, 조금 전에 신명희씨 부검 결과가 나왔습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흉부관통상이 아니라 뇌좌상으로 판명됐어요. 아마 가슴 쪽은 죽고 난 다음에 찌른 모양입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슨 말이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억눌린 듯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누구시죠? 영미 어머니신가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다시 말해보세요...신명희씨가 어떻게 됐다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죄송하지만 전화 받는 분은 누굽니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신명희가 우리엄마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수화기에서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따님이시군요...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어머니께서는 이틀 전에 사망하셨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마침내 경주가 알아버렸다. 자신이 무사히 빠져 나간 후에 알았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이곳에 숨</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어 있고 경주는 진실을 알아버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바로 알려 드렸어야 하는데, 계속 집에 안 계셔서 그러지 못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영미 어머니께도 말</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씀 드려 놨는데...이것 참 면목이 없군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으흐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더니 별안간 우지끈 거리며 뭔가가 부서졌다. 한형사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리지 않는 걸로 봐서 경주가 전화기를 집어 던진 모양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우리 엄마가...정말 죽었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녀가 울부짖었다. 탁한 쇳소리만 낼 수 있는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어린 아이의 음성으로 울고 있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리 엄마 죽이구...도망 가려고 했어요? 나 재우고 그 사이에 도망 가려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흐느끼는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형순이 재빨리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보세요,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전화도 안 받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상준의 음성이 커다랗게 울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한형사한테서 전화 왔었어, 집에 갔었는데 아무도 없다 길래 얼마나 놀란 줄 알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쿵 쿵”</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별안간 거실에서 육중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보세요? 당신 듣고 있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찰에 신고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모기만한 소리를 내뱉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라고? 잘 안들려 좀 크게 말해 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신.고.하.라.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쿵쿵거리는 소리가 이내 안방으로 이어졌다. 가느다란 틈 사이로 포대자루 같은 것을 끌고 들어오는 경주</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의 모습이 보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신고하라고? 이제 와서 무슨 신고를 해? 사실 고민해 봤는데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못했다고 하면 내 생각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안 그래도 지금 영미랑 그쪽으로 가는 중이야”</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안 돼, 오면 안 돼... 왜 또 혼자서 결정하고 그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쿠웅”</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장롱 바로 앞으로 육중한 뭔가가 떨어졌다. 포대자루에서 나온 그것은 공 모양의 마스크 비슷했는데, 상당</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히 무거운 듯 바닥에 닿을 때마다 집안 전체가 시끄럽게 울렸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쨍그랑!”</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이번에는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부수기 시작했다. 안방을 시작으로 집안 곳곳에서 전구알 터지는 소</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리가 들려왔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오.지.마 그.냥.신.고.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슨 일 있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모퉁이만 돌면 주차장 입구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전등을 모두 깨트린 듯 잠시 정적이 흘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히히, 아줌마...집에 있는 거 알아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별안간 그녀가 개구쟁이 아이처럼 웃었다. 발걸음 소리가 안방 쪽으로 다가오자 형순이 눈을 질끈 감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장롱 앞에서 발걸음이 뚝 끊겼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왜냐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신발이 있었거든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장롱의 문이 흉폭하게 열렸다. 마스크를 벗어버린 경주의 모습에 형순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악”</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둔탁한 뭔가가 머리를 내리쳤고, 형순의 몸이 축 늘어졌다. 경주가 형순을 바닥으로 끌어내리자 손에 쥐여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있던 핸드폰이 떨어졌다. 그녀가 형순의 핸드폰을 주워든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아! 무슨 일이야? 괜찮아? 이제 다 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저씨...”</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보세요? 누구야, 경주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방금 제가 죽였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킥킥 웃으면서 형순을 질질 끌었다. 거실까지 끌고 나오자 형순에게서 그녀의 손이 떨어졌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지금 비몽사몽간이었다.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고속의 회전목마라도 탄 듯 세상 전체가 빙글빙</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글 돌았다. 흐려져 가는 시선 속으로 어둠속에 숨어 있는 경주가 보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곧 상준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 들어왔다.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형순에게는 마치 영화속의 슬로우 모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처럼 느껴졌다. 상준이 뭔가를 밟고 넘어졌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듯이 입을 쩍쩍 벌려댔지만, 아무 소리</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도 들리지 않았다. 넘어진 상준의 너머로 영미가 나타났다. 시커먼 뭔가가 영미를 덮쳤지만 형순은 이미 의</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식을 잃은 후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4. 종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머리가 빠개질 것 같이 아프다. 얼마나 아픈지 두개골부터 뇌까지 바늘 수십 개가 박혀 있는 것 같다. 낑낑</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거리며 참고 있으려니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 누굴까. 뒤를 돌아봤지만 밝은 햇살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뭔가를 내민다. 도화지 한 장.</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영미구나. 사랑스러운 내 딸 영미. 끔찍했던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영미를 덥석 안고서 얼굴을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들여다본다. 썩어 가는 얼굴. 누런색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얼굴이 사악하게 웃고 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주변의 광경이 비춰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자 저만치서 상준이 모로 누워있다. 상준의 다리 주위는 뭔가를 엎지른 것처럼 액체가 흥건했는데, 자세히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살피자 그것이 시뻘건 색임을 깨달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천천히 돌아본다. 얼굴은 흘러내린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흡사 울고 있는 것</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처럼 보였다. 상준이 고통을 호소하며 양손을 다리 쪽으로 가져갔다. 흥건한 액체 한 가운데 그의 다리가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놓여 있었는데, 한쪽 발목에 시커먼 뭔가가 매달려 있었다. </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둥그런 박 모양의 철제기구. 흡사 중세시대 여인들의 정조대를 연상케 하는 물건이 상준의 발목 깊숙이 채</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워져 있었다. 극도로 고통스러운 듯이 차마 만지지는 못하고 그 주위로 손만 가져가는 상준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정신이 드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누군가 또 있었다.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모서리 쪽에서 포대자루를 깔고 앉아 있는 경주의 모습</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상준의 발목에 매달린 것은 경주가 앉아 있는 저 두툼한 포대자루에</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서 나온 것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남편이 많이 힘들어 해요...저대로 두면 출혈과다로 죽을 수도 있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라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다시 상준을 쳐다봤다. 바닥에 가득한 시뻘건 액체. 그것은 상준의 발목에서 흘러 나온 피였던 것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멧돼지 잡는 덫이예요...모르긴 몰라도 절반쯤은 절단 됐을 거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미친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가 먼저 우리 엄마 죽였잖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옆에 세워져 있던 막대기 비슷한 것을 주워 들고는 형순쪽을 향해 치켜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웠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죽여버리고 싶어 미치겠어요...아줌마 젖통에다 대고 한 발씩 쏴주고 싶어 죽겠다구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자세히 보자 자신을 향한 것은 막대기가 아닌 기다란 엽총임을 알 수 있었다. </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 그랬었군. 형순은 비로소 그것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내가 죽인 게 아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니요, 아줌마가 죽였어요...아줌마가 안 꼬셨으면 우리 엄마는 안 죽었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은 주위가 밝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완전히 드러난 경주의 추악한 얼굴을, 그것도 밝은 장소에서는 더</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더욱 보고 싶지 않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영미는? 영미는 어디 있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거실에다 묶어 놨어요...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않으셔도 돼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자신의 다리는 굵은 밧줄에 묶여 있는 상태였고, 이곳은 영미의 방인 듯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싶었다. 가구를 모두 빼내자 못 알아 봤던 것이다. 엎드려 있는 자신의 얼굴 왼편으로는 플라스틱 대야가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하나 놓여 있었는데, 가득 채워진 물 안으로 길쭉한 뭔가가 두 개 들어가 있었다. 자신의 짐작이 맞다면 저</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것은 젓가락일 것이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제 말 좀 들어 보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젓가락에 대한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경주가 형순에게 말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가 기절해 있는 한 시간 동안 생각해 봤는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잠깐만, 우선 아저씨를 풀어줘. 그 다음에 얘기하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가만히 있어 봐요...아직 말하는 중이잖아요...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영미는 아무 잘못도 없더라구요...</font></div> <div><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 그래서 영미는 살려줄까도 생각했어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뭐라구? 그럼 우리는 죽이겠다는 말이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희멀건 눈동자를 위로 까뒤집었다. 짐작컨대 어이없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 같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럼 살려구 했어요...? 아줌마랑 아줌마 남편은 백 프로 죽일 거예요...내 말은 영미를 어떻게 하냐는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건데...”</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우리가 자...잘못했어, 너한테 시...실수한 거 같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고통을 참아가며 용서를 구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 경주야,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니요, 아줌마 말은 거짓이예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저한테 약 탔잖아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일순 할말을 잃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나 재우고 이사 가려고 고기에 약 탔잖아요...저는 그것도 모르고 넙죽 받아 먹었네요...솔직히 말하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아줌마가 조금 좋아지려구도 했었어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무...무슨 말이야? 여...여보 지금 경주가 무슨 말 하는 거야? 약이라니? 대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의 말에 형순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치심과 더불어 경주에 대한 적개심이 맹렬히 솟구쳐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올랐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하지만 실수하셨어요...저한테는 내성이 있거든요...옛날에 너무 아파서 못 잘 때마다 수면제를 먹었었</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어요...하도 많이 먹어서 나중에는 효과도 없었지만 말예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대꾸에 경주가 재빨리 말을 쏟아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두 분이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어준다면 영미를 살려줄게요...옆에 있는 대야 보이시죠? 그 안에 있는 젓</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가락을 저기 있는 구멍에 끼워 주세요...”</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총으로 가리킨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분홍색 꽃무늬 벽지와 콘센트 하나가 보일 뿐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설마...’</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맞아요...그 콘센트 구멍에 젓가락을 꽂으면 영미를 살려 줄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말도 안 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미친 소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과 상준의 입에서 동시에 악소리가 터졌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뭐 안 하셔도 상관은 없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만...만약 안 하겠다면? 아...안 하겠다면 어떻게 할 거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의 물음에 경주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그럼 총으로 셋 다 죽일 거예요...물론 훨씬 덜 아프겠지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친년! 더러운 년! 쓰레기 같은 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저씨부터 선택하세요...어느 쪽이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의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주가 상준에게 묻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자...잠깐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 대신 초점 잃은 눈이 멍하니 젓가락만 향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상준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리가 죽겠어, 영미는 살려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보!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안해, 이것밖에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다리는 아까부터 감각이 없고...아마 여기서 나간다고 해도 예전</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처럼 거...걸어 다닐 수는 없을 거야”</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같이 결정해야지! 왜 자꾸 당신 혼자 결정해? 왜!"</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말없이 자신의 대야 속에서 젓가락을 꺼내 들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저씨 제가 셋을 셀게요... 못 꽂으시면 바로 머리가 날아 갈 겁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젓가락을 쥔 상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던 그의 손이 콘센트 바로 앞까지 이동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자 경주가 셋을 세기 시작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하나...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너무도 끔찍한 광경에 형순이 결국 고개를 돌려 버렸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셋!”</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아아악”</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따닥 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형순은 결코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하악...하악..학”</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상했다. 형순의 귀로 상준의 숨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여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상준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와들와들 떨어대고 있었다. 젓가락 한쪽은 콘센트에 깊숙이 꽂혔지만, 다른 한쪽</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실패했네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타앙!”</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방아쇠가 움직이자 천둥 같은 총성이 터졌다. 상준은 뒤통수가 완전히 으깨진 채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 그의 주변 벽지로 핏방울들이 세차게 흩뿌려졌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마...맙소사...”</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 남편은 한쪽만 꽂았어요...두 군데를 동시에 꽂아야 전기가 통하는데 말이죠...”</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악마 같은 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제 아줌마가 선택할 차례입니다...시간이 없으니까 얼른 선택해 주세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에 형순이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가 성공하시면 영미는 살려드립니다...자 이제 셀게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말이 달라졌다. 아까 전에는 둘 다 젓가락을 꽂아야 영미를 살려 주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자신만 성</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공하면 살려주겠단다. 형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경주의 눈을향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노란색 눈알. 허옇게 치켜뜨던 눈알이 비쩍 마른 동태새끼 마냥 노랗게 변해 있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그</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것을 보며 형순은 확신이 생겼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쳤다. 저 년은 확실히 미쳤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것이 분명했다.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형순의 시</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선이 다시 대야를 향했다. 물속으로 굴절되어 있는 젓가락들이 보이자,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이 </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감전 당해 죽더라도 경주가 영미를 살려 준다는 확신이 없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하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음산한 소리가 들렸지만, 생각을 멈추진 않았다. 젓가락을 꺼내기 위해 대야 속으로 손을 담갔다. 차가운 </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물이 닿자 불현듯 의문이 생겼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이 물은 뭐지? 단순히 전기가 잘 통하게 하려는 것인가?’</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둘...”</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젓가락을 콘센트 구멍 쪽으로 가져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잠깐만!”</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별안간 형순이 소리를 질렀다. 순간적으로 아이디어 하나가 스쳐갔던 것이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아줌마...허튼 수작 부리면 영미는 죽어요...”</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미안해, 너무 긴장해서 그랬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이 다시 젓가락을 갖다 대면서 계획을 정리했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비록 자신은 죽겠지만 영미는 무</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사할 것이다. 형순의 시선에 찰랑거리는 대야가 크게 새겨졌다. 대야에 담긴 물은 영미를 구하라는 신의 계</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시요, 천사가 준 선물이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앗! 저기!”</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문 쪽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형순이 대야를 뒤집었다. 물은 빠른 속도로 흘러갔</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고, 경주가 다시 형순을 돌아봤을 땐 포대까지 닿아 있는 상태였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죽어버려! 추악한 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경주의 치맛자락과 발바닥까지 물에 닿는 것을 보고 힘껏 젓가락을 밀어 넣었다. </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형순을 중심으로 찰나의 시간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경주의 노란 눈알이 웃고 있다고 느낀 것은 착각일까. </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손가락 끝에서 뭔가가 따끔거리기 시작했을 때 형순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었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팔을 지나 어깨까지 올라 왔을 때는 제법 커다란 통증으로 변해 있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우워어어어..”</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머릿속에서 빛이 번쩍했다. 뇌의 껍질이 강제로 벗겨지고 그 속으로 무수한 파편들이 쑤시고 들어왔다. 극</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도의 고통과 함께 폭발할 것 같은 압력이 안구로 가득 쏠렸다. 펄펄 끓는 쇳물이 피 대신 전신을 돌고, 팔</span><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다리가 미친 듯이 오그라들었다. 구운 오징어처럼 연골과 뼈까지 부수어 가며 한없이 안쪽으로 말려들었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금이 쩍쩍 가기 시작한 형순의 눈에 경주의 모습이 보였다. 벌러덩 자빠진 채 그녀도 자신처럼 바싹 오그라</font><span style="font-size:small;line-height:1.5;">들고 있었다. 경주의 얼굴이 다시 웃고 있다고 느꼈을 때 형순은 마침내 깨달았다.</span></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물은 천사가 아니라 경주의 선물인 것을...</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포대자루가 크게 요동을 쳤다. 잔뜩 들썩거리던 포대의 한쪽 끝에서 뭔가가 불쑥 삐져나왔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br></div> <div><br></div> <div><font size="2">경련으로 무섭게 떨려대는 그것은 영미의 머리통이었다.</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 <div><font size="2"><br></font></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