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ED height=300 width=400 src=http://pds24.egloos.com/pds/201206/23/71/06_My_Machine.swf wmode="transparent"> <P><BR><BR><BR>지영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BR>그녀는 "나 원래 잘 안 울어요."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BR><BR>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느냐며 반문했다.<BR><BR>그녀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사이에는 차가운 열쇠 쪼가리와<BR>사람 냄새 어수룩하게 느껴지는 작은 방구석, 몇 장의 포스트잇 메모지가 전부였다.<BR><BR>"우리는 무슨 사이인 거에요?"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BR>그녀의 무거운 침묵은 어떤 명확한 대답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다.<BR><BR>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BR><BR>"거실에 아직 유리조각들 있으니까 맨발로 나오지 마세요."<BR><BR>쓰레기통의 비닐봉지가 유리조각의 무게를 못 이긴다며 주욱 하고 늘어졌다.<BR>하는 수 없이 쓰레기통을 통째로 들고 집 앞 분리수거장에 나가야 했다.<BR><BR>유리조각들을 버리고 방에 다시 올라오니 지영씨가 거실에서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BR>청소기의 시끄러운 소음이 이 어색한 분위기를 중화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BR><BR>청소기 주둥아리로 자잘한 유리파편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빨려들었다.<BR>지영씨가 꼼꼼하게 이곳저곳에 흡입구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이 내 시선을<BR>피해 이리저리 절묘하게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다.<BR><BR>웃기지만, 청소기를 끄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BR>청소기의 소리가 멈추고 들릴 "싱~"하는 침묵이 두려웠다.<BR><BR>이렇게 가까이서 그녀를 여유롭게 바라본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BR><BR>'오랫동안 뒤에서, 옆에서 몰래몰래 지켜보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겠지' 라고 생각했었다.<BR>내가 훔쳐보던 그 여인은 지금 내 거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BR>그녀가 내 방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 무엇보다 더욱 놀라운 일이지만,</P> <P>아무 사이도 아닌 우리는 한 지붕 밑에서 이렇게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데도 그것을 참아내는 것에</P> <P>무색하지 않다는 것에도 작은 놀라움이 일었다.<BR><BR>애써 시선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 오랜만에 그녀의 푸석한 머릿결을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BR><BR>청소기를 아무리 돌려도 더이상 달그락거리며 유리조각이 딸려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BR>그녀도 청소기를 멈췄을 때가 두려웠을까, 없는 조각을 찾는 척 한참을 더 밍기적 거렸다.<BR><BR>청소기를 끄지 않을 구실은 찾는 듯한 지영씨가 애처롭게 보였다.<BR><BR>"이제 그만 돌려도 되지 않을까요?"<BR><BR>내가 묻자, 지영씨는 말없이 청소기의 전원을 내렸다. 청소기의 소음이<BR>사라지자 예상한 것보다도 더 무거운 침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BR><BR>"식사, 는..."<BR><BR>지영씨가 말끝을 흐렸다.<BR><BR>"아직 이요."<BR><BR>지영씨가 말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을 냉장고를<BR>들여다보려는 그녀의 행동에 급작스레 웃음이 터졌다.<BR><BR>"거기 있는 거 지영씨가 다 집어던졌잖아요?"<BR>"제 이름, 아시네요?"<BR><BR>당연했다. 하지만 느닷없는 질문에 가슴 한켠이 뜨끔했다. <BR>스토커가 변명거리를 찾을 이유도 여유도 없음에도 나는 그렇게 당황을 느꼈다.<BR><BR>"어떻게 알았어요?"<BR><BR>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녀 한쪽 손에 쥐어있는<BR>냉장고 문에서 은은한 한기가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 흩날리기 시작했다.<BR><BR>"지영씨 졸업앨범 봤어요."<BR>"저도 성민씨 졸업앨범 봤어요."<BR><BR>그녀는 냉장고의 문을 슬며시 닫으며 내 정면을 향해 돌아섰다.<BR>굳은 표정의 그녀는 나의 눈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쳐다보는 것도 아닌<BR>목 언저리의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둔체 입을 열었다.<BR><BR>"제 이름 말고 또 뭐 알고 있으세요?"<BR><BR>내가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름, 나이, 집, 얼마 전까지 일하던 편의점 정도 밖에는 없었다.<BR>대답할 것도 얼마 없으면서도 대답을 하고 나면 벌을 받아야 할 것처럼 겁이 나고 두려웠다.<BR><BR>"또, 뭐 알고 있으시냐니까요?"<BR>"이름, 나이, 집. 그게 다에요."<BR>"스토커가 알고 있는게 그게 다에요?"<BR><BR>그녀를 똑바로 마주 볼 염치가 없어져 고개를 떨군체 끄덕였다.<BR>자백, 자백이었다. 뻔히 알고 있는 그녀에게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다.<BR><BR>"왜 그것밖에 몰라요?"<BR>"그 이상 알아서 뭐하게요?"<BR><BR>내가 되묻자 지영씨가 쏜살같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BR><BR>"그럼 제 방에 오셔서 뭐 하셨어요?"<BR>"지영씨가 읽어보라던 책 읽고, 드라마 보고, 그게 다에요."<BR>"선인장 화분은 왜 가져다 놨어요?"<BR>"방이 쓸쓸해서요."<BR><BR>어째서인가 그녀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져 갔다.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BR>날이 서 있는 것 같은 눈빛에 주눅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BR><BR>"저 어떻게 할 생각인거에요?"<BR>"모르겠어요."<BR>"당신 바보야?"<BR><BR>지영씨가 화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좋았다.<BR>자신의 방을 찾아오라는 그녀가 의외였지만 기뻤던 것은 사실이었다.<BR>다만 그 이상 다가서서 그녀에게 무언가 바래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BR><BR>다만 그뿐이었다.<BR><BR>"뭘 더 어떻게 해요? 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 다면서요."<BR>"그건 제 이야기죠. 당신은 스토커잖아요."<BR>"스토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BR><BR>그녀가 말이 없었다. 입술을 앙다문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나는 방으로 발을 옮겼다.<BR>잠시 잠깐의 침묵이 괴롭게 느껴진 나는 그녀에게 돌아서서 물었다.<BR><BR>"밥, 먹을래요?"<BR><BR>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BR><BR>"그럼 돌아가실래요? 저 이제 쉬고 싶은데."<BR><BR>그녀가 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BR><BR>"저 HIV 보균자에요."<BR>"예?"<BR>"예비 에이즈 환자라구요."<BR><BR>HIV 보균자. 영화에서 봤던 단편적인 지식이 떠올랐다.<BR><BR>HIV 균을 가진 사람이 에이즈에 걸리지만, 아직 진행되기 전에 약물의 치료로 발병을 억제할 수 있다.<BR>언제 병이 급작스레 진전될지는 모르지만, 현대의 의학으로는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는 병.<BR>성적행위로 전염될 확률이 있지만, 이는 현저히 낮은 편이고 혹여 전염된다면 아직 완벽한 치료약은 없다.<BR>억제만이 가능할 뿐, 세계적으로 자연 치료된 케이스가 두건 정도 발표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그저<BR>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BR><BR>"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BR>"성민씨 전염됐을지도 몰라요. 저희 집에 자주 찾아왔었잖아요."<BR>"..."<BR>"병원에 안 가봐도 되요? 저한테 전염됐으면 어떻게 할 거에요?"<BR>"지영씨한테 전염될만한 짓 한 적 없잖아요."<BR><BR>지영씨의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BR><BR>"저희 부모님도 제가 무서워서 따로 살자시는데 성민씨는 안 무서워요?"<BR>"뭐가 무서운데요?"<BR>"그럼 저랑 키스하자면 할 수 있어요?"<BR>"..."<BR>"같이 자자면 잘 수 있어요?"<BR>"..."<BR>"같이 살자면 살 수 있어요?"<BR><BR>그녀가 흐느껴 울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또 꾸역꾸역 구겨 삼키듯 한 소리와<BR>함께 울기 시작했다. '다가서지 않을게요. 하지만 저를 찾아오세요.' 나 같은 스토커 따위에게 친절하게<BR>구는 것이 이상스러웠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방처럼 쓸쓸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집이 눈에 밟히는 것처럼 선명히<BR>떠올랐다. 작고, 좁고, 어두웠던 작은 방.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게 하려 했던 방. <BR><BR>숨을 참는 것처럼 소리 없이 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BR>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지영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기색을 보였다.<BR>커다만한 눈이 놀라 휘둥그레진 모습이 애처로웠다. 잘 울지도 않는 다는 여자치고는<BR>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퍽 굵직했다.<BR><BR>"이 이상 다가서지 않는다는 뜻이 이거 때문이에요?"<BR><BR>내 질문에 지영씨는 대답을 하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애매한 고갯짓을 하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BR>고개를 숙인 그녀의 몸이 얼마자 자그마한지 와락 껴안기라도 하면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다.<BR><BR>"그럼 지영씨는 저랑 키스하자면 할 수 있어요?"<BR><BR>지영씨가 눈을 번쩍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번을 꿈뻑이지도<BR>안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지영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BR><BR>"같이 자자면 잘 수 있어요?"<BR><BR>지영씨의 얼굴에 어렴풋 웃음기가 서린 것같이 보였다. 지영씨는 더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BR><BR>"같이 살자면 살 수 있어요?"<BR><BR>지영씨가 더더욱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영씨의 눈가에 웃음기가 역력했다. <BR>나도 웃음이 나와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름 심각한 고백을 했는데<BR>나는 왜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그녀는 왜 웃어주는 것일까.<BR><BR>나도 지영씨의 앞에 풀썩 주저앉아 지영씨와 눈을 맞췄다.<BR>지영씨의 큰 눈망울이 아직 다 못 흐른 눈물들과 함께 나를 응시했다.<BR><BR>"그럼 우리 같이 밥 먹어요."<BR>"..."<BR><BR>오늘 처음으로 지영씨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BR><BR><BR><BR><BR>-끝-<BR><BR></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