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했고 그러면 업이 올 것이지...오지 않는다면 업이란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없는 것입니까? 또 업이 있다고 쳐도 업으로 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선행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도 업을 믿고 그에 따른 결과 나에게 돌아온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괴로움이라면 저는 계속 업을 믿고 살길 권하지 않습니다. 나쁜 짓 하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정치적으로 사고하기를 권유하고 싶습니다.이걸위해 '씸뽀'를 가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업을 실천했더니 돌아온게 괴로움이더라...면 (그게 싫다면) 던져 버리십쇼. 나쁘게 살지만 않으면 되지 착하게 살 이유는 없습니다.노자처럼 '다 빼앗기위해 뭔가 준다'와 같은 정치력으로 살아가십시요. 왜냐하면 그대는 아직 어려보이고 인정와 애정에서 독립할 수 있을 것 같아보이긴 아닌 것같아서 그렇습니다.
저도 힘듭니다.이 세상에 살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 굉장히 몸에 나쁜 짓이고 해로운 것 같아요. 글쓴이께서 말하셨듯 개인이 쓸모가 없어져 사회가 개인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게되고...개인은 더더욱 소외되며 고통받고 있죠. 나는 착한데 일은 잘 안풀리고 착한 사람들은 불의에 고통받고 있으니 좋은 생각이 들리가 없죠. 이런 맥락에서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몸이 아프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내가 없으면 이 세상엔 가치가 없습니다.존재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라 가치라는 게 없죠.가치는 나없이는 독단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가치는 사라질 수 없습니다.단지 나에게서 잃어버렸거나 빼앗긴 것, 둘 중 하나 입니다.님은 건강하지 않고 남도 건강하지 않기에 시대적으로 세상'적'으로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말하지만...지나쳤습니다. 누군가는 가치를 잃었다는 생각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행복하게요.
가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단지 잃어버릴 뿐이지요.그러니까 되찾아오세요.또는 끊임없이 '조립'하십쇼.조립놀이처럼 재미있게.잘 살려면 극복해야 합니다.무엇이 문제인지는 정확한 언급이 없어서 본인에게 그 질문을 반송합니다만...극복하십시요.추구하고 노동하고 또는 빼앗아 오십시요.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님께서 제 글을 오해하신듯합니다.제 글은 학문의 문제이고, 자연과학은 아니지만 사회과학의 본질에 관한 물음입니다. 만약 사회과학이 맞고 틀림을 판별할 수 없고 옳다 그르다 수준에 머문다면 사회과학은 과학도 학문도 아니죠.이것을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분노'와 '감동' 각자의 통찰을 보여주었을 뿐 당위를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어떤 행위의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지요.만약 어떤 현상에 대한 견해가 교회나 절마다 다르면,그래서 동의와 공감만 얻을 뿐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사회과학은 권위를 가질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이 세상엔 많은 학파들이 있고 그들의 가치에 따라 다양한 대답들이 나오는데 그들을 전부 주관적이라고 엿먹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사회과학이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선, 제가 오해한 것 인지는 모르겠으나, 님과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사회과학, 그것은 자연과학과 다를뿐 엄연한 과학이며 학문이라고 봅니다. 그들의 통찰은 예리하며 일견타당합니다. 이쯤에서 입장을 마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사회공학은 유용하죠. 다만 그 근반을 이루는 당위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이 듭니다.중세시대의 경제철학이 근검절약,검소를 당위이라 보았다면 종교혁명이후에는 돈을 축적하고 부유하게 사는게 당위이죠. 전 당위가 논리적 도출이 아니라 문학으로 보입니다.
어찌되었든 당위는 시공간의 물리법칙과는 좀 다른듯 하네요. 그리고 우리의 '유용성'은 이 시대의 산물이지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 글은 맞고 틀림의 문제입니다. 어떤 행위에 대한 동의 받지 못한 설명이 그 힘을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엄연히 학문적 설명의 문제이고 그 설명의 권위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만약 우리가 한 인간의 행위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가질 수 없다면 인과율은 정확히 이해될 수 없으며 그것을 기반으로한 학문과 질서세계는 틀린 것 입니다. 그러나 이해 될수 있다면 그것은 확고해지겠지요.다만 어떤 행위에 대한 서로다른 이해는 다른 학문과 질서이해를 만듭니다. 이 말은 즉 객관적일 수 없는, 상대적일수 밖에 없는 세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그 본질을 논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린 이유는 바로 옳고 그름이나 좋고 싫고의 물음이 아니였습니다. 상대가 나의 '행동'에 이유가 있는 '행위'라고 규정지으면서 시작되는 균열을 논하고 싶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나는 A를 이유로 행위를 했는데 상대는 나의 행위 이유가 B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긋남에 누가 정확히 행위의 이유를 설명한 것인가요?
제가 지적하고 싶은 바로는 자유,만족,'강한'이란 뜻이 다름에도 이 글에선 맥락상 대체되어도 무방할 정도로 같은 뜻을 가진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만족은 ~초과라는 느낌'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왜냐하면 만족은 만족하면 그 자체로 끝나기 때문입니다.반면 자유는 만족을 모르죠.만약 만족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듭니다. 저는 특별히 특별한 철학을 내세울 생각은 없습니다.다만 굳이 내세우라면 '진리 그리고 질서와 자유'가 아니라 '진리 그리고 질서와 만족에 대한 추구'를 내세우겠습니다.
피터슨은 철학에 대한 이해가 빈약한 것은 사실이죠.동네아저씨와 겨루어도 무방합니다.(근데 동네아저씨들도 지혜롭고 혜안있지 않나요?) 저는 피터슨의 정치적 주장을 모두 무시하고 그의 실존적 조언에만 주목합니다.그리고 거기에는 '피터슨 현상'이 이해가 갈 정도로 실존적입니다.평범하지만 그 속에 힘이 느껴진 것이죠.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방구석에 처박혀 불만만, 가득한 사람들에게 삶을 실천적으로 살게 해줍니다.도대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혐오와 분노에 빠져 실천적인 삶을 살지 못했기에 이런 현상이 나오는지 놀랍습니다.
물론 '피터슨현상'이 실체가 없다거나 무시하실 수 있지만 적어도 피터슨에 빠진 젊은이를 이해하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무시나 비난하기 보단 접근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맞습니다.피터슨은 아이러니합니다.피터슨은 혁명이 아니라 지금 내삶에 충실하라는 의견이지만 '추종자'들은 그를 이용해 '포스트모던'에 혁명을 일으키라고 합니다.참으로 아이러니하죠.그러나 보수나 진보나 모두가 이 세상에 부조리하다고 입을 털지만 부조리하단 이유로 회의에 빠져 우리의 삶에 최선을 못다하는 것은 그자체로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저는 부조리한 것에 입을 닫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다만 우린 일상속 최선을 다하는 삶을 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