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의 덧글을 이제 봤네용.. 관찰을 통해 개념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고 논리로만 다가가선 순환에 빠지기 쉽습니다. 지각의 선천적 기전을 먼저 포착해내야만 우리가 다루는 개념의 원천, 인식에 지향된 대상이 무엇인지 볼 수 있을 겁니다. 조심해야한다는 취지로 남긴 것입니다. 현상과 더불어 발생하는 지각의 기전들이 있음에도 서양에선 19세기 말에 와서야 그것에 대해 말해볼 수 있었죠.
또 저는 무를 증명하시라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인식 없이 존재가 어찌 선행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반대로 님께선 존재를 인식에 포섭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향님께서 어떤 답을 하시던 그건 인식에 선행하는 존재가 아닐 것입니다.. 뭔가 더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네요.
단순한 추상적인 레벨의 문제입니다. 존재는 인식에 선행하며, 존재는 인식에 의해 존재성으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존재 집합에 부여된 대전제적인 존재성도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러한 인식의 존재성이 설득되려면 존재를 대상으로 다룰 때도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죠. 한마디로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존재성만을 볼 수 있다고 말을 하시면 존재란 대상은 어디서 어떻게 정립이 된 건지 순환이 생긴다는 얘기죠.
"전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존재의 전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존재는 우리가 인식한 만큼의 존재성을 드러내지요. 때로 잘못인식 되어 존재를 오해하기도 하겠지요." 이 부분에도 할 말 드리고 기향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때로 잘못 인식합니다. 그러한 문제를 비의지적인 전제 (예 : 패턴에 대한 지각의 대칭적 파악) 그리고 파지된 전제 (예 : 선입견, 프레임) 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놓치고 있는 단 하나의 현상이 더 존재합니다. 바로 원본이죠. 우리는 때묻지 않은 원본 또한 기억 가능한 만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언제든 가능하다는 것이죠. 보통 스스로의 가치관, 판단의 전제 등이 바뀌어서 시도하게 됩니다. 이리 되면 존재성은 불변한 것도 아니고 존재에 완전히 귀속되는 개념도 아니게 됩니다. 범주(프레임)에 따른 파악에 변화하는 것으로 봐야합니다. 그러면 "존재"라는 대상을 두고서 존재성의 범주도 변화할 테죠. 존재 그 자체는 전지전능한 범주를 가지고 있다고 존재성으로 파악한 것이고, 인간이 파악하지 못한다고 볼 것이 아닌, 스스로의 존재성의 대전제에 의해 전지전능한 범주인 개념밖의 대상을 파괴하지 못했다고 봐야겠죠. 순환적인 논증 아닐까요?
편하실 때 답변 주시면 됩니다. 댓글의 이 부분 만큼은 지적하고 싶네요. "어떤 모임에서 어떤 사람은 존재성이 없기도 하다." 보통 존재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죠. 이성적으로만 정의할 것이 아니라 옆에 누군가 있는 듯한 느낌이요. 이러한 감각적 성질도 존재성이란 개념에 포함하시나요? 우리는 상상을 통해서 아주 잠시나마 방금 먹었던 음식의 맛을 떠올릴 수 있고, 좋아하는 향을 떠올릴 수 있으며, 강한 기억 중에는 그때 나 자신의 생생한 느낌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저는 방금 오렌지를 먹었습니다. 기향님도 오렌지의 맛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감각도 존재성이라 볼 수 있나요?
물질세계는 추상적 기호 세계로 변환 가능하다 하나 그런 방법론이 정신세계 또한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오류는 정신세계의 고유한 인과적 현상들을 은폐시켜 볼 수 없게 만듭니다. 정신현상은 우리가 빈번히, 자연스럽게 밟는 사고 흐름을 반대로 소급해내야만 관찰 가능하기 때문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기향님은 존재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시는데 그 존재성이란 성질은 인간 사고의 고유한 지각입니까? 제가 볼 땐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자연스러운 범주적 사고가 아닙니다. 개념화되고 해석된 것이죠. 이 개념이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고 이해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냐는 말입니다. 본래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우리는 평소 존재와 존재성을 구분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나요? 존재의 집합에 그런 개념이 함축되어 있는 거겠죠. 존재가 인식에 선행한다는 말 또한 미흡한 결과입니다. 인식이 동반되지 않은 무와 같은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답 하는 사이 댓글이 또 달렸네요. 의식을 아우르는 항상성을 가진 주체는 이렇게 있죠.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착시현상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한 번 포착했을 땐 그림이 움직였는데 우리는 이 그림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애를 쓰니 한 번은 정지합니다. 관찰을 통한 분할된 지식은 움직이거나 정지하거나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적으로 두가지 일이 일어났음를 압니다. 아우르는 주관은 존재하죠.
낙타님의 세계관은 애매모호 하지만 어느 면에선 저와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해요. 님의 주관적인 표현으로 써진 관찰을 정확하게 이해하기엔 제가 너무 피로하군요.. 그런데 님께서는 주체의 그러한 기능적인 면들이 객관화되고 자연화되어 주체란 실체가 신에게 헌납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네요.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시면 신체는 물론이거니와 의지까지 부정되어 버리는 느낌이라서요. 결국 나의 의지를 통해 일어나는 일들인데, 주체를 가정했다고 반박할 순 없어 보입니다.
저는 객관이란 그저 수식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어떤 지식이 경험적으로 반복가능하고, 그 해석이 알맞은 동형성을 갖고, 상호적인 동의가 있을 때 그 지식을 객관이라 부를 수 있다고 보고 일체의 사고행위는 주체에게 있는 것이지, 이 과정과 저 과정이 분열되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러면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 불러낼 수 있는 사고과정은 뭡니까? 님말대로 주체를 중심으로 정리가 가능한데요. 왜 주관과 객관으로 나눕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