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점에는 매물이 나가면 나갔지 들어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근데 말이죠, 얼마전에 레코드를 팔러 온 손님이 있었대요. 아니, 더 정확히는 레코드를 떠넘기고 갔다는게 맞을거 같아요. 어느 늦은 오후에 찾아와서 일단 레코드들을 맡아달라 하고서 가버렸다는데 주인 아저씨도 그 사람이 모자를 푹 눌러쓴 상황이라 얼굴을 못 봤대요. 레코드 커버는 누런 때가 껴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였고 대문짝만하게 빨간색으로 사의 메들리라고 적혀있었어요. 아저씨가 한번 들어나보자고 재생을 해봤는데...글쎄요, 핀도 계속 튀고 알수 없는 말들만 나와서 그냥 듣다 말았어요.
워낙 이상한 주민들로 가득한 조악리 이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 몇몇 있는데요. 이분은 원래 서커스단 소속 악단에서 기타를 치던 분이셨는데 서커스단이 망하면서 정처없이 떠돌다 조악리에 들어오셨대요. 떠도는 동안 아내랑 아이들은 도망갔다나. 쨌든 마을에 도착한 이후 한달 내내 환청이랑 귀신이 보인다는 소리를 하고 다니다 결국 미쳐버렸는지 녹슨 기타줄이 걸린 통기타를 들고 다니면서 제목도 모를 이상한 노래를 치고 다니시는 분이세요. 근데 영...제정신은 아니신게 기타를 치시다 점심 무렵이 되면 바닥에 앉아 식사를 하시거든요. 그리고 이빨을 깨끗하게 해야된다면서 자기는 치실을 쓴다고 (누가 듣는지도 모를)말을 하다 꺼내는게...아무리 봐도 기타줄이거든요. 그러고보니 기타줄이 걸려있어야 될 곳에는 치실로 보이는게 걸려 있고...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나이 들면 몸도 안 좋아지고 깜빡거리는게 일상이 된다고들 하지만 이분은 신기할 정도로 깜박거리는게 유독 심각하신 편이에요. 체력같은 부분은 조악리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좋지만 유독 뭔가를 깜박하는 일이 잦은 편이시죠. 주변에선 갱도 무너질때 남편 잃고, 산사태때 시부모를 잃고, 홍수때 아들을 잃어서 충격으로 그런다고 하는데 정작 장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하세요. 오히려 자신의 기억력은 아주 멀쩡하다고 말씀하시죠. ...글쎄요, 오늘 아침에 쥐를 잡는다고 쥐약을 놓았는데 위치가 기억안나신다고 말은 하시면서 정작 그걸 손에 쥐고 계시는걸 제가 봐버려서...
연희를 길가에서 만난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성공한 소설가가 되어 금희환향 하겠다며 서울로 온지 어언 3년, 생활비는 바닥을 보이고 공모전은 매번 낙선하기 일쑤였다. 가족들은 슬슬 돌아와 공무원 시험이라도 준비하라는 압박을 보내고 나 역시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은 찰나였다. 그래도 이번 소설은 반년간 이를 갈며 쓴 글이었는데. 낙담하며 길을 걷던 찰나에 마주친 인물이 바로 연희였다.
“오빠, 잘 지내? 나 이번에 s대 붙어서 미리 여기 지리도 한번 볼 겸 와봤어!”
잘 지낼리 없었다. 번번히 실패하는 인생인데 기쁨 따위 있을리가. 연희는 부잣집으로 시집간 큰어머니의 늦둥이 막내딸이었다. 공부도 잘했고, 얼굴도 반반한 편에 속했다. 한마디로, 나와는 정반대였다. 그래서였을까. 연희가 밥이라도 한끼 먹는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자 근처에서 비싸다는 파스타집을 고른건 순전히 오기였다. 얼굴이나 머리나 모두 다 나 보다 우월한 사촌동생에게 내가 비굴하게 살고 있다는걸 들키지 않기 위한, 비굴한 객기. 안 그래도 생활비가 바닥나고 있는 찰나여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천원이라도 더 싼 음식을 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걸 시키고 나서도 한동안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겠지만.
“...그래, 일단 축하해. 밥을 사줘야 되는데 내가 오늘 돈을 놓고와서...” “괜찮아, 이런거 얼마나 한다고.” “그래도 비싸잖아.” “그래?”
연희가 메뉴판을 다시 들춰봤다.
“에이,천원 차이구만. 괜찮아, 나 용돈 많이 받아.”
연희는, 내 사촌동생은, 아무래도 가격을 모르는 음식이라도 마음껏 시킬 만큼의 여유가 존재하는 듯 보였다. 내게는 없는 마음가짐 이었다. 다시 한번 내 처지가 되새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속이 울렁였다.
읍내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가게들 중에 다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여자는 정말 섹시한 몸매선과 외모를 가졌어요. 제가 책방에 가면 갔지 다방에 갈 일은 없지만 우연히 길 가다 마주친 그 여자는 제가 봐도 매력적이고 도시로 나갔으면 꽤나 인기 끌었을 것이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특유의 진한 화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라니까요? 여튼 그 여자 덕분인지 이 좁고 사람 적은 마을과 읍내에서도 그 다방은 성황이에요. 아, 그런데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목욕탕을 갔는데요. 처음 보는 남자가 남탕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근데 그 남자, 목 뒤에 큰 점이 있더라고요. 제가 그 여자를 봤을 때 그 여자 목 뒤에도 같은 위치에 똑같은 점이 있던데.....뭐,기분 탓이겠죠.
요건 제 얘기가 아니고 아주 예전 이야기인데, 조악리가 탄광촌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 과학 쪽으로 관심이 많던 청년 하나가 있었대요. 제가 과학에는 문외한이라 잘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석탄의 시대는 금방 사라질거고 맨틀에 있는 에너지를 사용할 날이 올거라며 미리 그 에너지를 발굴하자 했대요.근데 마을 사람들이 당연히 그 말을 믿지 않으니까 그 사람은 자신이 직접 증명해보이겠다고 갱도 안쪽에서 아래로 굴을 파면서 직접 내려갔다고 해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다음날 갱도가 무너져 버려서 다 묻혀버렸죠. 일하던 광부들도, 그 청년도.
귀신이 많이 보이는 조악리 특성 상 굳이 애완동물을 키우자면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편인데요. 제 앞집 사람은 강아지를 무려 두마리나 키우고 있었습니다. 근데 집 앞에 강아지 둘을 목줄로 매어두고 정작 본인은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았어요. 마을 어르신 말씀에 따르면 이 마을에 살아봐야 몸을 노리는 귀신들이 많아서 차라리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게 나을거라는데...믿어야 될지 말지 구분은 안가는 말이었죠. 그런데 사흘 전인가? 새벽에 강아지들이 엄청 짖어대더라고요. 누군가를 쫓아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무섭게 짖어댔는데, 곧 짖어대는건 멈췄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서 가보니 두마리 모두 다 사라졌더라고요. 그리고 어제부터 그 집에만 있던 앞집 사람이 밖에 나오기 시작했는데...어째, 상태가 영 그래요.
도보 20분을 걷고 버스로 40분을 더 가야되는 읍내는 대부분의 가게들이 비어있지만 드물게 몇몇 가게들이 열려있습니다.그중 하나가 바로 책방인데, 바로 옆에 레코드점이 붙어있는 특이한 구조에요. 신간은 거의 없고 중고서점에 가까운 모양새지만 의외로 쓸만한 책들과 음반들이 많아요. 잘 찾아보면 절판된 것들도 구할 수 있답니다. 그런데 가끔씩 궁금해지는건, 이 많은 책들과 레코드들을 어디서 구해왔는지의 여부인데요. 들리는 말에는 주인 아저씨의 친한 수집가 친구가 강도에 의해 살해당하고 가족이 없던 친구분의 책과 레코드들을 아저씨가 가져와서 팔고 있다는...소문이 있습니다.본인 앞에서 말하면 쫓아낼 수도 있으니 쉬쉬하는 이야기지만요.
이 마을에 홍수가 밀어닥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에 왠 남자 하나가 찾아왔었어요. 저야 어릴 때라 그 남자 얼굴은 기억도 안 나지만 한가지 떠오르는 건 어찌나 구두약을 바르고 광을 냈는지 신발코가 반짝였다는 거에요. 쨌든 이 남자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새하늘님의 구원이 있으면 죽은 사람도 돌아올 것이고 이 마을도 금세 복구될 거라는 거에요. 근데 그 말에 흔들릴지언정 넘어가는 사람은 없었어요. 이미 그 당시에도 음기가 철철 넘쳐서 죽은 사람들은 많이 오갔으니까요. 하도 사람들이 안 믿으니까 그 남자 하는 말이, 자기가 홍수가 난 곳(아직 물이 안 빠져서 급류가 심했던 곳)에 가서 직접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을 보여주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요? 신발 벗고 온갖 쇼를 하다 미끄러져서 그대로 휩쓸려갔는데요? 그 반짝거리던 신발코를 가진 신발은 동네 아줌마가 물이 빠지고 나서 읍내에 가서 팔았대요.
워낙 첩첩산중에 있는 마을이라 첨단 문물이 들어올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낯선 사람들 몇몇이 왔다갔다 거리더니 컴퓨터 한대가 연결됐더라고요. 컴퓨터의 주인은 곧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여자애였는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니 촌티난다는 소리 안 듣게 미리 다 경험해보게 하려고 부모가 설치해준 모양이에요. 타지에 있어서 그런지 처음 들어보는 고등학교 이름이지만 좋은 곳이라니 그냥 그렇게 생각하려고요. 그런데 요새 그 여자애의 부모님이 세상이 무너진 거 같은 표정을 짓고 다니세요. 그 여자애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겠다고 했다는데...경로는 모르겠지만 인터넷으로 뭔가를 보더니 인생이 너무 허망하다며 멀리 떠날거라 했대요. 근시일 내에 컴퓨터를 버린다는 말이 있어서 조금 아쉽기는 해요. 한번만 써보게 해달라고 할 참이었는데....
조악리는 워낙 귀신을 봤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굳이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은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을 키우는 편이에요. 이분은 저희 옆집 아저씨 입니다.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흰 털의 고양이를 안고 날마다 산보를 다니시는데 반쯤 풀린 눈과 당장 넘어질거 같은 걸음거리로 잘 걸어다니시는 분입니다. 신기한 점은 저 고양이가 자기 발로 걸어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겁니다.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다 고양이가 아저씨에게 안기면 안겼지 땅바닥에 내려오는 꼴을 못 봤다고 하더라고요. 이웃에 살지만 따로 말을 걸어 본 적은 없는데 딱 한번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고양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다가와 물으시길,
세상에 채식주의자랑 고기알러지 있는 사람 제외 고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냐만 이 분은 유독 고기사랑이 대단한 분입니다. 마을에서 읍내까지의 거리가 꽤 걸리는 편임에도 읍내 정육점에서 (사실상 매일)고기를 받아와 먹는것이 이분의 하루 일과죠.먹는 방법도 구워 먹고, 삶아 먹고, 국에 넣어 먹고...덕분에 공복 상태로 이분 집 앞을 지나가는 것 만큼 고역인 것도 없답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이었나, 몇년 전의 홍수 만큼은 아니어도 꽤 비가 많이 왔던 적이 있었어요. 당연히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막혔고 꼼짝없이 사람들은 비가 그칠 때까지 마을 안에 갇혔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고기를 구할 상황도 안되고 저는 당연히 며칠간 고기 냄새를 못 맡을거라 생각했건만...비때문에 연기가 안 나서 그렇지 고기 냄새가 여전히 풀풀 나더라고요. 비냄새와 흙냄새를 뚫을 정도로 진하고 처음 맡는 냄새였어요.다행히 비는 사흘 뒤 그쳤고 그 이후 고기 냄새가 안나서 조금 의아해했는데...얼마뒤에 다시 돌아와서 고기를 구우시더라고요. 두 다리가 없어진 채로.
이건 제 얘기는 아니고 마을에서 몇 안되는 젊은 사람인 제 삼촌 이야기에요. 그당시 삼촌 친구 중에는 조금만 무서운 일이 있으면 바로 도망가버려서 별명이 찌질이 인 사람이 있었대요. 삼촌은 물론 마을 주민들까지 그 사람 이름은 몰라도 별명은 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고 해요.근데 그 사람이 화가 난 건지 친구들을 다 모아두고 당시 무너진 갱도가 있던 숲을 혼자 갔다 오겠다 선언했대요.지금은 숲 옆에 길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지금같은 길이 없었다는데 그나마 있는 길이 복잡하고 음기가 강해서 낮에 어른들도 여럿이 모여다녔다고 해요. 쨌든 만약 포기하면 나는 찌질이다!! 하고 외치겠다며 그 사람은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그 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더니...네, 마을의 반을 쓸어간 홍수가 내렸대요. 그날 이후 그 친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숲은 숲 옆에 길이 생기면서 들어가는 사람이 없어졌대요. ...사실 삼촌한테 말을 안 했는데, 읍내에 가려고 조금 늦은 저녁 무렵에 숲 옆의 길을 걷다보면 나는 찌질이다! 하는 메아리가 울려퍼져요. 그게 제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몇십년에 걸쳐 산전수전 다 겪고 다른 마을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한 조악리지만(사실 애초부터 교통편이 안 좋은 편이지만)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마을을 자주 찾아오는 옆 마을 사람이 한명 있습니다. 바로 돌팔이 라 불리는 약초상 할아버지 죠. 약초상이면 약초상이지 왜 돌팔이냐면 그 할아버지, 영험한 약초라고 쥐어준 풀이 단 한번도 좋은 효과를 낸 적이 없거든요. 일례로 그 할아버지는 하도 마을 사람들이 약초를 안 사가자 자기가 직접 효능을 보이겠다며 왠 잡초처럼 생긴 풀을 한가득 먹었던 적이 있어요.효과 있었냐고요? 그 할아버지,입에 거품 물고 쓰러져서 일주일간 앓아눕다 새벽에 도망치듯 가버렸어요.그래도 계속 우리 마을에 찾아오는 걸 보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아마 우리 마을이 가장 장사가 잘되는 곳인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