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오유 바로가기
http://m.todayhumor.co.kr
분류 게시판
베스트
  • 베스트오브베스트
  • 베스트
  • 오늘의베스트
  • 유머
  • 유머자료
  • 유머글
  • 이야기
  • 자유
  • 고민
  • 연애
  • 결혼생활
  • 좋은글
  • 자랑
  • 공포
  • 멘붕
  • 사이다
  • 군대
  • 밀리터리
  • 미스터리
  • 술한잔
  • 오늘있잖아요
  • 투표인증
  • 새해
  • 이슈
  • 시사
  • 시사아카이브
  • 사회면
  • 사건사고
  • 생활
  • 패션
  • 패션착샷
  • 아동패션착샷
  • 뷰티
  • 인테리어
  • DIY
  • 요리
  • 커피&차
  • 육아
  • 법률
  • 동물
  • 지식
  • 취업정보
  • 식물
  • 다이어트
  • 의료
  • 영어
  • 맛집
  • 추천사이트
  • 해외직구
  • 취미
  • 사진
  • 사진강좌
  • 카메라
  • 만화
  • 애니메이션
  • 포니
  • 자전거
  • 자동차
  • 여행
  • 바이크
  • 민물낚시
  • 바다낚시
  • 장난감
  • 그림판
  • 학술
  • 경제
  • 역사
  • 예술
  • 과학
  • 철학
  • 심리학
  • 방송연예
  • 연예
  • 음악
  • 음악찾기
  • 악기
  • 음향기기
  • 영화
  • 다큐멘터리
  • 국내드라마
  • 해외드라마
  • 예능
  • 팟케스트
  • 방송프로그램
  • 무한도전
  • 더지니어스
  • 개그콘서트
  • 런닝맨
  • 나가수
  • 디지털
  • 컴퓨터
  • 프로그래머
  • IT
  • 안티바이러스
  • 애플
  • 안드로이드
  • 스마트폰
  • 윈도우폰
  • 심비안
  • 스포츠
  • 스포츠
  • 축구
  • 야구
  • 농구
  • 바둑
  • 야구팀
  • 삼성
  • 두산
  • NC
  • 넥센
  • 한화
  • SK
  • 기아
  • 롯데
  • LG
  • KT
  • 메이저리그
  • 일본프로야구리그
  • 게임1
  • 플래시게임
  • 게임토론방
  • 엑스박스
  • 플레이스테이션
  • 닌텐도
  • 모바일게임
  • 게임2
  • 던전앤파이터
  • 마비노기
  • 마비노기영웅전
  • 하스스톤
  • 히어로즈오브더스톰
  • gta5
  • 디아블로
  • 디아블로2
  • 피파온라인2
  • 피파온라인3
  • 워크래프트
  • 월드오브워크래프트
  • 밀리언아서
  • 월드오브탱크
  • 블레이드앤소울
  • 검은사막
  • 스타크래프트
  • 스타크래프트2
  • 베틀필드3
  • 마인크래프트
  • 데이즈
  • 문명
  • 서든어택
  • 테라
  • 아이온
  • 심시티5
  • 프리스타일풋볼
  • 스페셜포스
  • 사이퍼즈
  • 도타2
  • 메이플스토리1
  • 메이플스토리2
  • 오버워치
  • 오버워치그룹모집
  • 포켓몬고
  • 파이널판타지14
  • 배틀그라운드
  • 기타
  • 종교
  • 단어장
  • 자료창고
  • 운영
  • 공지사항
  • 오유운영
  • 게시판신청
  • 보류
  • 임시게시판
  • 메르스
  • 세월호
  • 원전사고
  • 2016리오올림픽
  • 2018평창올림픽
  • 코로나19
  • 2020도쿄올림픽
  • 게시판찾기
  • 오유인페이지
    개인차단 상태
    문명탐구자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가입 : 17-07-23
    방문 : 71회
    닉네임변경 이력
    회원차단
    회원차단해제
     

    문명탐구자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87 [나는 왜 무종교인이 되었나?]1.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전도 [새창] 2017-07-28 20:31:05 1 삭제
    선생님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종교게시판에 들어오는 방법 오늘 처음 알았답니다. 좋은 인연 기대합니다.
    86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7-07-28 18:31:51 2 삭제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전도

    나의 기성 종교에 대한 회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본격화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에 대한 의문과 회의는 내가 모든 것을 의심하는 습관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전도사인 동시 자기 신앙에 만족하고 확신하는 삶을 사는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셨다. 그녀는 매우 유쾌하고 화통하며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삶에 대한 고뇌와 의문으로 잔병치레에 시달리던 나에겐 그녀의 삶을 향한 담대함과 적극적인 태도는 아주 바람직하게 여겨졌다. 이런 이유로 나는 그녀를 내 삶의 모델로 삼게 되었다. 나는 요즘 말로 자폐끼가 있었고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 고통받고 있었기에, 그녀의 활달함, 적극성이 부러웠고 또, 몹시 탐이 났다. 당시 내가 나를 어떻게 가두고 있었는지에 관한 몇몇 사건이 지금도 별 노력 없이도 떠오른다.

    음악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선생님과 목청껏 노래 부르며 저마다의 끼와 재능을 왕성하게 발휘하는 동안에도 나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며 그저 입만 벙긋거리는 시늉만 내곤 했다. 나의 이런 실체를 남이 알까 두려워했고 그러면서도 진심으로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아이답게 마냥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함께 어울리고 싶어했다. 당시의 나는 나를 그대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고 그저 위인전 등을 집에서 혼자서 읽는 것에 재미를 삼고 있었다. 내가 간절히 바라던 그 무엇을 그녀가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나를 묘한 흥분과 설렘으로 이끌었고, 곧 나는 그녀에게 흠뻑 빠지게 되었다.

    지금의 기준에서는 위헌 소지가 있는 일을 그녀는 당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곤 했다. 그녀는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에게 교회에 다닐 것을 당당히 요구했고,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지난주 교회에 출석하지 않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는 출석하지 않은 이유를 묻곤 했다. 그녀에 대한 내 호감, 호기심, 열망, 호의 등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그녀의 이런 행동은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고 낯설기는 했어도 속으로도 조금도 반감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녀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는 과정에서 나는 내 세계에서 차츰 벗어나 아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깨닫게 되었고 또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노래와 음악, 어울림은 나를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로 탈바꿈시켰고 나는 긍정적 체험을 통해 더욱더 그녀를 본받는 일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고아원, 양로원 등 봉사를 통해 나란 존재 자체가 세상의 그 누군가에게는 가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고, 작고 사소한 선의와 실천조차 의미 있고 쓰임 있을 수 있음에 눈 뜨게 되었다.

    그녀에게 감화 받은 까닭에 다니게 된 교회의 담임 선생님께서는 어머니나 학교 선생님 보다 훨씬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대학생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눈에 번쩍 띄는 미인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온화한 가운데 따스했고, 자신이 맡은 아이들에게 매우 친절했으므로 그녀는 아이들에 무척 인기가 있었다. 아기 오리떼가 어미 오리를 뒤따르 듯 많은 아이들이 그녀 곁에서 신나게 떠들어대며 그녀의 관심을 저마다 받고자 아우성 대곤 했다. 나는 여전히 내 실체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과 예의 바름이라는 가면으로 감추는데 익숙했기에 그녀에게 살갑게 다가서지 못했고, 마음으로는 그녀의 애정, 관심, 손길, 어루만짐 등을 욕망하면서도 겉으로는 이를 티 내지 않고자 했다. 그녀를 둘러싼 아이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질투와 경쟁을 조용한 관찰자인 나는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교회에 오래 다닌 까닭에 그녀와 친한 몇몇 아이들이 그녀를 독차지하고자 나와 같은 신규 진입자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곤 했고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와의 일정한 거리 안으로는 다가가지 않자 그제야 몇몇 아이들이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는 선생님과 아이들과는 보이지 않는 거리를 둔 채 좋아하는 노래 부르기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한데 몹시도 어려운 난제가 곧 내게 닥쳤다. 그것은 다름 아닌 헌금 문제였다. 당시 나는 어머니께 하루에 오십 원을 용돈으로 받고 있었다. 이때 오락실 게임 요금이 딱 오십 원이었다. 갤러그, 벽돌 깨기 등 오락에 심취해 있던 나는 용돈을 모조리 게임하는 데 쓰고 있었기에, 교회 헌금 시간만 되면 헌금 내는 시늉만 하고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이런 처치 곤란한 상황이 매 주일마다 반복되니 교회 다니는 일에 점차 흥미 자체를 잃게 되었다.

    이때 나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교회 선생님이셨다. 그녀는 아이들을 예배시간 전에 따로 불러내어 아이 한 명당 이백원을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그녀 덕분에 금전 문제에서 해방된 나는 처음 몇 주 동안은 기쁨과 행복, 고마움과 감사함에 마음이 따뜻했고 또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충만했다. 매주 이백원이라는 일정한 돈이 생기자 나는 새로운 갈등에 처하게 되었다. 백 원짜리 동전 한 닢만 헌금 통에 넣고 나머지 한 닢은 떡볶이를 사 먹거나 오락을 하는데 쓰자. 아니, 아무도 모를 테니 걱정하지 말고 헌금 내는 시늉만 하고 그 이백원을 모두 나 자신을 위해 쓰자. 아니야, 그러면 착한 선생님을 실망시킬 거야. 그건 나쁜 마음이야. 이런 생각들로 내 작은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곤 했다. 이 내적 갈등이 최종적으로 하고는 싶은데, 차마 할 수는 없다.로 결론난 얼마 후 그녀는 자기 생일파티에 나를 비롯한 자신이 담당하는 아이들을 초대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선생님은 굉장한 부자일 거야. 우리들에게 매주 200원이라는 거금을 나눠주시잖아. 모르긴 해도 아마 으리으리한 큰 저택에서 살고 계실 거야. 이런 상상으로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생님은 나와 아이들을 내가 익히 잘 아는 동네로 이끌었다. 그것을 보고 뭔가 이상한데? 이 동네를 거쳐가시려는 것일까, 이 작고 가난한 동네에서 선생님이 누군가 만나서 우리와 함께 생일 파티 장소로 인솔하시려는 건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한데 놀랍게도 선생님께서 한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집으로 들어가시더니, 얘들아 다 왔어. 여기가 선생님 집이야. 모두 들어와서 신발 벗고 방으로 올라오렴. 하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예 하고 큰소리로 대답하더니 우르르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안에서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까르르 웃어대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대에 배반당한 나는 황당한 마음을 머금고 일행 중 맨 끝으로 그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비록 작고 비좁았으나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소박했으며 정갈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구조 또한 부엌과 방 한 개로 단조로웠다. 실망감으로 잔뜩 풀이 죽은 나는 주변을 대충 훑어보곤 얼른 신발을 벗고 방 안에 들어섰다. 선생님과 아이들로 이미 발 디딜 곳도 없이 꽉 찬 방은 내가 앉을 자리조차 없어 보였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나를 위해 선생님께서는 얘들아 우리 친구를 위해서 조금씩 양보하자. 고 온유한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아이들과 선생님의 협조로 겨우 내가 자리에 앉자 선생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 가셨고, 곧 작은 상을 들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상 위에는 초코파이 한 상자와 과자 몇 봉지, 음료수 한 병, 종이컵이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 방 그 어디를 둘러보고 또 살펴봐도 제법 값이 나갈 물건이라곤 단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금도 없었고 은도 없었다. 그저 값싸 보이는 비닐 옷장과 성경 등이 빼곡히 꽂혀져 있는 허름한 책꽂이, 책상, 의자가 방 안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이제야, 나는 선생님이 결코 부자가 아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선생님은 가난하시구나. 부자여서 우리들에게 매주 200원이라는 거금을 주신 게 아니구나. 이때 아이들과 선생님이 초코파이에 생일용 초를 꽂고 초에 불을 붙였다. 아이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거의 동시에 부르기 시작했고, 선생님께서는 그런 아이들 훈훈하게 바라보셨다.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려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훅 하고 촛불을 껐다. 조용한 관찰자로 이 광경을 쳐다보던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에게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아이들에게로 잔잔하게 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 막히게 따사로우며 온화한 그것으로 선생님도 아이들도 나도 우리 모두가 충만해 있었다. 남자니 여자니, 선생이니 학생이니 부유하고 가난한 것 등을 초월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하나가 되어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세상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대신 그녀는 맑은 가난을 누리며 자기 신념을 삶 가운데서 잔잔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게 일종의 경이요 새로운 그 무엇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종교인의 현존의 힘을 느꼈다.

    그래서 과연 나는 기독교인이 되었을까?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는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는지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나는 이 생일 파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사건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스스로의 길을 찾는 탐구자요, 구도자가 되었다. 진리에 관한 내 입장은 불가지론 내지 불가지론적 다원주의쯤 될 거다. 그녀들의 나를 향한 전도는 과연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성공한 것인가?

    협소한 의미에서의 전도를 기준한다면 내가 교회를 떠났으니 그녀들의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은 광의의 의미에서라면 나는 적어도 교회란 틀, 성경이라는 틀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광야를 걸어왔다. 길 없는 길을 내가 걸어갈 수 있게끔 실천자만이 드러낼 수 있는 현존의 힘으로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그 무엇을 깨닫게 한 어느 무명의 종교인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녀와 그녀의 실천을 종종 떠올린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종교인들이 전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가 진리로 믿어 의심치 않는 것도 다른 이에겐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소중한 것으로 절대화하는 그 어떤 존재나 대상도 다른 이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내 삶의 전부요 의지처요 지팡이요 생명과도 같은 그 무엇도 다른 이에게는 단 한 푼의 가치도 없을 수 있다. 진리는 결코 조직화될 수 없고 그러해서도 안 된다. 진리는 특정 교단이나 조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요 그러해서도 안 된다. 그 어떤 책도 진리 그 자체를 온전히 품을 수는 없는 까닭에 책 자체를 진리와 동일시하거나 절대화하는 동시 모순이 생겨버린다. 진리는 실제로 이런 속성을 지녔다.

    전도는 삶의 본이 되는 것으로 행하고, 어쩔 수 없이 전도해야 하거든 먼저 자신이 한 점의 미혹 없이 그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 부디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런 준비나 점검 과정도 없이 불량품일지도 모르는 그것으로 사람들을 잘 전도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을 벼랑 끝이나 구렁텅이로 안내하는 것으로 결코 기뻐할 일이 아니요 그러해서도 안 된다. 전도하려는 제품 자체에 하자는 없는지 부디 진실하게 꼼꼼하게 따져보라. 먼저 자신이 직접 온갖 것들을 겪어 본 후 실천 가능한 것만 전하라. 이렇게 기본이 닦이고 준비가 된 이후에도 권유는 가능해도 권유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전적으로 상대의 몫임을 명심하라.

    가난한 전도는 남의 이름을 파는 것이요, 부유한 전도는 자기가 살아온 삶 자체를 파는 것이다.
    85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7-07-28 18:28:46 0 삭제
    선생님,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종교 게시판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84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7-07-28 18:21:27 1 삭제
    나 또한 종교게시판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83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7-07-27 20:43:47 0 삭제
    무아: 나라고 할 게 딱히 없다. 신의 존재 유무에 상관 없는 인류 자력 구원의 최종 진화 형태(현재까지는).
    세세생생 유전하는 아트만 부정. 윤회 부정.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 부정의 사상적 기초 제공.

    범아: 나 아닌게 딱히 없다, 일원론적 범신론의 최종 진화 형태(현재까지는),
    세세생생 유전하는 아트만 인정. 윤회 인정.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 유지의 사상적 기초 제공.

    <무아>와 <범아>는 인도에 이슬람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도 내에서 상호 간의 치열한 논쟁, 경쟁 속에서 확고히 자리매김한 사상적 기초이니까요. 허나, 이슬람의 침입시 불교가 저항을 포기하자, 힌두교가 불교 자리를 대신해 이슬람에 저항했고 결국 이 과정에서 인도는 이슬람과 힌두교로 양분되었습니다. 비폭력, 무저항을 선택한 불교는 인도에서 그 자리를 이슬람, 힌두교에 내주고 티베트 등 동아시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불교 최대의 미스테리라고 칭해지는 불교가 인도에서 사실상 멸망한 까닭입니다. 이 정도 틀에서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79 아래, [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새창] 2017-07-27 19:47:18 0 삭제
    만일, 그 누군가가 가상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혹은 그녀는 사는 동안 품었던 그 무엇 혹은 그 무엇들이 하나로 꿰뚫어지는 체험과 동시 새로운 지평을 스스로 열기에 충분하고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인류 사회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깨달음 혹은 발견이라 부릅니다. 자연세계에서는 가능성의 형태로 이미 존재해왔으나 다만 인류가 아직 진입하지 못한 세계로 그 혹은 그녀가 진입하고, 그 혹은 그녀에 의해 인류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 인류 차원의 발견 혹은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나는 이것을 가리켜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던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로 편입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만, 나는 여전히 대체 왜 인류에게 이런 비밀의 관문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내 무지와 자연에 대한 경이를 통해 그 어떤 전율을 느낄 뿐입니다.
    77 아래, [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새창] 2017-07-27 15:58:38 0 삭제
    가상 현실 세계의 현실에서의 발현(무의식의 발현)은 뛰어난 게임 개발자나 프로그래머, 디자이너, 감독 등이 총동원 되어 그 개체 인간을 <가상 현실>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뛰어난 몰입도, 흥미 유발, 그 끝이 없는 거대하고도 거대한 세계관, 실제 보다 더 현실 같은 환경, 나와 동일시 되는 캐릭터의 존재 등등... 이 가상 현실 발현의 주체가 유전자 단위인지, 아니면 뇌 차원인지, 물질 차원인지, 생리적 작용인 것인지, 비밀 스런 정신작용인 것인지 아니면 열거된 이 모든 것들이 복합 작용하는 것인지 인류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우주, 자연, 문명 등이 그 개체와 만나 빚어내는 그 무엇들 일체가 그 개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생명 자체에 인류가 아직은 모르는 그 어떤 비밀스러운 작동 원리가 숨어 있는 것인지 조차 나는 감히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 논의가 끝나고 선생님과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선생님의 사유과정과 결론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또 시간이나 기회 등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뇌사 판정을 받은 사람이 오직 특정 게임 속 캐릭터로만 현존하는 경우>의 문제, <게임 속 캐릭터를 생명체로 볼 수 있는가?> 등도 논의하고 싶습니다.
    76 동일률은 절대의 법칙인가요? 아닌가요? [새창] 2017-07-27 15:52:07 0 삭제
    선생님, 열린 마음과 자세를 보여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철게에서 논의하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차근차근 풀어놓고 선생님들의 고견도 청하고 내 의견도 개진하는 <자유 토론, 대화 논쟁의 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75 동일률은 절대의 법칙인가요? 아닌가요? [새창] 2017-07-27 15:49:12 0 삭제
    어떤 기준에서는 선생님 말씀도 맞습니다. 헌데 현실에서는 보통 권위니 권위의식, 사회적 타이틀이니 하는 것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룰과 격식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73 아래, [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새창] 2017-07-27 15:40:45 0 삭제
    <존 내시가 겪은 가상 현실의 경우>

    선생님께, 위 질문들이 선생님께 확 와닿으려면 상상력과 연기력이 좀 필요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존 내시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보신 적 있으신가요? 선생님께서 존 내시라는 입장이라면 어땠을까요? 선생님께서 만약 존 내시를 관찰하고 검증하는 입장이라면 어땠을까요? 선생님께서 존 내시를 정말 아끼는 가족이나 친구라면 어땠을까요? 선생님께서 존 내시가 <리만 가설>등 인류의 난제를 풀어주기를 학수고대하는 어떤 선견 지명 있는 당대의 석학이라면 어땠을까요? 이렇게 다양한 기준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접근하시면 이해가 편하실 겁니다.

    영화에서는 존 내시는 자신이 사는 현실이 가상 현실(정신 장애, 정신 분열, 무의식이 발현 된 세계 등등으로 불릴 수 있는 바로 그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는데만 수십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 당대 지성인 존 내시가 그 사실을 인지하는데만 수십년이 걸렸다.는 사실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즉 현실의 자신은 늙었는데 그들은 전혀 늙지 않음을 보고서야 겨우 그들이 가공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면(벗어난 것도 아니고 벗어날 실마리를 얻는 데 수십년이 걸린 셈이지요.) 존 내시와 같은 이들은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요? 이 주제는 아주 아주 흥미롭답니다. 인간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인식론, 존재론, 능력, 선택과 책임, 삶과 죽음 등등의 영역)들이 총체적으로 복잡계를 이루는 분야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만큼 해법 또한 복잡할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체 퍼즐조각(충분한 조건) 중 단순히 극히 일부를 아는 것과 그 현실에서 실제로 그 작디 작은 앎을 활용해 전체 퍼즐 전체를 맞춰나가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발생합니다. 존 내시처럼 똑똑한 인물 조차도 그 세계에서는 적어도 수십년 세월을 보낸 후에야 겨우 겨우 벗어날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정말 실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나는 이것 부터 의문이 듭니다. 정말 보이는 것을 실재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요? 이것에는 어떤 근거가 있는 것인지요? 가상 현실 세계(물론 그 당사자에게는 현실 그 자체로 느껴지고 받아들여집니다. 다만 편의상 이렇게 이름 부르는 것입니다.)에서는 인간이 상상하는 그 모든 것이 실제로 가능합니다. 실제 사례와 현실에서는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조차 끝 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합니다. 자기 자신 조차 철저히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합니다. 이 점이 이해가 되십니까? 숨 쉬는 것도 끝 없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한걸음 내딛는 것도 삶과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문 하나 여는 것에도 생사가 오갑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진정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춘 자만이 아주 실낱같은 단서를 포착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이것이 탈출지점이 아니고 그저 본격적인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우주 전체 지구 전체가 전쟁터가 되어버린 세계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의 전장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어디에 지뢰가 묻혀 있는지, 어디에 적군 스나이퍼가 은닉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가족이 나에게 독을 먹일지 나는 감히 단정할 수 없습니다. 맞다, 틀리다.나는 감히 단정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나 연인 조차 섣불리 믿을 수 없습니다. 내 욕구와 감각, 생각, 느낌, 무의식 조차도 섣불리 믿을 수 없고 또, 그리해서도 아니 됩니다. 이것이 가상 현실 세계의 어려움입니다. 게다가 인체는 사실이든 가상 현실이든 간에 그것을 실제로 보고 듣고 느끼게 생겨 먹었기에 그 공포, 두려움, 불안, 생명의 위협은 고스란히 그 개체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의 생각, 하나의 선택이 그 개체의 생명을 얼마든지 앗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상 현실 세계의 공포와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보이는 그대로를 믿자니 나는 내 손에 수 없이 피를 묻히는 끔찍한 살인자가 될 수 밖에는 없고, 저항하지 않자니 과도한 공포와 불안, 의혹 등이 내 목숨을 앗아가기에 충분한 스트레스를 불러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존 내시가 멍청하고 바보여서 수십년간 가상 현실 세계에 갖혀 있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상상 그 이상의 거대한 공포, 두려움, 불안, 생명의 위협, 의혹과 의심 등이 실제로 존재하기에 그 무엇하나 섣불리 시도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나는 봅니다.. 즉 이 거대한 공포, 불안, 생명의 위협, 의혹, 혼돈이 전제되지 않은 논의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이 그 개체가 최고도로 끔찍한 공포와 불안, 두려움, 의혹을 불러일으키게끔 스스로 설정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판도라의 상자를 열 때의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 공포, 불안 또한 더해집니다.

    <그 무엇하나 안심하고 선택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끔찍한 상황>이야 말로 가상 현실 세계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고 난제를 다시 살펴보시면 전혀 새로운 시야로 바라보게 되실 겁니다. 불교에서 대체 왜 부처를 일컬어 자기를 이겨낸 위대한 승리자. 라고 하는지도 진심으로 공감하게 되실 겁니다. 나는 불교신자가 아닙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는 자요, 그저 진리와 깨달음의 길을 실제로 걸어온 자입니다. 헌데 그러한 자의 기준에서도 <아! 이런 의미에서 부처가 실제로 존재했고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았으며 마왕 파순 이야기와 같은 가상 현실을 실제로 겪고도 이를 극복했다면, 바로 이 기준에서는 능히 <자기를 이겨낸 위대한 승리자. >라고도 볼 수 있겠구나. 라는 공감에 이르게 합니다. 인류의 절대 다수는 존 내시의 경우에 처하거나 부처의 경우에 처하면 거의 거의 평생 동안 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결론을 가상 현실 세계에서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조차도 끝 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신의 음성이라고 다 믿을 수 있을까요? 적어도 특정 신앙인에게 이것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절대 명령이 될 수 밖에는 없을 겁니다. 그때 그 신 조차 의심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내 기준에서 위 난제에서 언급하는 <가상 현실 세계>는 인간이 상상하는 일체가 가능한 그러한 세계입니다. 기존의 상식? 법칙? 원리? 이 모든 것을 모두 내려 놓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그러한 곳입니다. 그리고 선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목숨도 잃을 수 있고, 선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평생 정신 병원에서 보내야만 하는 결과에도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곳입니다. 바로 이 기준에서 <존 내시의 경우>를 선생님의 입장에 대입해 보시면 좀 더 구체적인 논의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10개]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단축키 운영진에게 바란다(삭제요청/제안) 운영게 게시판신청 자료창고 보류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정책 모바일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