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양서류는 조류나 포유에비해 매우 하등하고 단순할것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은근 똑똑합니다. 야생의 개구리도 사람을 알아보고, 집이라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부모님댁 옆에 텃밭이 있는데 양수기옆 파이프로 기둥을 세워둔곳이 있거든요. 그안에는 항상 물이 고여있는데 그곳에 살고있는 청개구리가 있어요.
정말 특이한게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면 누군지 확인하고 저희 어머니면 도망가지않고 편안하게 쉬는반면, 낯선사람이 들여다보면 경계하고 깊게 들어갑니다. ㅋㅋㅋ 근데 동시에 들여다보니 안심을 하는듯한 모습으로 다시 경계를 풀어요. 엄청 똑똑해서 놀랬습니다. 얘 언제부터 이런거야? 하니 2년째래요. 작년이맘때 겨울이 시작되니 사라졌길래 동면하러 갔구나 했는데 봄이되서 파이프속 물이 녹으니 다시 찾아와 쉬고있다고 ㅋㅋㅋ 지금은 또다시 겨울잠자러갔을거에요. 내년봄에 다시 볼수있길 바랍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1946년 10월1일 대구 10월항쟁입니다. 미군정에서 이승만과 합작으로 친일인사 및 경찰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전격 기용하면서 부폐와 강제수탈이 연이어 이어지고, 콜레라까지 창궐하자 굶주린 대구시민들의 시위가 시작되고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으로 총파업이 연이어 발생하며 부산경남으로 확산되기 시작. 대구경북에서만 인구의 1/4가 참여하는등 사실상 행동할수있을 인원들은 모두 참여하였다고 봐야할 정도로 규모가 컸습니다. 미군정은 계엄을 선포하고 군력을 투입하며 시민들에게 실탄발포 및 대구지역을 완전히 봉쇄하여 고립시켰지요. 완전한 고립이 되자 친일경찰을 주축으로 서북청년단들을 앞세워 좌익색출 토벌작전이라는 명분하에 조금이라도 시위에 개입했던 이력이 있으면 사족들까지 모두 재판없이 처형하며 완전한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시위를 주도하였던 지역사회의 지도층들, 의식있는 지식인들, 참상의 대상자들과 기록하였던 문서, 목격자들, 대부분이 좌익분자 간첩이라는 명분하에 폄하되어 완벽히 지워져버렸고, 전래된 토막증언들까지 좌익색출에 따른 불가피한 사건으로 명분이 포장되어 이념대립의 희생자들로만 기록되어 반백년이상 쉬쉬하며 덮어두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구가 보수우익의 상징이 된 이유가 이부분에 있습니다." 너 빨갱이지?" 이 한마디에 가족이 전멸하였던 참극을 직접 목도하였던 대구경북의 시민으로써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극우의 논리에 조금도 엇나가는순간 나와 소중한가족들 모두가 죽는다는 공포가 뼛속깊게 각인되어 아직까지 대대손손 전해져오고있는것이 현실입니다. 제주 4.3사건만큼 비극적인 사건이었으나 정작 피해지역인 대구에선 아직도 그날의 공포때문인지 언급하는것에 매우 소극적인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대구10월항쟁 이후 34년뒤에 한반도의 서남쪽에서 유사한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5.18 광주민주화운동이지요. 국민적저항에 대처할 능력이 없던 신군부세력들은 대구10월항쟁을 그대로 밴치마킹하기시작합니다. 모든 도로와 통신망들을 단절시켜 완벽히 고립시킨후, 군부대를 투입하고 북괴의 소행으로 이념대립으로 등치시켜 제2의 10월항쟁을 재연하려했지만, 그들은 실패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의 작전이 성공하여 깨어있는 지식인들과 정치적지도자들이 멸족되었다면 광주 역시 제2의 대구가 되어, 지금의 대한민국은 장기독재국가의 하나로 남아 평생을 부폐와 기아, 전쟁의 위협속에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도고헤이하치로의 인터뷰일화는 잘못알려진 속설입니다. 그 어떤 자료에도 등장하지않으며, 구전으로만 돌던것이 사실인냥 살이붙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구전으로 돌던 이유는 조선의 식민지화 과정 중에 조선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이순신임을 알게되고, 반일을 누그러뜨리려는 목적으로 "도고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찬양한다." 라는 일화를 만들어 뿌렸던것이 지금까지 내려오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