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지 못하는 사람의 아픈 마음이 치유를 받아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고 슬퍼하던 것에서 벗어나,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웃들에게도 자신이 받았던 용기와 희망을 베풀고 전하며 산다면, 다리를 고침받아 뛰어다니는 것 만큼이나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의 참 목적은 다리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닌 영혼을 낫게하는 그런 것이겠죠.
하나님께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을 믿지 않으셔도 어떤 분인지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교회에 안다니셔도 한번도 기도해보지 않으셨어도 괜찮습니다. 모든 마음의 짐을 그냥 그분께 진솔하게 고백하고 도움을 청해 보세요. 투정도 괜찮고, 넋두리도 괜찮습니다. 사람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다른 위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사정과 마음의 생각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을 열고 나아와 도와달라고 하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도 작성자님을 위해 기도해드릴게요.
글로배웠어요 / 사람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도록 창조된 존재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뱀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죠. 삶의 모든 영역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과 심판에 대한 영역은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집니다.그렇기에 구원의 영역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 둘중 하나에 지배받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모든 자유는 사실 자유가 아닌,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 바로 죄의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정한 자유는 아무거나 혹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그 진리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과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곧 하나님의 사랑에 묶일때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곰팡이거인님 / 답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제기하신 의문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도 많지만, 한가지 아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또 나를 위하여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한가지 사랑을 아는 것이 다른 모든 것을 아는 것보다도 큰 앎이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부모의 생각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다만 부모의 사랑을 알기에 모든 것을 의지하며 그 뜻대로 따르는 것이겠지요.
fishCutlet님 / 해주신 말씀중엔 저같이 믿는 사람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하는 부분도 있고, 오해하고 계시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사는 경우는 두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않고,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못한 도덕성으로 민폐를 끼치는 경우일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모두가 무조건 반성하고 회개하고 고쳐나가야 할 부분입니다. 제가 뭐도 아니지만, 받아주신다면 대표하여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전하는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받는 미움일 것입니다. 그 말씀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겠고 필요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저였기에 잘 이해됩니다. 저도 처음엔 제게 말씀을 전해주신 분을 많이도 미워했고, 귀찮아했고, 끊어버리려고 무시하기도 골탕먹이기도 했었죠. 쓰신 것처럼 바울은 복음을 전하려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참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나님의 말씀이 누군가에게 환영받으면서 전해지는 경우는 잘 없는듯 합니다. 거의 항상 미움을 받고, 거부당하기 일쑤죠. 예수님이 죽으신 후 초기 복음은 대부분 사도들이 자신들을 죽이려던 자들에게 쫓겨다니면서 그 전파와 확산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이처럼 세상을 어둠을 사랑하며 악하다고 하는 말씀을 누가 환영하겠습니까. 누가 자신의 죄가 드러나게 하는 말씀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저도 그러지 않았으니 말입니다.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여러 미움을 감수하고 여러 사람에게 고난당하기를 자처한 것이지, 여러 사람에게 잘보이려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제게 말씀을 전하신 분의 희생이 없었다면, 아무도 고난받기 싫어서 입다물고 있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희생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쏟아 부어주신 사랑에 빚진 심정 때문인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 달콤한 말이 사람을 얻기에 잠깐은 더효율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말만 하다가 도리어 경멸과 조롱을 받는 지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을 얻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사람의 눈엔 당장 하나씩 멀어지는 것 같아 보여도, 마음에 심긴 한마디의 말씀은 씨가 뿌려져 싹을 내듯이 결국엔 돌아오게 되리라 믿습니다.
예준이아빠님 / 믿는 분이시라면,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아신다면, 누구누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역겨워 토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묻는 자칭 고결한 자들에게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내 이웃 삼을만한 자를 찾기보다, 내가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역겹고 토나오는 죄인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이웃이 되기위해 오셔서 모든 수치와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끝까지 우리의 이웃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준이아빠님도 저를 비롯한 부족한 사람들을 너무 미워하지 마시고, 서로의 이웃이 되어주고 예수님 사랑에 참예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노병조군님 / 믿음과 실천의 관계는 오묘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다 실천하는 것도 아니요, 실천한다고 해서 꼭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우선순위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실천은 그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직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올 자가 없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분명하고, 믿는 자들은 반드시 그렇게 살고자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을 내 구원의 조건이요 공로로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태도이며, 거짓된 구원의 길로 유혹하는 위험한 죄입니다. 제가 우리는 믿음으로 화답한다고 쓰긴 했지만, 사실 그 믿음도 내가 믿는 나의 공로가 아니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게 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완성 곧, 구원은 우리의 완전함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곰팡이거인님 / 왜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또 누구는 믿게되고 누구는 그렇지 않은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모르겠습니다. 들어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선 심판받으리라 성경에 쓰여있지만, 듣지도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될지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에게 다 알도록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이를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알려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날때부터 맹인이었던 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의 일화가 있습니다. 맹인이었던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 그 사람이 왜 나만 고쳐주시느냐, 왜 저 맹인은 여전히 맹인이냐, 왜 옆마을 맹인에겐 가지도 않으시냐고 따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저 자신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고, 다른 맹인들도 고쳐달라고 간구할 뿐이겠지요. 어쩌면 예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셨듯이 그 맹인도 다른 맹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간구하도록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이는 당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죽이려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협박과 다름없는 추궁에 그 맹인이 했던 고백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맹인같이 어둡던 제 마음에 빛이 임했고 그래서 이제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그것입니다. 이 한가지도 제겐 넘치는 앎이고, 그 한가지 앎을 붙들고 그저 한분이라도 더 저처럼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전할 뿐입니다.
네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알게된 자들을 부르신답니다. 그 사랑은 재미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랍니다. 맛홀님의 삶에도 언젠간 그 놀라운 사랑을 알게되는 계기가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이 아무리 선해도 하나님의 기준에 절대로 이를 수 없다고 성경은 구약 2000여년의 기록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 말고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로다. 하나님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의 방법은 그 독생자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화답함으로써 그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함이나 공로를 내세우는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하고 믿지 않는 것이요, 구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 놀라운 사랑에 그저 빚진자의 심정으로 살아갈 뿐이지, 내가 열심히 선을 행해서 내 구원을 사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죄일 뿐인 것이죠. 악한 영은 사람에게 있는 이 공로의식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거부감이 들게 합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저 같은 쓰레기 같은 놈에게도 아낌없이 쏟아 부어주신 예수님의 피 같은 사랑에 감격해서 다만 빚진자의 심정으로 다른 한 영혼에라도 이 사랑이 전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너무 길게 써서 죄송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