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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2 18: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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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과 현재의 공소시효가 너무 짧다는 것에는 백번 동의합니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서 가해자를 신고하고 적극적으로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응원하고 돕고 제도적 장치를 세심하게 마련해야 한다는 것에도 백번 수백번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법절차 내에서 정당한 수사와 재판을 거쳐 이뤄져야 하며, 그 처벌까지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증 없이 막연한 증언만 가지고 여론재판을 벌여 여론으로 죽여버리는게 아니라, 제도하에서 수사하고 증거를 찾아 재판을 통해 법적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겁니다. 이미 수사중인 다른 성추행 연예인들, 검사들 처럼요.
오달수를 쉴드치는 것도 아니고, 그에 대한 미투운동을 한 두 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라고는 양측의 자기 주장 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합니다. 특정 사건에 대해 양측이 다른 감정, 다른 기억을 남기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떤 일이었는지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을 설명해 줄 물증이 있거나, 최소한 제 3자의 교차증언이라도 있어야 사건의 실체를 알 수 있지요. 어느 한쪽이 거짓말을 한다는게 아니라, 설령 둘 다 자기 주장과 기억을 진실로 믿고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고발자분 중 한분이 자기 얼굴과 신상을 밝혔으니 신용이 가지 않느냐는 말 역시 모순입니다. 물론 그 용기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른 누군가를 특정지어 성범죄자라는 크나큰 낙인을 찍으려면 본인 역시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당연한 일인거니까요.
이미 오래전 일이라 밝혀내기 힘들다, 공소시효 지나서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말도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법제도는 아무리 그러하다 해서 법제도를 벗어난 사적 정의구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론에 의한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하고자 한다 한들, 최소한 사실 규명에 있어서는 제도 안에서 해야 합니다. 양측이 사실관계를 두고 민사 소송을 하건 어떻게 하건 법제도 안에서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거죠. 여론이 어느 한쪽의 주장만 임의로 판단해 여론재판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저는 오달수란 개인을 쉴드치는게 아닙니다. 오달수가 실제 성범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저도 모릅니다. 혹 실제로 그게 사실일 가능성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만에하나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겨우 한명의 성범죄자를 사적 처벌하기 위해 우리 법제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에 반대합니다. 심지어 그가 성범죄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정당한 법제도 하에서의 재판조차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미투운동은 피해자들이 낸 용기를 이어받아 그것을 법제도 안에서 수사하고 재판하여 피해자를 구제하고 가해자를 심판하는 방향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법과 제도보다 먼저 앞서서, 법의 울타리 밖에서 우리끼리 판단하고 우리끼리 심판하는 것은 법질서를 무너뜨리고 여론재판의 돌팔매질이라는 야만과 광기로 되돌아가는 퇴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