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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istory_30043
    작성자 : adlkfjp263 (가입일자:2017-01-24 방문횟수:17)
    추천 : 2
    조회수 : 397
    IP : 121.100.***.81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20/09/25 15:45:10
    http://todayhumor.com/?history_30043 모바일
    책 출판하려다 맙니다.

    안녕하세요. 익명의 작가 입니다. 

    제가 글을 쓰다가 출판하려고 했는데 욕이나 들었습니다.

    그래서 책 쓰는 것을 포기하려고 하는데, 사실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인을 싫어해서 한국에 기독교가 발달해서 프리메이슨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내용입니다.

    뚱딴지 같은 소리가 아니라 심도깊은 수사를 통해서 글을 썻고요.

    실제로 프리메이슨이 들어가는 곳마다 기독교 문명이 파괴됩니다. 

    6.25전쟁과 연관 되어있고요. 

    작가는 국방부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역사관을 갖고 있고요. 

    쓸데없는 이야기 싫어합니다. 

    6.25전쟁에 참여한 분도 계십니다 욕되지 않게했으면 좋겠고요.

    사실이라고 판단되면 글이나 퍼트려 주십시요. 물론 복잡한 문제로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해주시고요.

    글 읽고 댓글이나 달아주십시요. 책 출판제의는 거절합니다.

     

     

     

     

    인사말 -

     

     

    일설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은 성경에 욕단(창세기 10:25)이 그 근원(根源)이라고 한다즉 천부(天賦)적인 신성(神聖)함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누군가의 시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프리메이슨(freemason)과 일루미나티(illuminai)가 생소한 분들도 계시겠지만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라는 조직은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가장 핵심적인 명령은 가장 위에서 전달됩니다군대에서는 장군과 참모들이 있으며기업에는 CEO와 이사회가 있고병원에는 원장과 의사들이 있습니다.

    공공연히 신세계질서를 말하고 있는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들.

    혹자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한국사람 하고도 관련이 있습니다범죄수사 기법 중 하나는 어떤 종류의 범죄인지에 따라서 수사기법이 달라지게 되며그것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습니다퍼즐을 전부 맞추어 놓고 봤을 때 그 그림은 비로소 완성이됩니다프리메이슨의 범죄장소는 전 지구적 범위이며시간도 몇백년동안 꾸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필자는 과거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 서술하며많은 서적을 참고해 글을 썼습니다본인은 이 책에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며역사적 사실 자체는 상상의 실타래를 풀어서 쓴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글을 읽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이 있다면

    에스겔이 본 환상대로 마른뼈가 다시 살아나며 마른풀에 단비가 내리듯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이며 그 다음 무엇을 해야할지도 자연스럽게 알게될거라고 생각합니다.

     

     

     

    들어가는 말

     

     

     

    프리메이슨(freemason)은 정말로 존재하는 집단일까필자가 느끼기에는 정말로 존재한다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는 단체 자체가 유럽에서 일어났으며때때로 이상한 교황이 일어나 세속군주인 황제에게 영향력을 끼칠려고 노력했으며또한 유럽 전체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며자신의 정책을 시행하려는 로마교황청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리가 없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에 있었던 18세기에도 교황의 대관식(戴冠式)을 통해 황제가 될 수 있었다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는 반()기독교 단체이며 따라서 로마교황청은 프리메이슨에게 우호적이지 못한 태도를 지속적으로 취해왔다역대 클레멘트12베네딕트14비오7레오12레오13비오9세 등의 교황은 프리메이슨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구체적으로 언급을 하기도 했다.

     

    비오9(pio IX, 1792 - 1878) : 당신이 현재 세계라고 일컫는 것은 그저 프리메이슨단의 주장에 불과하다

     

    레오13(Leo pp. XIII.1810 - 1903) : 존경하는 형제들이여우리 혈관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는 사악한 역병을 뿌리뽑는데 여러분의 힘을 합쳐주시기를 기원합니다프리메이슨의 가면을 벗기고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또한 이런 조직의 유혹에 넘어가 사악한 주장을 펴는 이들을 설교와 교서로서 교화하는 것이 여러분의 첫번째 임무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바울 2(pope John paul II.1920 - 2005) : 나의 자녀들이여나는 사탄의 비밀 결사에 가입하지 말라고 다시금 여러분에게 경고한다그것은 진짜로 사탄의 회당이다그 비밀 결사는 형제사랑박애인류 동포주의 등의 상표를 몸에 붙이고 있다그들은 달콤한 말로 여러분의 신앙을 뒤집으려 하고 있다.

     

    필자가 볼 때 로마교황청(바티칸)은 이미 손 쓸수 없는 시점에 와있으며 프리메이슨에 가입하지 말라고 당부한 교황 요한 바오로1(Johannes Paulus I,1920.10 - 1978.9)는 당시 내부적인 개혁을 꾀했으나재위 33일만에 사망하고 만다로마교황이 재임기간 중 죽는 경우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며교황이 재임기간 중 죽는 경우는 그닥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1세는 교회개혁을 통해 프리메이슨세력을 약화시킬 생각을 하고있었으며이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추측이 있다.

    또한 프리메이슨이 들어가는 곳곳마다 교회와 기독교 문명이 파괴됬다이 책은 구체적인 실제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입증하며마지막으로 6.25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1907년 평양대부흥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책을 마지막 까지 읽은 뒤에는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임산부와 노약자 그리고 심신이 미약한 자들은 이 책을 읽지 말것은 권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의 어록은 많은 책을 참고해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쓴 것입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발발 5년전, 1784년 전직 로마카톨릭 소속 예수회 사제이자 프리메이슨 내에 일루미나티를 창설한 인물인 아담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aupt. 1748 - 1830)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파리로 사신(私信)을 보내게 된다.이 편지는 로베스피에르(maximillien robespierre,1758 - 1794)에게 배달 예정이었는데거기에는 프랑스를 혁명으로 이끄는 상세한 계획이 담겨져있었다그런데 이 사신(私信)을 갖고 파리로 가던 사람이 도중에 날벼락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지(當地경찰이 수습을 하던중몸에서 편지를 발견조사에 착수하자 곧 이것이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내부에서 고발됬다는 설도 있다). 이에 경악한 바바리안(bavarian)당국은 아담 바이스하우프트를 국외로 추방하고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를 불법단체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해당 지역내에 있는 모든 프리메이슨의 집회장소를 문닫게 했다더 나아가 바바리안(bavarian)당국은 유럽의 각 정부에게 경고문을 보내며 이러한 자들의 음모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였다.

     

     

     

    일어나는 혁명의 물결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모든 것은 하나님의 통제아래 있으며악한 사람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악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며하나님은 사람의 의지를 초월하시지 않으시며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험도 허락하시지 아니하신다.

    이 장에서는 1789년 프랑스 혁명과 1848년 프랑스혁명으로 나누어 기술하며중간에 나폴레옹에 관한 서술도 있다이 시기에 일어난 혁명들은 프랑스에서 부터 시작되 유럽 각국으로 퍼지는 특성을 지녔으며먹고살기 힘든 시민들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키는데 동참하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은 제3세력으로 알려진 시민 계급이었다이들은 전에 없던 국민의회를 선포했으며 국왕의 권력을 제한시켰다.

    이에 위협을 느낀 루이 16(Louis XVI.1754.8 - 1793.1)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 중심의 튈르리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791년 6월 파리에서 프랑스 동부에 근위부대로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였다그리고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 이슬로 사라졌다.

    이 국민의회에는 여러세력들이 주를 이뤘는데지롱드당자코뱅클럽산악당이 있었으며산악당에 대표적 인물로는 로베스피에르가 있었다상퀼로트(sans - culottes, 하층계급의 혁명가단체)가 지롱드당 계열에 정치 지도자들을 제거하면서 산악당이 지배하는 공안위원회가 프랑스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공포정치에 토대가되는 용의자처리법이 통과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게되었다당시에는 기근때문에 사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이런 사람들은 반혁명 분자로 몰려 혁명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야했으며 외국군대와 내통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들도 단두대에 올라가게 되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을 보게되면,혁명을 일으킨 배후세력(背後勢力)이 얼마큼 교회와 하나님을 싫어하는지 알 수가있다.우선 기독교력을 혁명력으로 대체하였고 달력에서 일요일을 없애버려 적지않은 농민을 당황케했다교회의 상징물인 십자가를 부셨으며 설교제단에 올라가 자축행사를 벌였다리옹(Lyon)에서는 수백명의 신부와 수녀들이 처형됬고파리와 오를레앙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학살이 이어졌다공동묘지 입구에는 십자가 문양의 사용을 금지하였다방데(vendée)지역 주민들은 이 혁명에 대해 악마같은 혁명이라고 정의해주었다.

    이 후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1794년 7월 27일 국민의회 다수파에 의해 단두대로 올라갔으며혁명세력은 힘을 잃다가 총재정부(Directoire)에 의해 대체되었다이 총재정부는1795년 11월부터 1799년 11월까지 4년간 유지된 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 - 1821)의 쿠데타로 인해 전복(顚覆)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섬 태생으로 1799년 11월 쿠데타로화려하게 등장하기 전몇 왕당파가 1795년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국민방위대에 사령관으로 부임했던 것처럼 누군가를 위해 이미 일하고 있었다.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대위에서 준장으로 진급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초상화에서 프리메이슨 특유에 손동작으로 밝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freemason)이었다.

    또한 나폴레옹은 귀신들린 자였다생클로드(saint claude)궁에서 어느 여배우와 혼외정사 직전간질 발작이 일어나 바닥에 누워서 허우적 거렸다이 때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여배우가 소리를 지름으로서 나폴레옹의 부인 조세핀이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1804년 나폴레옹은 황제대관식 자리에서 교황 레오7세에 손에 있는 황관을 빼앗아 자기자신이 직접 썻으며(이것역시 강한 반교회적 사상을 암시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혁명사상을 퍼트리고 다녔다마치 이렇게 말이다봐라 이것이 혁명이다혁명에는 자유평등박애가 있다이처럼 달콤한게 혁명이다.

     

     

    1848년에 일어난 혁명들

     

    시간이 지나, 1848년 이 시기에 일어난 봉기(蜂起)는 1848년 2월 19일 프랑스 혁명을 필두로, 3월 15일 헝가리에 부다페스트(budapest)에서, 3월 17일 오스트리아 빈(vienna)과 이탈리아 밀란(milano) 그리고 베네치아(venice)에서도 폭동이 일어났다. 3월 18일에는 베를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4(Friedrich Wilhelm IV1795.8 - 1861.1)왕궁 앞에 시민들이 모여 평화로이 시위하는 중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권총을 발포함으로 인해 군대가 이를 오인(誤認)하고 사격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했으며 바리케이드 전투로 발전했다. 3월 22일에는 보헤미야의 주도(主都프라하에서는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들불처럼 번지는 이러한 혁명에 대해서 니콜라이 1(Nikolai I, 1796.7 - 1855.3)는 고민하였으며그의 부하 파스케비치(Ivan Fyodorovich Paskevich. 1782 - 1856)에 보내는 서신에서 눈에 띄는 문구가 있다.

    만약 국왕이 이들 무리에게 고개를 숙인다면 독일은 끝장이다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며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 혼란한 상황을 막아 줄것을 구해야한다

     

    프랑스의 경우혁명 이후 시민들이 들떠있을 무렵, 1848년 2월 24일 공회당(公會當)에서 부르주아계급의 사람들이 날치기로 임시정부를 세웠다모두 11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왕조정치반대파 2자산계급공화파 소자본가민주파 2노동자계급 2명으로 구성되었다혁명이 성공함으로 인해서 당시 존재하던 당파(공화당정통왕정파사회주의당)에 인사가 골고루 등용되어야 했지만임시정부의 중요한 직책은 모두 자산계급 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자산계급 중에서도 삼색공화주의자(三色共和主义者로 구성되었다.

    독일의 경우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frankfurt)에서 국민의회가 열렸으며교수,변호사,공무원,판사,검사같은 전문 직업계층 출신과 귀족농장주 등 330명이 참가하였다.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1849년 3월 20일 롬바르디아에서는 카보우르(Cavour.1810 - 1861)을 중심으로 군사위원회가 발족되 오스트리아 정부군과 싸웠고베네치아에서는 마닌(Daniele Manin. 1804 - 1857)이 국민자위군을 발족시켜 오스트리아 정부군과 싸웠다.

    헝가리에서는 독립운동의 영웅 루이 코수스(Louis Kossuth, 1802 - 1894)가 1848년 3월 3일 헝가리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였고, 10일 후에는 그의 연설에 용기를 얻은 헝가리 학생들이 빈을 비롯하여 부다페스트(budapest) 등 주요 도시에서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 - 1859)의 사임과 헝가리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1848년에 발생한 일련의 혁명은민족간의 감정과 경제위기에 원인이 있었다당시 유럽에서는 민주세력의 정치참여가 배제되었으며 서신을 검열하는 제도가 있었다.

    혁명을 일으킨 무리들은 오스트리아(Austria)에서 출판의 자유정치적 자유신앙의 자유법원의 배심석제도와 책임내각제를 요구했으며베를린(Berlin)에서는 시민의 무장허용과 서신(書信)을 일일이 검사하는 제도폐지그리고 연방회의에 소집을 요구했다.

    스페인에서는 책임내각제가 요구됬으며이탈리아(Italy)의 각 연방은 혁명세력에게 각각 차례로 전복되며 1870년 통일의 길로 나아갔다.

    프랑스에 임시정부는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으며 1848년 11월 새헌법을 만들었다.

    이와같이1848년 일련의 혁명이 일어나기전, 1830년경에 이미 유사한 혁명이 일어났으며군주와 그의 신하들은 이러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1848년 10월 경에는 오스트리아의 왕 페르디난트1세가(Ferdinan I, 1793.4 - 1875.6) 사상자를 내면서 빈(vienna)을 재함락했으며, 11월 초에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4세의 병사들이 베를린에 무혈입성했다오스트리아군은 더 나아가 이탈리아체코헝가리의 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했다.프랑스에서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4 - 1873.1)가 1848년 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집권에 방해되는 세력을 진압 및 체포했으며 의회를 해산하고 제정(帝政)으로 돌아갔다즉 1848년에 일어난 대다수의 혁명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주의할만한 점은 파리코뮌(commune de paris)이라 하여 1871년 3월 18일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나 코뮌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이들은 5월 21 - 28일 정부군이 지휘하는 베르사유 군대에 의해 진압된다그런데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3월 18일을 프롤레타리아 기념일로 정하고매년마다 1848년의 혁명과 파리 코뮌의 몰락을 제 1차 세계대전때까지 기념했다고 한다이것은 혁명을 추구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立證)한다.

    당시 이러한 급격(急激)하고 이성(理性)이 마비되는 사회변화에 모두가 직면했으며누구나가 혁명에 동참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선택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광기(狂氣)가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시아와 중남미

     

     

    프리메이슨(freemason) 사상가(思想家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1818.5 - 1883.3)는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임무는 세계시장을 만드는 것과 이것을 바탕으로 생산하는 것이다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캘리포니아(California)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에 식민지화를 가속화 시키며중국과 일본의 문호개방으로 이 임무는 완성되었다.라고 말했다.

    30세에 공산당선언(Communist Manifesto)을 한 칼 마르크스는 그의 초상화에서 프리메이슨 특유의 손동작으로 자기스스로 증명하듯 프리메이슨(freemason)이다그의 공산당 선언에는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기능을 하는 지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거의 없다고 한다마르크스는 또한 자본론(The Capital)을 썻으며그안에 공식적으로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말이 등장한다.이 후 자본주의 자본주의하다가 자본주의가 자주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Ideologie)의 틀을 제공하였다.

    즉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까지 세계를 움직였던 사상(思想)은 프리메이슨(freemason)의 머리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의외로 쉽게 정리된다파시즘(fascism)도 프리메이슨의 머리속에서 나왔다고 딱잘라 말하기는 어렵다당시 파시스트(fascist)정부는 공식적으로 프리메이슨을 탄압하는 정책을 썻기 때문이다하지만 히틀러가 권력의 등좌에 오르기 전까지 프리메이슨의 도움을 받았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아시아와 중남미 지역을 자신들의 계획에 포함시키는 방안(方案)이 존재했던 것이다.

     

    1854년 페리제독(Matthew Calbraith Perry, 1794 - 1858)에 의해 일본의 문호는 개방된다이어 제 1차세계대전 때는 3국협상 측에 가담해 전쟁에 참여하였다일본은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8월 15일 독일에게 다음달인 9월 15일까지 청나라와 일본의 바다에서 독일군이 완전히 철수할 것과 청나라 내 독일 조계지를 일본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이에대해 독일은 일본이 청나라에서 할양받은 타이완을 반환한다면 독일도 칭다오(靑島)를 반환할 용의가 있다고 대답하자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1914년 8월 23일에는 독일에, 8월 25일에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한권으로 배우는 신학교에 공동저자 케빈 크래그폴 스픽커의 글라틴아메리카의 교회와 혁명을 보면 신기하게도 지금으로부터 100년도전에 프리메이슨(freemason)의 마수(魔手)가 벌써 중남미 지역까지 뻗쳐 있다.

    1854년 멕시코에서는 자유주의 세력에 의해 아유틀라 혁명이 일어났으며당시 멕시코에서 자유파든 보수파든 모든 엘리트 계층은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자유파는 프리메이슨의 지부 중 주로 요크 라이트(York Rite)의 회원이었고보수파는 주로 스코티시 라이트(Scottish Rite)의 회원이었다. 1856 - 1857년 자유주의 대개혁(La Refomna)이 입법화 되면서가톨릭교회의 토지재산을 매각하는 법안이 생겼다이는 보수파와 교회의 반발을 일으켜 1861년까지 내전이 발발하는 사태를 초래하였다.의심쩍은 부분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910 - 1920에 멕시코 혁명이라 불릴만큼의 내전이 있었으며, 1920년대경 완전히 새로운 정치 엘리트가 권력의 핵심부에 등장했다. 1917년 당시에 쿠에레타로 헌법에는 교회건물 바깥에서 예배를 금지시켰고교육기관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였다또한 카톨릭에 영향을 제한시키기 위해 민간행정당국에서는 사제(司祭)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와서 등록하라고 지시하였다결국 1927년 새로운 헌법에 반발한 카톨릭교도들이 멕시코 중부에서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과테말라(Guatemala)에서는 후스토루피노 바리오스(Justo Rufino Barrios, 1835 - 1885)가 이끄는 자유파 정권이 1871년을 기점으로 로마카톨릭이 국교임을 부인하고 교회재산의 대부분을 몰수했으며 성직자들을 내쫓았다.

     

    사람들에게 마치 빛을 주는 듯한 착각을 주는 일루미나티와 프리메이슨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5,700,000명이있다고 하며 그중 4,000,000명 정도가 미국에 있다고 한다.

     

     

    제 1차세계대전

     

    6.25전쟁을 연구하다가 1차 세계대전까지 연구하게 되었는데필자가 생각하기에 제1차세계대전의 일어난 원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첫째는 군사적인 충돌의 가시화이며두 번째 로는 외교적 간계(奸計)와 실수이다.

    1913년 빌헬름2세의 딸 빅토리아 루이스(Viktoria Luise Von Preußen, 1892.9 - 1980)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유럽에 모든 국왕은 베를린에서 모임을 갖는다1차세계대전 전에 각 유럽국가는 혼인관계를 통해서 화합을 도모했으며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난 앙숙(怏宿)관계가 아니었다.

     

    몸속에 영국인의 피가 흐르는 빌헬름2(Wilhem II, 1859.1 - 1941.6)는 할머니가 빅토리아(Queen Victoria, 1819.5 - 1901.1) 여왕이었다그는 후에 나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Wird er später sagen)라고 말했고전쟁이 일어나기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영국에서는 많은 노동자계급과 자유당(Liberal Party)인사가 전쟁을 반대하였고사람들은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에 모여 영국의 중립을 요구했다독일에 빌헬름2세는 러시아의 니콜라이2세와 먼 친척이었기 때문에 전보를 통해서 전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또 1914년 7월 31일 저녁 발생된 러시아의 총동원령을 영국이 설득해 지연시켜준다면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군사행동을 억제할 것이라는 내용의 급전을 영국에 보내기도 하였다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jean jaures, 1859.9 - 1914.7)는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암살당했다.

     

    당시 독일은 혁신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이는 프랑스영국러시아의 경계심을 부추겼다빌헬름2국력을 날로 발전시킴에 따라 주변국과의 관계는 점차 불편해졌으며, 1908년 8월 크론베르크(Kronberg) 회동에서는에드워드 7(1901년부터 1910년까지 영국국왕으로 재위)가 대동한 부()국무차관 하딘 경(Sir Charles Hardinge, 1858.6 - 1944.8)이 독일의 해군군비경쟁이 전쟁을 다그친다고 말하자 빌헬름2그것은 무역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며해군경비에 대한 지출을 제한하는 것은 전쟁선포나 마찬가지라며 정면으로 맞받아쳤다독일의 생산력은 1914년 영국을 이미 추월했으며해군군함의 경쟁력도 그 간격을 점차 줄여가고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 역시 군사력을 점진적으로 강화하는 추세였다그것은 당시 독일의 외교대신 야고흐(G.von jagow, 1863.6 - 1935.1)가 영국주재 독일대사관 리히노브스키(K.M.Lichnowsky, 1860.6 - 1935.1)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확인된다지금러시아는 아직 전쟁준비를 끝낸 상태가 아니다프랑스와 영국도 지금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권위있는 인사의 예측에 따르면몇년이 더 경과시 러시아는 전투력을 갖추게 되며 그때가서는 사병에 수량면에서 우리를 압도할 뿐더러발트해 해군함대와 전략적철도도 완성되게 된다그러나 우리의 힘은 그들에 비해서 점점 쇠퇴하고 있다

    러시아참모부와 프랑스는 영국 해군성과의 협력아래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8년전인 1907년부터 꾸준히 군사비용을 증강시켰다.

     

    1914년 독일은 킬(Kiel)운하의 확장공사를 마무리함으로 인해 해군전함을 북해(North Sea)에서 발트해로 바로 이동시키는것이 가능해졌으며그 해 4월에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해군협정을 맺는다는 사실을 입수했다또한 유사시 6주일안에 프랑스군을 궤멸하고 주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신속히 이동시켜 러시아군을 섬멸하게 될 슐리펜(schlieffen)군사계획을 수립하였다독일군부는 1917년까지 시간을 끌게되면러시아와 프랑스에 병사모집이 완료되기 때문에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수 있음을 예측 및 간파해냈다.

     

    1914년 6얼 28일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드(Franz Ferdinand, 1863 - 1914)가 가브릴로 프린치프(G.princip)에게 2발의 권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게된다페르디난드는 황태자인 동시에 오스트리아 군의 원수 겸 총검열관이었으며곧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6월 28일날 페르디난드가 사라예보에 간 이유는 당시 발칸반도에서 정치인물을 겨냥한 적지않은 암살사건이 세르비아를 주축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이는 오스트리아를 자극시켰고 일종의 손봐주기 처럼 세르비아 변경에 있는 보스니아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자행했다날짜도 6월 28일로 잡았는데이 날짜가 특별한 이유는 세르비아가 1386년 터키에 의해 정복된 날짜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이하 오스트리아로 약칭)은 독일과 사전조율을 했으며, 1914년 5월 독일의 육군대장 몰트케(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 1845.6 - 1916.6)는 오스트리아의 육군원수 겸 참모총장 회첸도르프(Franz Graf Conrand Von Hötzendorf, 1852.11 - 1925.8)와 칼스바트(Carlsbad)에서 군사회담을 갖는다.

    1914년 6월 5일 오스트리아의 황제 조세프1(franz josef I, 1830.8 - 1916.11)는 특사를 파견해서 웰리엄 2세를 만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6월 12일에는 페르디난드와 빌헬름 2세가 프라하성(Prague Casle)에서 회동을 갖고 전쟁계획을 수립했다이 회담에서는 러시아가 진행하는 전쟁준비의 속도지중해에서 오스트리아 해군의 군사력 강화 그리고 터키와 로마니아볼리비아를 끌어들여 세르비아를 침공하는 내용이 논의됐다.

    세르비아 당국은 비밀조직 흑수회와 보스니아 청년단체가 페르디난드를 암살하려는 첩보를 사전에 입수하고국경에서 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흑수회와 긴밀히 협조한 세르비아 변방군이 이들을 통과시킨다러시아의 육군개편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전쟁을 꺼렸던 세르비아 당국은 세르비아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에 연락했지만오스트리아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군사훈련을 강행하였다.

    1914년 6월 28일 막상 페르디난드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이해관계가 달린 유럽각국은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을 외교사에서는 7월위기라고 부른다.) 우선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였다그 이유는 세르비아에 요구한 10개조항(1.오스트리아 대한 증오심이나 경멸감을 조장하거나 그 영토의 보존에 반대하는 경향을 띤 일체의 출판물을 금지한다. 2.인민의 방어같이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모든 단체들을 즉시 해체하고 그 선전 수단들을 몰수한다. 3.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세르비아 내의 공공 교육활동을 지체없이 제거한다. 4.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에 가담한 인물들은 군대 및 행정 조직전체로부터 축출한다. 5.오스트리아 왕국의 영토 보존에 반대하는 전복활동의 제거를 위한 오스트리아 정부대표의 세르비아 내 활동의 협조를 수락한다여섯.6월 28일의 음모에 가담한 방조자들에 대한 사법절차에 오스트리아 정부의 대리인들이 참여토록 한다. 7.사라예보에서의 정부조사단의 결과를 손상시킨 보야 탄코비치(Voija Tankovich)및 밀란 치가노비치(Milan Clganovich) 두 사람의 관리를 지체 없이 체포한다. 8.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을 넘는 무기 및 화약류의 불법거래를 방지하고 사라예보 사건 당시 무기거래를 방치했거나 방조한 관리들을 처벌한다아홉.6월 28일 범죄 이후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적 발언을 자제하지 않았던 세르비아 고위 관리들의 정당화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한 설명을 촉구한다. 10.앞서 제시된 조치들의 집행에 대해 오스트리아 정부에 지체없이 보고한다)을 세르비아가 수용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마찬가지로 슬라브 민족이 많았으며세르비아와 동맹국가였기 때문에 전쟁 발발전 최대한 오스트리아를 억제할려고 했다. 7월 24일 러시아는 긴급 대신회의를 열어 강경한 입장이 전쟁의 도발을 억지할 수 있으며 전쟁이 발발해도 러시아는 이것을 밀고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신들은 이에 모두 동의하였다그 날 저녁 세르비아에게 이러한 의사가 알려졌으며러시아의 외무 장관 세르게이 사조노프(Sergei Dmitrievich Sazonov, 1860.8 - 1927.12)는 독일대사에게 나는 오스트리아를 증오하지 않는다다만 경멸할 뿐이다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집어삼킬 구실을 찾으려 하고 있다그러나 그런일이 일어난다면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일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러시아 정부는그 다음날인 25일에 부분 동원령을 내렸으며오스트리아가 7월 28일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7월 30일 총동원령을 내린다.

    프랑스와 독일영국의 반응을 순서대로 관찰하자면프랑스에서는 대통령 푸앵카라(Raymond Poincaré, 1860.8 - 1934.10)와 총리 비비아니(Jean Raphaёl Adrien René viviani, 1863.11 - 1925.9)가 1914년 7월 20일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현재 Saint Petersburg)에 도착해 양국간 동맹의 의무를 다할 것이라는 입장을 확인했으며공개적인 외교장소와 그 밖에 지역에서 귀중한 우애형제같은 해군과 육군의 힘충성적인 동맹관계를 언급하며 러시아와의 관계를 과시하였다또한 특별히 오스트리아 대사를 만나 어루듯이 세르비야 문제를 신중히 다뤄야 한다고 말했으며또 말하기를 세르비아와 러시아사람들간의 우정은 매우돈독하며 러시아는 프랑스라는 동맹국가가 있다도대체 이문제가 어디까지 갈지 알수없다라고 말했다푸앵카라 대통령 일행은 23일에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29일 파리로 돌아갔으며오스트리아는 23일 푸앵카라 대통령이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는 날에 맞추어 세르비아에게 10가지 요구사항이 들어있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독일의 입장은 신중했다왜냐하면 전쟁이란 손자병법에서 손자가 말하고 있는것처럼 국가의 대사(大事)이며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1914년 7월 5일 오스트리아 대사가 조세프 1세의편지를 들고온다편지안에는 페르디난드가 사망한 사건과 슬라브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일부사람들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유럽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이에 따라 빌헬름 2세는 포츠담(Potsdam)궁에서 고급장성들과 정부대신을 모아놓고 전쟁이 발생할 수 있음을 알리자 장군들은 전쟁준비가 끝났다고 말했으며총참모부의 군수부장은 이번일을 계기로 우리가 더 준비해야될것은 없습니다동원계획은 이미 1914년 3월 31일부로 이미 마쳤습니다군대는 평상시와 같이 모든 준비가 끝난상태입니다라고 말했다. 7월 6일 독일수상 베트만 홀베크(Theobald von bethmann hollweg, 1856 - 1921)은 오스트리아의 대사 쇠기에니(Von Szögyény - marich, 1841.11 - 1916.6)에게 지지를 표한다는 회답을 주었다상황은 점점 긴박하게 흘러갔고제국국회에서는 설전이 벌어졌다국회에서 투표안이 가결되야지 전쟁예산을 확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7월 30일 제국국회에서는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이 앞장서 러시아로부터 독일을 지켜야한다고 말했다러시아로부터 총동원령 소식이 들려오자 독일장성은 격한반응을 일으켰고시민들은 베를린에 있는 빌헬름2세의 황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 후 유럽각국은 8월초 서로에게 전쟁을 선포하며전쟁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으며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이다가 속내를 들어냈다영국이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과 참여하지 않을거라는 소식이 번갈아 오면서 혼선이 빚어졌다. 1917년 7월 9일 영국의 외무장관 그레이(Edward Grey, 1862.4 - 1933.9)는 주 영국 독일대사관에게 말하기를 영국은 프랑스와 러시아간에 어떠한 동맹관계도 존재하지 않으며의무에 얽매이지 않는다또다시 강조하지만 영국의 입장은 전쟁을 방지하는데 있다며 입장을 밝혔다. 7월 26일 프랑스 대사 캉봉J.Cambon은 독일의 외교대신 야고흐에게 영국내각의 해군 전쟁준비 소식을 알려주었다.

    726일 영국의 국왕 조지5(George V재위 기간 1910 - 1936)는 빌헬름2세의 동생 빌헬름하인리히(Albert Wilhelm Heinrich, 1862.8 - 1929.4)를 만나 우리는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다이 말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다영국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말한 내용은 이와 정반대였는데전쟁을 일으켜야 되며만약 전쟁 발발시 영국이 프랑스와 러시아에 편에서서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전쟁을 선포한 28일 다음날인 29일 베트만 홀베크는 주 영국 대사 리히노브스키로부터 영국 외무장관 그레이가 한말을 전달받았다그레이는 분쟁에 독일과 프랑스가 개입한다면 상황은 변하게 되어있다영국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못이겨 긴급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정부는 강건너 불구경을 할 수가 없다라고 했는데이 소식을 들은 빌헬름2세는 분에 넘쳐 소리질렀다.. 영국은 우리가 막바지 길에 이르렀을 때 카드를 끄낸 것이다이 저질인간들은 자신들의 유익만 챙기는 자들이다온갖 말로 우리를 속이더니 조지5세가 하인리히를 만날 때만 하더라도 중립을 지킬것이라고 말했지만 이제는 그게 거짓말임이 들어났다

    그리고 욕했다 진짜 열받게 하는 x새끼들!

     

    과장된 말이 아니라 1차세계 대전까지 영국의 활약은 눈부셨다인류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사건 중의 하나인 산업혁명이 1780년대 전후일어났으며이 산업혁명은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경제규모가 커진것이 특징이다또한 1848년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간접적 원인으로서 영국에서 발생한 경제불황이 있었다. 1차세계대전에는 전쟁을 간접적으로 유발시켰으며사진에서 프리메이슨 특유의 손동작으로 자기자신이 프리메이슨임을 입증했으며 1차세계대전 당시 해군제독이었던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1 - 1965.1)은 Land ship프로젝트를 통해 리틀월리라는 최초의 탱크를 개량시켜 Mark 1이라는 탱크로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에 인류역사상 최초로 투입시킨다.

     

    그 이면에는 심상치 않은 무리가 있었다. 1660년 설립된 영국왕립학회(the royal society of London for the Improvement of Natural Knowlede)의 초기 멤버가 거의 모두 프리메이슨이었다이들이 산업혁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848년에 프랑스 혁명이 성공하게되자 진화론을 쓴 찰스 다윈(C. R. Darwin, 1809.2 - 1882.4)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Erasmus Darwin, 1731 - 1802)은 그의 동료들과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Mackeys encyclopedia of freemasonry(맥키의 프리메이슨 백화사전)이라는 책을 보면 에라무스 다윈은 1788년 Derby(더비, East Midlands에 있는 도시)로 오기 이전 Cannongate Kilwinning라는 유명한 프리메이슨의 회원이었으며프리메이슨 지부 월광사(The lunar society) 를 창설한 인물이었다프랑스에서 혁명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고 한다.

     


     

    1차세계대전에서는 약 10,000,000명이 죽고 20,000,000명이 다쳤으며, 2차세계대전 때는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50,000,000명에서 70,000,000명이 죽게되었다.

     

     

    1차세계 대전 이 후 독일과 러시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싸움은 큰 그림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러시아가 어떻게 되든말든 사실 관심없다웃기지말고이 모든 것은 세계혁명을 향한 과정일 뿐이다

     

    볼셰비키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Vladimir ilich Lenin1870.4 - 1924.1)이 한말이다사람들이 잊어버릴 때쯤 혁명의 소용돌이가 다시끔 일어난다.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1848년 프랑스혁명까지는 60, 1848년 프랑스 혁명을으로부터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의 간격은 70년이었다.

    독일의 경우 1918년 9월 군지휘관들은 더 이상의 전쟁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으며황제에게 의회제도가 평화협정에 유리한 점으로 작용할 것이라며의회제도를 받아들일것을 제안했다. 1918년 10월 28일 의회는 제도화 되었다.

    4년간 지속된 전쟁기간 중 독일에서는 70만명의 사람이 기아나 질병으로 사망했으며그 중 대다수가 어린이와 노인이었다전쟁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점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1918년에 일어난 11월 혁명은 킬(KIEL)에 정박하고 있던 해군수병들이 근무지에서 이탈해전쟁반대 시위를 벌임으로 시작되었으며 전쟁에 싫증이 난 군부도 이를 용인하였다민중들은 독일 황제의 퇴위를 요구했다빌헬름2세는 상당한 압박아래 놓이게 되었고제국내각에서도 그의 퇴위를 요구했다.

    수병들의 폭동은 반란 수준으로 치닫았고노동자 계급도 여기 참가했다이 수는 점점 많아져 몇 칠안에 독일 각지가 혁명의 물결에 휩싸였다. 11월 9일 베를린에서는 여러 정치인사들이 러시아처럼 폭력적 혁명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고 이어 제국내각 내부에서는 빌헬름2세의 퇴위을 요구했다황제는 이에 대해 거부했지만 11월 9일 점심시간에 황제의 동의 없이 바덴(P.M.A.friedrich whilhem von baden. 1867.7 - 1929.11)총리가 황제의 퇴위설을 공식발표한 후 사회민주당의 당수 에베레트(Friedrich Ebert, 1871.2 - 1925.2)에게 정부의 관할권을 이양했다.

    11월 9일 오후 사회민주당 소속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 1865.7 - 1939.11)이 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했다.

     

    독일의 빌헬름2세는 1918년 11월 11일 황제전용 열차를 타고 네델란드에 도착해 1941년 6월 죽음으로써 생을 마감했지만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2(Aleksandrovich Nikolai II, 1868.5 - 1918.7)의 일가는 볼셰비키 혁명세력에 의해 1918년 7월 16일 중앙아시아 에카테린부르크(Ekaterinburg)의 한 저택지하실에서 총살당한다
    1차세계대전을 통해서 니콜라이2세의 무능력이 들어났으며단순히 공권력을 통해 민중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다총체적인 난국을 다스리지 못했다.

    니콜라이2세는 1915년 11월부터 군지휘권에 참여했으며내정은 그의 아내 알렉산더라(И.Aлeкcaндр.Ф.Р,1904.8 - 1918.7)에게 맡겼다알렉산더라의 아들 알렉세이(Ц.Алексей.Н.Р,1904.8 - 1918.7)를 치료해준 라스푸친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국가운영에 악영향을 주었다라스푸친은1916년 12월 30일 푸리시케비치(В.М.Пуришкевич)와 유수포프이(Ф.Ф.Юсуповы)에 의해 살해당했다.인플레이션에 따른 물가지수는 임금 인상률을 앞질렀고노동자들의 파업수가 점점 증가했다.

    러시아 군부에도 문제가 있었다. 1917년 2월 식량부족을 계기로 페트로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했으며니콜라이 2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페트로그라드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으나최고사령부에서 니콜라이2세에게 진압군 파견을 취소하고 두마가 요구한 입헌군주제를 수용하라고 조언했다니콜라이2세는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다독일의 빌헬름 2세가 네델란드행 열차에 몸을 맡긴것은 킬(KIEL)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연락이 닿는 20명의 사령관 중 2명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었다.

    의원의 직위가 있는 두마의 지도자들과 군부의 장군들은 니콜라이 2세의 퇴위를 요구했고, 1917년 3월 2일 니콜라이2세는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왕위를 양도할 것과 새 내각구성에 동의했다하지만 미하일대공이 제헌의회에 의해 추대되지 않는 한 제위를 계승할 뜻이 없다고 밝히면서 거부했다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통치는 끝났으며 동시에 러시아의 군주제는 사실상 끝이났다어쩌면 미하일은 처음부터 변절자(變節者)이거나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받았을 수도 있다. 1871년부터 러시아의 차르(tsar)는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1879년 4월 14일 솔로비요프라는 학생이 알렉산드르 2세에게 권총 5발을 쏘았다그해 12월 1일 모스크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철도에서 폭탄이 터져 황제의 기차가 탈선하기도 했다. 1880년 2월 17일에는 동궁의 식당에서 황제 가족이 들어오기 직전에 폭탄이 터졌다. 1881년 3월 1일 페테르부르크에서 폭탄이 터져 알렉산드르 2세는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당시 이 사건은 민중의 의지당이라는 단체에 의해 자행되었다.

    새 내각 즉 임시정부는 르보프 공(Prince george E.Lvov)을 수반으로 1917년 3월 2일 설립되었으며, 1917년 7월에는 케렌스키(Aleksandr Fyodorovich Kerenski, 1881 - 1970)가 총리직을 맡게된다이 임시정부는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 혁명 세력에 의해 전복된다.

    자신의 초상화에서 프리메이슨 특유의 손동작으로 자기자신이 프리메이슨임을 증명한 레닌은 볼셰비키당의 구성원이었다볼셰비키가 얼만큼 교회와 하나님을 싫어하는 지는 그들의 정책에서도 잘 드러난다볼세비키는 러시아의 국교로서 정교회가 지니고 있던 지위와 재산을 빼앗겠다고 결심했다교회와 국가를 분리했고교회 토지를 국유화시켰으며국가 보조금을 중단시키고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불법화 시켰다종교가 사적인 문제가 되었다.

    1920년 말까지 낡은 지배 계급이라는 착취 기계 안의 강력한 나사인 수도원 673개소가 해산되고 그 토지가 몰수되었다교회지지자와 소비에트 지지자 사이의 폭력 충돌은 내전의 한 상수(常數)였다볼셰비키의 정치선전은 사제를 주정뱅이와 먹보로수도사와 수녀를 재수없는 까마귀로 묘사했다대다수 성직자는 볼셰비키를 그리스도를 미워하는자 등으로 묘사했다.

    임시정부에서 총리직을 맡았던 케렌스키는 미국으로 망명해 자신이 집필한 회고록에서 자기자신을 프리메이슨이라고 소개했다로마노프 왕조가 종식된 후 일어난 임시정부와 볼셰비키의 수뇌(首腦모두가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어떤것이 계획적이었냐 어떤것이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냐를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볼셰비키당은 이 후 전시 공산주의를 선언했으며, 1924년 소비예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 설립된다이 후 소련은 공산주의 정책노선을 계속 유지하였으며전세계를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그리고 제 3세계로 나누었다이 기간동안 사람들을 지배할 기술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예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이루어진 요한계시록 13장 16 - 18절에는 짐승의 표를 사람의 이마와 손에 넣는 구절이 나온다현재 과학기술은 매우 발전해 있으며전자기기를 통해서 사람의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이 이미 완성단계에 와있다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전 러시아 전 인구의 98%는 정교회 신자였다이 많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공산주의 사상 즉 무신론(無神論)사상을 강요받게 된 것이었다.

     

     

     

    불법 금융가와 제 2차 세계대전

     

    이야기의 내용이 신속히 전개되고있지만 핵심적인 내용들은 표현되었다이 장에서는 1929년 세계대공황이 왜 일어났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이미 발생한 일에 대해서 서술하고 과정은 생략한다경제수치가 지루한 분은 이 장을 그냥 통과하여도 좋다.

    금융정책을 보다보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1929년에 발발한 세계대공황은 그 규모나 지속시간 면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지금까지도 세계대공황이 정확이 무엇때문에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학술계에 일치된 의견은 없다.

     

    먼저 주목할만한점은 1929년 세계대공황은 제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지 불과 10년만에 일어났다베르사유 조약이후 독일은 1,320억 금 마르크라는 불평등한 전후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6 - 1946.4)는 영국대표단의 경제고문으로서 배상금 문제에 참여했으나 학자의 양심을 어길 수 없어서 직위를 사퇴한다. 1920년 유럽 제조업의 생산량은 1914년 생산량의 4분의 1수준이었다.

    배상금 문제와 더불어 전쟁피해를 입은 국가들도 인플레이션을 겪었다옛 합스부르크 왕조를 계승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그 외 불가리아그리스폴란드가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으며이탈리아와 프랑스도 적지않은 인플레이션을 겪었다이 후 유럽각국은 적절한 경제대책을 시행하면서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다.

    1925년에 유럽의 식품 및 원료 생산량은 처음으로 1913년의 수치를 따라잡았으며 제조업 생산량은 계속 회복되고 있었다전세계적으로 무역이 회복되었다는 점과 더불어이제 자본 수출국이 된 미국의 방대한 투자에 힘입어 1929년 유럽의 교역량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1929년 세계대공황이 발생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미국에서 1929년 경제위기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이다첫째 과잉생산둘째 주식시장의 붕괴셋째 구매와 투자의 비활성화넷째 스무트 할리(원명은 The Tariff Act of 1930)관세법 등이 있다하지만 학자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서로의 의견을 반박하고의견의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서 은행에도 악형향을 끼쳤는데은행의 위기는 가장 취약한 채무자들의 자금 조달을 어렵게 만들었고수많은 파산자를 양산했다농민중소기업그리고 부채 가계는 이러한 위기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1929부터 1933년까지 미국의 실업률은 5%에서 25%까지 급등하였고산업생산량은 37%감소하였으며물가는 33% 하락실질 국민총생산는 30% 감소하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Roosevelt, 1882.1 - 1945.4)는 1911년 10월 11일 뉴욕의 홀랜드 8번 지부에 가입한 프리메이슨이었다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인 1930년부터 1933년까지 이미 미국 은행의 절반이 파산이나 합병을 통해 사라졌다위기 이전2만 9000개였던 은행은 1만 2000개로 줄어들었다.

    루즈벨트는 1933년 3월 4일 취임하면서 미국전역에 있는 모든 은행이 3월 6일부터 휴업(Bank Holiday)에 들어가며내부점검을 받은 은행만 영업재개가 가능하다고 공식발표하였다이 때 FRB에 가입을 거부하던 중서부권의 은행들은 영구휴가를 받게 되었다.

    이어 루즈벨트는 1933년 6월 16일 Banking Act of 1933(원명은 Glass - Steagall Act)라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다. Banking Act of 1933의 목표는 당시 은행이 갖고 있던 문제점을 해결시킨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이 연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이런 종류의 연합은행은1929년 경제침체가 발생하기 전 흔히 존재하던 유형의 은행이었다고한다그런데 이러한 은행들이 증권시장에서 활동함으로 인해서 은행에 건정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시켰다.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의 공동저자 Peter Temin에 따르면실제로는 당시 미국의 경제침체 중 증권부를 갖고 있던 은행이 증권부를 갖고 있지 않던 은행보다 실질영업이익율이 더 높았다고 한다.

    또한 루즈벨트가 농업과 공업 그리고 의약(FDA)과 관련해 내놓은 정책은 이후 연방정부의 힘을 영구적으로 강화시켰다.

     

    1929년 4월에서 1933년 2월 까지 세계의 무역수입은 30억에서 10억으로 줄었다또한 원자재 수출의 비중이 높은 라틴아메리카는 1929 - 33년 원자재 가격이 경제위기 전의 3분의 수준으로 떨어지면서높은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대부분의 나라가 파산하였다유럽에서는 1931년 5월에 오스트리아의 거대 은행인 보덴 크레디트 안쉬탈트(Bodencreditanstalt)가 파산하자 헝가리체코루마니아폴란드독일의 은행들이 잇달아 파산했다.

    이러한 경제위기는 독일과 일본에도 악영향을 미쳤다미국내에서는 FRB가 긴축통화정책으로 이자율을 급격히 인상하여 해외 대부(貸付)의 유인을 약화시켰다이에 따라 독일은 돈을 빌리기가 힘들어졌는데독일내부에서는 1929년과 1932년 사이에 실질 국내생산이 16%, 공업 생산은 40%이상이수출액은 거의 60%가 감소했다실업자수는 1927년에 130만명 (전체노동력의 4%이하)에서 1932년에 560만명 (17%이상)으로 급증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나치스로 하여금 정권을 잡는데 유리하게 만들었고, 1930년 9월의 독일 총선거에서는 그 때까지 독일의회에서 오직 12석 밖에 차지하지 못했던 나치스당이 총 577석 중 107석을 차지하기에 이르렀고, 1932년 7월의 선거에서는 총 608석 중 나치스당원의 의석은 230석으로 증가하였다.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는 집권할 수 있는 권력을 얻는다. 1933년 3월 5일에는 의회를 해산하고재선거를 통해 의석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3월 23일에는 수권법(Ermachtigunggesetz)을 통과시키더니 입법권(立法權)을 장악하고 히틀러는 1934년 총통에 자리에 올랐다.

    아시아의 일본에서는 1930년 1월 11일 하마구치(浜口雄幸, 1870 - 1931)내각이 금본위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엔화와 금화를 안정시키는데 실패하였고그 여파가 농촌에까지 확산되었다주가와 물가는 하락세를 기록했으며미국에서 발생한 공황이 수출에 큰 악재로 작용하였다이러한 배경하 에 군부(軍部)가 권력을 장악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금본위의 붕괴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1931년 9월 21년 영국이 금본위를 포기하기전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아르헨티나를 포함한 7개 국가는 이미 금본위제를 떠난 상태였다영국이 금본위제서 이탈한 이후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아일랜드 자유국그리스포르투갈 등을 포함한 24개국이 곧바로 그 뒤를 이었다.

    이 후 1971년 8월 15일 미국의 닉슨(Richard Nixon, 1913.1 - 1994.4)대통령이 달러와 금의 태환을 포기하면서 금본위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과거 금과 은은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였다금본위 즉 금태환 정책은 금과 화폐가 엮여 있다는 것을 말하며이러한 정책이 실행될려면 경제가 안정적이어야 한다국가의 재정빚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대사회에서 현재 금본위 은본위로 돌아가겠다고 외칠 나라는 별로 없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이 원하는 화폐는 무엇일까그것은 금본위 은본위그리고 인터넷 화폐(EX: 비트코인)도 아닌 전자시스템으로 이루어질 화폐이다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한 대재앙을 일으키는 무리의 특징과 프리메이슨의 특징이 고도로 일치하기 때문이며요한계시록에서 말한 짐승표를 강요할 짐승정권이 앞으로 프리메이슨과 일루미나티들에 의해서 구현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성경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쓰여진 책이다이 요한 계시록에는 짐승의 표가 갖고 있는 특징에 대해 서술했는데 이 짐승의 표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첫째계 13:16에 나오는 표는 영어성경에는 Mark로 적혀있으며헬라어 성경에는 카리소(Kariso)라고 적혀있다카리소는 심다라는 뜻이 있다둘째.(13:16) 표를 받는 위치는 이마와 오른손이다셋째. (13:17)사고 팔수있는 매매기능이 있다넷째13:17-18, 15:2절에 나오는 사람의 수는 라틴어 성경에서 디지털(digital)로 표시되어 있다.

    조금 더 들어가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첫째. (13:15)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짐승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둘째. 8번째 짐승 때 강요된다셋째. (13:6-8) 많은 사람들이 타협한다넷째.(16:2)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에게서 악하고 독한 헌데가 난다다섯째성경 맨 첫장에 나오는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말이나온다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 짐승의 표를 받음으로써 받게될 파멸적인 결과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다.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는 전자기기가 전자화폐의 형식으로 몸속에 들어가는게 프리메이슨의 최종목적일 것이다따라서 이 전자화폐가 프리메이슨이 원하는 화폐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자화폐가 의식의 큰 거부없이 오른손과 이마에 심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3:16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더라

     

     

    평양대부흥 단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신()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그것은 과거 왕조(王朝)에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도 확인된다.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494년까지 존속했던 부여의 영고(迎鼓), 기원전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존속했던 동예의 무천(舞天), 고구려의 동맹(東盟), 삼한(마한,진한,변한)의 수릿날과 시월제신라와 고려의 팔관회(八關會), 고려와 조선에 있었던 원구제(圓丘祭등 모두 하늘에 대한 감사기원의 뜻이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있기전 이미 복음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한국의 천주교인들이었다. 1645년 북경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아담 샬 신부와 접촉하면서 천주교에 관한 지식을 듣게되었고 그 해 11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이 후 천주교는 조선의 지식인과 상류층 사이에서 서학으로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한문으로 번역된 서학서를 연구하고 서학에 관심을 가지는 실학파(實學派)에 의해서 연구된다박지원홍대용박제가이덕무 같은 실학자들은 부연사(赴燕使일행과 동행하여 북경에 있는 성당에서 천주교 교리와 서양과학에 대해 듣고 연구를 지속해 나갔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신앙실천 운동인 1777(정조 원년겨울 교리연구회는 권철신정약전이벽등에 의해 주도했다이들을 비롯해서 권상학(권일신의 아들)등 수명의 지식인들이 1777년 주어사에서 교리연구회를 열고 10여일간 천지인성에 대한 고현(古賢)의 모든 학설을 토론하고 서학과 천주교 관계 서적을 검토한 후 천주교의 합리성을 인정하게 되었다그리고 이들은 자체적으로 기도생활과 안식일을 지키는 등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782년 중국에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받은 이승훈은 1784년 봄 서울로 귀국한 다음이벽권일신김범우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또한 영세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또 몇 사람을 교리 교사로 세워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 남녀에게 세례를 주었다. 1784년 음력 10월 경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김범우의 집이 있던 서울의 명례방(현재의 명동성당 부근)에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세우게 되었는데이 신앙공동체는 외부의 도움이나 선교사의 도움 그리고 성직자의 도움없이 자발적으로 태생한 것이여서 큰 의미가 있으며세계 선교사례에서도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누가 깨우쳐주지 않아도 예수님과 하나님이 참신임을 스스로 깨우쳐 알았다.

     

    또한 천주교인들은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전까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로 300명이상달레의 조선교회사에 따르면 1839년 기해박해 때는 200명이상, 1866년 병인박해 때는 8000명 이상 순교하였다이스라엘(Israel)과 한국은 거리상으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다그런데 어떻게 복음이 잘 전파되고, 1907년에는 평양에서 대부흥까지 일어날 수 있었을까?

     

    성경은 그 해답을 이미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 56장 3절부터 8절 여호화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1907년 평양대부흥

     

     

     

    1907년 평양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인류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수 없던 일들이 일어났다감리교 선교사 노블(W.A.Noble, 1866 - 1945)은 자신이 속한 선교처에 보고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한국교회에 나 자신이 지금까지 목격하지 못했고듣지도 못했던 가장 놀라운 성령의 부어주심의 현시가 있었는데아마도 사도시대 이 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의 현시는 없었을 것입니다매 집회에 주님의 권능(The Slain)이 교회 전체와 때로는 밖에 임했습니다남녀가 회개의 역사로 고꾸라지고 의식을 잃었습니다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사함이나 아직 회심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 가운데 탄식하며 집에서 온 밤을 지세웠습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기도합니다교회는 참으로 많은 악기에서 나는 화음보다 더 조화를 이루는 수백 명의 기도소리의 중얼거림으로 가득 찼습니다

     

    외국기자들은 신문에다가 한국의 평양이 제 2의 예루살렘이라고 소개했다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그곳은 기독교의 부흥이 발흥된 곳이며예수님이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에 따라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한 사람이 있던 곳이었다.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있던 마가다락방에서 성령께서 강림하셨으며이 마가다락방이 있었던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사명(使命)이 시작된 곳이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그 전부터 성령의 의한 감화와 감동의 징조가 뚜렷히 나타났으며점진적으로 강하게 그리고 넓게 나타났다 1901년 10월 북감리교와 남감리교가 연합으로 개최한 신학회에서, 1902년 사경회와 고난 주일 특별기도회에서, 1903년 1월 서울의 북감리교 선교회와 남감리교 선교회의 연합사경회에서, 1903년 1월 개성에서 열린 신년기도회에서, 1903년 8월 평양에서 문경호 전도사가 이끈 함종읍교회와 칠산리교회의 집회에서,1903년 8월 원산의 캐나다 장로교선교회와 남감리교 선교회가 주관한 한 주간의 연합 사경회와 기도회에서, 1904년 봄 캐롤이 맡고 있던 부흥회에서, 1904년 1월 장로교,감리교,침례교가 모여 열은 연합사경회(査經會,Bible study)에서, 1904년 1월 5일부터 2주간 하디 목사의 인도로 열린 원산 남산동감리교회의 사경회와 저녁기도회에서, 1904년 2월 중순 하디목사의 인도로 강원도 금화군 지경대의 새술막 사경회에서, 1904년 2월 26일부터 개성남부교회당에서 10일간 열린 개성지방 연합사경회에서, 1904년 4월 서울 자골에 위치한 자교(Chat coal or Chakol)교회에서 열린 10일간의 부흥회에서,1904년 10월 1일부터 9일까지 목사 하디의 인도로 열린 정동감리교회 집회에서, 1904년 10월 16일 모리스 일행이 평양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에서, 1904년 11월 1일부터 일주일간 하디 목사의 인도로 인천 제물포에서 열린 집회에서

     

    1905년 2월 개성에서 열린 지방 연례 사경회에서, 1905년 2월 말 강화 홍해교회에 아델리아 밀러(Lula A. Miller)가 인도하는 여자 사경회의 아침성경공부 시간에, 1905년 신년(구정)들어 열린 원산 남자 사경회와 원산지방 여자 사경회에서, 1905년 2월 여자들을 위한 특별사경회에서, 1905년 2월 서울 문산포에서, 1905년 4월 크램의 인도로 열린 개성지역 첫 여자 사경회에서,1905년부터는 이제 원산개성평양서울을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1906년부터는 더욱더 크고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6년 봄학기가 시작되기 전 이화학당과 배재학당 두 학교에서 매일 세번씩 2주간 열리는 하디의 집회에서, 1906년 1월 장감연합공회의 결정에 따라 서울지역에서 열린 특별 신년 부흥집회에서, 1906년 2월 서울 자교교회에서 열린 신년 사경회에서, 1906년 1월 29일 장대현교회와 남문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신년사경회에서, 1906년 1월 30일 선천읍 교회당에서 열린 신년부흥회에서또 중요한 사건으로는 1906년 가을 평양과 원산 서울에서 열린 일련의 사경회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의 서울과 평양집회저딘(J.L.Gerdine)의 목포 부흥회선교사들의 정오 기도회를 들 수 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란 당시 평양 장대현 거리에 있었던 장대현 교회에서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열린 평안남도도사경회(平安南道都査經會)에 내린 성령의 임재를 뜻하며이 성령의 역사가 장대현 교회에 그치지 않고 평양 시내로평양 주변의 도시로전국 방방곡곡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까지 뻗쳐나간 사건을 뜻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에는 크게 3가지 특징이 있다첫째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둘째부흥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셋째회개했다.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함은 1906년 9월 서울 사경회와 장감연합공회에서 존스톤 목사가 말한 영국의 웨일스와 인도의 부흥소식을 듣고 선교사들은 자극을 받았다이에 선교사들이 수개월간 한국에 부흥이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며,더 나아가 장대현 교회의 이길함 선교사와 평양 시내 선교사들은 한국인 신도들에게 같이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이에 평양지역에서는 교파를 초월해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이 1907년 1월부터 있는 장로교의 평안남도도사경회와 후에 열릴 감리교의 연합사경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할 것을 기도로 간구했다.

    1906년 크리스마스 이 후 1주일간 특별기도회가 장대현교회에서 열렸으며이 때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 그리고 한국인 교인들이 매일 저녁 장대현교회에 모여서 오순절과 같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자신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1907년 1월 2일부터 열린 사경회에서 13일날 저녁 영적인 방해 움직임이 느껴지자 선교사들이 14일 정오에 모여서 기도회를 갖었다그 동안에 기도가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촉구하였을 것이다.

    또한 해외에서도 한국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여자대학의 가우처(John F. Goucher, 1845 - 1922)총장은 1907년 6월 18일부터 열린 감리교 연례모임에서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견미사절단 일행과 1883년 기차에서 만난 후 “25년간 날마다 한국을 위해 기도하였다라고 고백하였다.

     

     

    두번째로 부흥을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함은 우선 길선주 장로를 들 수 있다. 1906년 10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평양 주재 장로교 선교사들과 한국 신도가 참여하고 존스톤 목사가 이끄는 특별사경회에서 영국 웨일스 지역과 인도지역에 일어난 부흥이 설명되었다존스톤 목사는 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누가 조선 땅에서 성령충만 받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아무도 대답을 못하고 조용히 있는데 길선주 장로가 손을 번쩍 들었다그 날 존스톤 목사는 한국 땅에 부흥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다고 한다.

    또한 1907년 1월에 열린 평안남도도사경회는 일반신자가 오는 곳이 아니었다교회의 대표자지도자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와서 참석했다이렇듯 교회가 내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허락해주셨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의 발단(發端)이 된 평안남도도사경회에서는 14일과 15일저녁 집중적으로 성령의 현시(顯示)가 이루어졌다.

    어떤사람이 그날 저녁에 있었을까밤을 지새우며 기도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저녁에 남았다. 14일에는 500-600명이, 15일에는 거의 6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이것은 마치 기드온의 300용사와 사도행전의 120문도를 연상시킨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맹인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온다예수님께서는 여리고라는 지역에 들려 나가시는 길에 디매오의 아들 맹인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있다가 예수님이 이쪽 길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다맹인거지 바디매오는 이것이 일평생 1번 올까말까한 기회인 것을 알았다그래서 소리질렀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시끄럽다며 말렸다그는 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오라는 소리에 거지한테는 전재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겉옷을 내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갔고 그의 눈을 치료받았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세번째로 회개하였다 함은 성령의 임재가 임했던 곳에는 항상 회개가 뒤따랐다백인 선교사목사장로집사평신도남자와 여자학생과 직업인노인과 어린자를 불문하고 회개하였다.

    다른 사람이 몰랐으면 좋았을 것들은밀히 행한 죄악들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혹은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죄악들이 낱낱이 고백되었다.

     

    예수님은 이미 회개와 관한 말씀을 하셨다.

     

    누가복음 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누가복음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마가복음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누가사도바울도 회개에 관하여 말하였다.

     

    사도행전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베드로 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사도행전 11: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1907년 평양대부흥은 예수믿던 사람을 변화시켰으며사회를 변화시켰다이러한 성령의 부흥을 아쉬워 했던 사람들이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을 전개하였다.

     

     

    피개입된 한민족과 회개를 촉구하는 글

     

     

    숨겨진 진실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그리고 진실을 전하는 사람도 불편하게 만든다 자기기만(自己欺瞞)을  한들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현실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한국전쟁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상한 점이 보인다.

     

    스탈린은 다른 공산국가에 원조를 하지않으면서유독 북한 김일성에게만 도움을 주었다스탈린의 성격상 한번 결정한 일은 번복하지 않으며도움을 주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고 봐야한다.

     

    한국전쟁은 발발부터 반격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북한은 1950년 6월 25일남침이래 세 달이 못돼서 낙동강전선까지 도달했으며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 - 1964)가 트루먼(Harry S. Truman, 1884 - 1972)에 지상부대 투입을 요구하자 24시간도 되지 않아 지상부대 투입을 허가하는 승인이 떨어졌다.

     

    보통서적에는 중공군이 갑자기 밀려왔다고 써있으나중공 외교부장 주은래(周恩来은 미군이 38선을 돌파할 경우 참전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UN군이 만주국경선 까지 진격할 경우 참전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경고했다.

     

    음모론자들은 전쟁에서 전략적 실수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도록 하겠다.

     

    6.25한국전쟁 발발시 스탈린(Joseph Stalin, 1879 - 1953)은 앞장에서 말한 볼셰비키당의 구성원이었다그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당시 이미 그 구성원이었으며 직책은 민족문제 인민위원이였다초상화에서 프리메이슨 특유의 손동작으로 자기자신이 증명하듯 스탈린은 프리메이슨이었다스탈린이 러시아에서 수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레닌이 자신의 후계자로 직접 스탈린을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트루먼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트루먼은 1909년 2월 9미주리 벨튼의 450번 지부에서 가입했다지부 회원 일부가 독립해 미주리 그랜드 뷰 618번 지부를 창립했을 때 트루먼은 초대 지부장을 지냈다. 1940년 9월 24 - 25일의 미주리 총지부 연례회의에서 그는 97대 그랜드 마스터로 선출되었고, 1945년 10월 19일에는 워싱턴의 남부 관할 본부 최고위원회에서 33번째 등급으로 올라간 인물이었다.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한국전쟁에 관여한 중요인물은 프리메이슨(freemason)이었다그렇다면 한국전쟁에 프리메이슨이 개입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6.25 한국전쟁은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불과 5년만에 일어났으며시간적인 순서를 보더라도 크게 어긋남이 없다.프리메이슨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그것은 주변국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면 일련의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리고 가장 큰 원인은 한국 자신한테 있었다.

     

    첫번째는 중국이다중국의 사회주의는 처음부터 변질된 사회주의였다모택동(毛澤東, 1893 - 1976)은 중국 현지에 맞는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으며이것은 나중에 등소평(鄧小平, 1904 - 1997)의 흑묘백묘(黑猫白猫경제 개방정책에서도 잘 들어난다프리메이슨 스탈린에게 있어서 모택동은 알 수 없는 존재였으며모택동의 속내를 떠보기도 했다한국전쟁 발발 당시 중국은 신생국가 였으며국가가 설립된지 1년이 지난 무렵이었다중국 내부적으로도 피해 복구문제경제 활성화 문제토비 숙청문제토지 개혁문제그리고 대만 문제와 서장 문제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렇지만 중국 사람 역시 피해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포로로 잡힌 전(타이완 국민정부군 제87사단장이었던 권준 준장이 1951년 6월 19일 면담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중공군의 60%가 전 타이완 국민정부군이며 지금도 장제스 총통을 위하여

    싸울 것을 희망하고 있다

     

    두번째로는 일본이다. 1904년 러일전쟁부터 시작해 일본은 프리메이슨의 계획에 본의(本意)아니게 적지않은 도움을 주었다일본은 1차 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에도 참여했으며, 1945년 히로시마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하였다경제 활성화가 이루어져야 언젠가 또다시 참여가 가능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재계 인사들은 신풍(神風)이 불었다며 기뻐하였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이다한국전쟁은 왜 발발해야 했을까궁극적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한국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은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한반도에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들었던 프리메이슨 고위층은 극도의 불안감과 좌절감 그리고 분노와 증오감을 느꼈을 것이다애시당초 한국전쟁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임했던 한반도를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데 맞추어져 있었다한국전쟁은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의사를 표명하자당일 자정(子正,12소련이 긴급히 남하해 지금과 같은 38선을 형성하였다이 후 1949년 6월 29일에는 주한미군이 철수하였고, 9월 19일에는 소련도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을 철수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당시 남한에는 북한군과 싸울만한 군사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라서 북한군이 밀고내려오는 것은 예견된 것이었다.

    실제로 프리메이슨의 계획은 성공하였다평양대부흥의 중심이었던 장대현교회가 있었던 장대재 언덕은 현재 혁명적 언어인 만수대로 바뀌었으며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 드리던 곳에 1972년부터는 20m 높이에 김일성 동상이 들어서게 되었다제 2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평양이 전혀 다른 곳 같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1424년 프리메이슨은 115페이지로 구성된 Old charges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에는 프리메이슨의 본질과 조직행동방식에 대해 기술하였다. Old charges에서는 니므롯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지금도 프리메이슨에서는 니므롯의 선서라던지 니므롯의 지시를 외우고 또 선행한다고 한다.

    니므롯은 누구인가바벨탑 쌓기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며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對敵)한 인물이다.

    또한 역사적인 객관적자료와 심증(心證)을 토대로 알 수 있는 것은 프리메이슨이라는 단체는지난 500년간 다신론 사상을 토대로 어떻게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인지 이것을 연구하고 꿈꿔 온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이렇게 하나님과 교회를 싫어하는 무리가 있는데 예수님 잘 믿고 평화롭게 잘 사는 한반도에 아무일도 없었더라면그것이야 말로 뭔가 모순되며 말에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끔찍한 참상(慘狀)을 낳았다. 6.25전쟁은 3년동안 지속되었으며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국군 62만명유엔군 16만명북한군 93만명,중공군 100만명민간인 250만명이재민 370만명전쟁미망인 30만명전쟁고아 10만명이산가족 1,000만명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명의 절반을 넘는 1,900여 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때 힘써싸운 국군장병 외에 외국에서 온 젊은이들도 있었다아무런 연고(緣故)도 없는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있었다이제 한민족과 한국사람은 하나님께서 한민족과 한국사람에게 준 시대적 사명을 깨닫고 일어서야 한다.

     

     

     

    선량한 민족으로써 정체성을 깨달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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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9/25 15:48:36  175.223.***.196  까부남  118967
    [2] 2020/09/25 15:52:46  122.32.***.76  별빛냥이  640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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