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물건을 채우고, 전진 배치하는 걸 페이스 업이라고 하는데요. 가급적 물건 나가면 바로바로 해주는 게 좋아요.”
“아, 네. 선배님.”
“하하. 선배는 뭘요. 이제 전 그만두는데.”
새벽 5시. 편의점 야간 알바 첫 근무는 내일부터지만, 경력이 없다고 했더니 점장님이 하루 전에 나와 전임자에게 일을 배우라고 했다.
이번에 알바를 그만두는 선배는 꼼꼼한 성격인지 야간 알바가 해야 할 일을 적어놓고는 하나씩 알려주었다.
한차례 설명을 듣고 크게 힘든 건 없겠다고 생각할 때쯤 편의점 문을 열고 손님이 들어왔다.
“야간에 혹시 도둑이 들 수도 있으니 가급적 손님이 있을 땐 다른 건 하지 마시고 지켜보는 게 좋아요. 저기랑 저기 거울 있죠?”
선배가 편의점 구석에 달린 거울을 가리켰다. 거울에 손님이 냉장실에서 맥주를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어?”
손님이 맥주를 꺼내다가 하나를 바닥에 떨어트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트린 맥주를 다시 진열장에 넣고 새 맥주를 꺼냈다..
눈높이에서 떨어진 터라 맥주가 온전할까 싶어서 가봐야 하나 하고 주춤거리자 선배가 내 팔을 잡았다.
왜 그러나 싶어 바라보니 조용히 있으라고 눈짓했다.
“네. 다 합쳐서 11,500원 입니다. 봉투 20원 하는데 드릴까요?”
선배는 맥주 네 개와 과자 하나를 고른 손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산했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맥주가 찌그러졌을 텐데 원래 그런 건 그냥 놔두는 건가? 마지막 날이라고 일 만들기 귀찮은 걸까? 오늘은 따로 알바비 받지도 않고 그냥 잠깐 교육 나온 거니 내 탓은 아니지?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도중에 손님은 이미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서고 있었다.
“잠깐만요.”
손님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있던 선배가 빠른 걸음으로 맥주 매대를 확인했다. 터지진 않았지만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따라와 보세요.”
선배가 맥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손님!”
선배가 손님을 불러세웠다.
“예?”
“죄송합니다. 아까 떨어트리신 캔이 조금 찌그러졌더라고요. 이걸로 교환해 가시면 안 될까요?”
“어…. 뭐.”
손님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선배는 찌그러진 캔을 비닐봉지에 넣고, 멀쩡한 맥주를 집어 들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을 보내고 편의점에 돌아와 맥주를 다시 진열했다.
“저, 그런데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고 나가고 나서 말한 거예요?”
“그게요. 별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긴 한데….”
내가 궁금한 걸 묻자 선배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별일이 생겼다. 아까 맥주를 사 갔던 손님이 돌아왔다.
“환불해 주세요.”
손님이 비닐봉지를 계산대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다른 건 환불이 되는데 이 맥주는 환불이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환불해 주세요.”
“물건이 파손된 경우는 환불이 어렵습니다.”
“뭔 파손이야? 맥주는 멀쩡하잖아? 먹는 데 하나도 지장 없는데.”
손님이 열 받았는지 말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보세요. 바닥이 찌그러져서 세워지지 않잖아요.”
선배가 맥주를 계산대에 세워보려고 했지만, 한쪽이 심하게 찌그러져 손을 떼자마자 넘어졌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용물이 멀쩡한데. 먹는데 지장 있어? 어?”
“내용물이 멀쩡해도 용기가 이 상태면 저희가 물건을 팔 수 없어서 곤란합니다.”
“왜 못 팔아! 자꾸 안된다 하는데 안된다는 법적 근거가 있어? 네가 뭔데 안된다 된다 판단을 해? 새끼가 건방지게. 너희가 맥주를 파는 거지 캔을 파는 거냐? 어?”
손님이 급격하게 끓어 올랐다.
옆에서 멀뚱히 보고 있던 나는 곧 멱살잡이를 할 것처럼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안절부절못했다. 그 와중에 선배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에이, 손님. 못 팔죠. 조금 찌그러진 거면 모르는데…. 손님도 이 맥주 대신 다른 맥주를 가져가셨잖아요. 제가 맥주를 사더라도 당연히 멀쩡한 걸 집죠.”
“내용물이 멀쩡한데 법적 근거 있어? 손님이 환불해 달라면 환불해 줘야지. 아씨. 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진짜. 이게 무슨 파손이야! 이게 터졌으면 또 몰라. 내용물이 멀쩡한데 환불해 줘야지.”
“캔이 찌그러졌으면 파손이죠. 중고나라에서 물건을 살 때도 내용물 상관없이 케이스가 있냐 없냐에 따라 가격이 많이 다르잖아요.”
“여기가 중고 나라냐! 내가 중고나 사는 사람처럼 보여? 어?”
십여 분간 실랑이가 이어졌다. 손님이 어떻게 윽박질러도 선배는 웃는 얼굴로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 손님은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는 맥주를 들고 사라졌다.
“...마지막 날 고생이 많으시네요. 저런 사람이 많나요?”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내가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뭐 가끔요.”
선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 아까 뭐 물어봤었죠?”
“그, 왜 바로 말 안 하고 손님이 밖에 나가고 나서야 말한 거예요?”
나는 아까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아. 그거요. 혹시 이런 일 있을까 봐요.”
“네?”
손님이랑 싸울까 봐 나가는 손님을 잡고 맥주를 교환했다고?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는 것보다 돈 받고 안 돌려주는 게 훨씬 편하니까요. 그냥 말하면 순순히 사 가는 사람도 있는데, 안 산다고 가버리면 경찰 부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거든요. 그렇다고 경찰 부르긴 너무 귀찮잖아요.”
“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중요한 것은 매장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 계산을 하고 안하고였다. 손님이 나가고 나서 급하게 붙잡은 것은, 지켜보다가 이제야 말하는 게 아니라 우연히 발견했다는 식의 연출. 일종의 양념이었다.
“그, 그런 걸 그 순간에 생각한 거예요?”
“뭐, 그렇죠.”
선배가 씩 웃었다.
편의점 알바, 크게 힘들건 없겠다던 생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만일 저런걸 뒤늦게 발견하면 어떻게 돼요?”
“점장님에게 말하면 물어내라고 해요.”
“예? 저한테요?”
내가 당황해서 물어보자 선배가 짐짓 한숨을 쉬어 보였다.
“아….”
손놈과 악덕 업주와 귀계가 판치는 편의점.
아직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도 전인데 어설픈 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고생하세요.”
선배가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아까 손님을 대할 때 지어 보이던 서비스직 고수의 웃음이 아니었다. 그만두는 자의 여유. 전역하는 병장이 이등병에게 지을 법한 미소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