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혼의 블랙홀<br><br><br><br>제29화 뻐꾸기 둥지<br><br><br>“다시 올 봄을 기다리며<br>내 여기 씨를 뿌리노라.”<br><br>내가 시를 맺었다.<br><br>“방금 읊은 시들을 모두 조합해서 훌륭한 시를 지었구먼. 밥이 다 식겠어. 일단 얼른 들고 이야기함세.”<br><br>상석에 앉아 있던 판사 대감이 말했다.<br><br>밥 먹는 동안에는 다들 아무런 말도 없었다. <br><br>나 역시 조용히 찬을 들었다. 조금 과하게 많았으나, 남긴 음식이 행랑채에 있을 하인들 용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처음 느꼈던 부담감을 덜어내고 다소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br><br>민 선달은 우리 집에서와는 매우 딴판으로, 아주 점잖게 밥을 먹었다.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과 말투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br><br>마침내 술상, 차상, 밥상이 모두 물러갔다. 손님 접대의 3단계가 다 끝난 것이다.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긴 담뱃대를 태웠다.<br><br>“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br><br>판서 대감이 내게 물었다.<br><br>“재희는 그 동안, 엄청난 수련을 하여 무(武)의 극의(極意)를 터득했습니다.”<br><br>내가 말했다.<br><br>“이제 무과에 급제하여, 스스로의 뜻을 펼치려 하는데, 실력 외(外; 바깥)적인 것이 작용하려 듭니다. 돌아가신 홍 판서 대감과 정회(情懷;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시다면, 부디 실력 없는 자가 가문의 이름으로 재희가 차지해야 할 홍패(紅牌; 과거 급제 합격증)를 빼앗는 일이 없도록,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의금부를 책임지는 종1품, 오늘날의 경찰청장) 대감께서 이번 부정 건을 조사하여 막아 주십시오.”<br><br>마치 예상했던 말이 나온 것처럼, 대답도 즉각 나왔다.<br><br>“무과(武科)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오늘날의 국방부장관) 관할 아래에 있네. 그 병조판서가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왕의 장인)의 청탁을 받고 그리한 것이 사실이라면, 내 주상 전하께 한 번 상주해 보겠네. 그렇지만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 요즈음 세도정치(勢道政治; 특정한 가문이 권력을 잡고 휘두르는 일)는 극에 달해서, 조정에서 안동 김 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진행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네.”<br><br>그러더니, 판서 대감은 성남이를 지그시 응시했다.<br><br>“허나,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닐세.”<br><br>“그것이 무엇입니까?”<br><br>“녹명(錄名; 과거 시험 볼 때 제출하는 응시원서)을 고치게. 다음 시험으로 복시(覆試; 2차 필기고사)와 전시(殿試; 3차 면접)가 남았지? 전시는 주상 전하께서 친히(직접) 복시(覆試)에 합격한 문, 무과 급제자들을 모아 놓고 문제를 내신다네. 그 어떤 부정도 개입할 수 없네. 그러니 자네는 복시(覆試)만 무사히 통과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복시에 제출하는 녹명에서, 자네 이름을 조금 바꾸세. 복시는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네. 자네가 말에서 떨어뜨렸다는 그 안동 김 가 도령이 눈에 불을 켜고 자네를 찾아도, 녹명이 일치하지 않으니, 과거 급제 전까지는 찾아내기 어려울 걸세.”<br><br>성남이가 벌떡 일어섰다.<br><br>“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4대조 이래로...”<br><br>판사 대감이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br><br>“자네의 4대조는 나의 종조부(從祖父; 할아버지의 형제)이시기도 하네. 작금(昨今; 요즈음)의 세도정치를 처음으로 시작하신 걸물(傑物; 훌륭한 인물)이시지. 우습게도, 안동 김씨들이 이리 위세를 떨게 된 데에는, 종조부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신 영향도 있음이야. 조상의 인과(因果)를 자네가 받는 것이지. <br><br>아무튼, 종조부께서는 한때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으시었네. 하지만, 말년에 정조 전하의 노여움을 사, 멀리 유배 당하셨다네. 자손을 남기기는 하시었으나, 멸문지화(滅門之禍; 가문이 망하는 재앙)를 당할까 염려한 조부(祖父; 할아버지)께서, 종조부의 하나 뿐인 아들을 남양 홍씨 성을 지닌 다른 친지에게 양자(養子)로 보내시었어. 그러므로 자네가 녹명에 기록한 4대조는 친생(親生; 친자식) 족보일세. 그것 말고, 자네 조부께서 양자로 들어간 집안 족보를 쓰면 되네. 녹명에 기재하는 본인 이름 역시 자(字)나 호(號)를 쓰면 되지.”<br><br>“그런 묘안이 있으셨군요! 역시 판사 대감께서는 비상(非常; 님 천재임)하십니다!”<br><br>성남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민 선달이 선수를 쳤다.<br><br>“그렇다면,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도, 여태 아무런 보직(補職; 벼슬자리)도 받지 못한 저는 대체 어찌해야 하는지, 고견(高見; 높으신 분의 생각)을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대감?”<br><br>흡사 보이지 않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것 같았다. 마침내 민 선달이 비와 바람을 맞으며, 노숙까지 불사하면서도 이곳에 온 목적을 꺼내 놓은 것이다.<br><br>“허! 허! 허! 거참, 사람 호탕하고 시원~ 시원해서 좋네. 원하는 걸 빙 에둘러 꼬지 않고 바로 말하니 얼마나 좋은가?”<br><br>귤산이 자칫 어색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수습해(收拾;쉴드를 쳐) 주었다.<br><br>“무과 정시(庭試; 시험에 소요되는 시일과 비용을 줄이고, 지방 유생들이 오랫동안 서울에 체류하는 부담을 줄인다는 것이 명분으로, 하루 안으로 결과가 나오는 시험)가 해마다 열리고, 식년시(式年試; 3년 간격으로 보는, 수능 정시모집 같은 정기 시험), 알성시(謁聖試; 국왕이 성균관을 방문하여 성인을 뵙고 치르는 시험)에 증광시(增廣試)까지. 합격자가 넘쳐나니, 설사 민 선달처럼 장원 급제를 했다고 해도, 자리 나기가 쉽지 않지.”<br><br>판사(判事; 판의금부사의 약자) 대감이 일반론을 펼쳤다.<br><br><br>"예. 소관 (과거 급제자 스스로를 낮춤) 역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장원 급제할 정도로 소관의 능력이 뛰어난데, 그 뛰어난 능력을 써서 위로는 주상 전하를 섬기고, 아래로는 도탄에 처한 백성을 왜놈이나 양이 (서양오랑캐)로부터 지켜내지 못하고, 이토록 술이나 퍼 마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한에 사무칩니다."<br><br><br>민 선달이 비장하게 말했다. 궁상에 찌든 모습만 보다가, 의외의 면을 본 것 같았다.<br><br><br>“벼슬길에 나아가, 종묘(宗廟; 역대 왕의 무덤)와 사직(社稷; 토지신과 곡식신)을 위하시는 주상 전하의 업무를 어떤 식으로든 보필할 수만 있다면, 소관(小官) 설사 그것이 말을 돌보는 가장 천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기쁘게 수행할 것입니다.”<br><br>“그래, 자네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야.”<br><br>판사 대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br><br>“비록 무과 시험이 병조(兵曹; 군사, 국방 담당) 관할이라 하나, 녹명소(錄名所)에 기재된 녹명 정도야 내가 바꾸어 줄 수 있네. 큰일도 아니고 그 정도야. 사조단자(四祖單子;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이렇게 조상 4명의 관직을 기록한 문서)에 기록한 성명, 본관, 사는 곳, 4대조 이내의 관직을 바꾸면, 자네가 무과 전시에 응시하더라도, 급제하기 전까지는 자네라는 것을 식별하기 곤란하지 않겠나. 그리고 보단자(保單子; 신원보증서)는 내가 써 주겠네. 6품 이상의 관료가 써야 하는 데, 마침 내가 종1품이니 적임 아니겠나.”<br><br>성남이가 대꾸했다.<br><br>“제 보단자(保單子)는 여기 자리한 아씨의 아버님께서 써 주셨습니다.”<br><br>판사 대감이 바로 말을 받았다.<br><br>“그러니 내가 쓴 보단자와 교체하면, 병법을 답안지에 서술하는 복시에서, 아무도 자네를 일부러 떨어뜨릴 생각을 하지 못할 거야. 자네는 공정한 기회를 원한다고 하지 않았나?”<br><br>성남이가 되물었다.<br><br>“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해 주려고 하십니까?”<br><br>판사 대감이 얼핏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br><br>“우리가 남인가? 자네 아버지 제사를, 내 아들 일순(一純)이가 사후 양자(死後養子; 죽은 뒤 대를 잇기 위해 양아들로 입적)로서 매년 드리고 있다네. 비록 자네가 서자라고 해도, 나는 자네 아버지와 형제 뻘 아닌가. 허허허.”<br><br>☆ ★ ☆ ★ ☆ ★<br><br>집으로 돌아온 성남이와 나는 몇 시간 동안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대응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병조판서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결국, 처음 보는 성남이 삼촌 뻘 되는 판사 대감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br><br>판사 대감은 약속대로 보단자(保單子; 신분 보증 문서)를 써 주었다.<br><br>그리고 민 선달은 자신이 한 말을 극심하게 후회하게 되었다.<br><br>사복시(司僕寺; 궁중의 말 담당 부서)의 가장 말단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아버지를 영주에서 한양까지 데려온 마부를 쫓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던 종9품직은 또다시 민 선달에게 쫓겨났다. 비싼 뇌물을 많이 먹여서 관직을 얻었는데, 아직 본전(本錢; 뇌물 바친 원가)도 못 찾았다며 격하게 억울해 했다. 그러나 그가 ‘본전’을 찾는다며 말의 여물을 횡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무도 그의 호소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바쳤던 애첩 역시 다른 사내와 도망갔다는 소문을, 우리 집 아낙네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 죽어가던 말들은, 민 선달의 보살핌 아래 다시 살이 찌기 시작했다고도 들었다.<br><br>추운 겨울이 되었다.<br><br>아버지의 상태는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았다.<br><br>어머니는 밤이나 낮이나 아버지께 붙어 지극정성으로 수발을 들었고, 어멈은 어머니께서 내 놓으신 아버지의 기저귀 같은 빨래를 해 왔다. 너무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 피차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br><br>감고당이 워낙 큰 집이라, 관리하려면 손이 많이 갔다. 나 역시 어머니를 대신해서 눈 코 뜰 새 없이 움직였다. 아버지를 따라온 전직 도적, 아니, 새로 생긴 하인들은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정말 헌신적으로 일했다. <br><br>그리고 복시(2차 시험)의 날이 밝았다.<br><br>-30화에서 계속-
출처 보완 |
2019-08-14 05: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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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평등하고
특별함을 책임지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있는 그대로 행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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