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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readers_32677
    작성자 : 레콜이
    추천 : 2
    조회수 : 242
    IP : 121.176.***.94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8/11/28 19:58:16
    http://todayhumor.com/?readers_32677 모바일
    검투사와 아가씨(중)

    몇 일 전 문장연습(사투, 참견, 도도, 생각, 밤)에 썻던 댓글의 뒷 이야기를 써 보았어요!

    검투사와 아가씨(중) 


    -------------------



     투기장 한껏 달아오른 과격한 축제가 끝나고 오후 다섯시의 반, 두 사람은 생각보다 이르게 저택에 있었다. 아가씨의 저택. 검투사의 가슴팍에는 깨끗한 붕대가 감아져있고 새하얗다.

     두 사람의 배경 바깥으로 넓은 정원이 보인다. 열어둔 커다란 테라스 창문과 오후의 공기. 아가씨가 물었다.

     "정원사는 어때요?"

     기대감 없는 건조한 물음이었다. 그에 검투사가 단답했다.

     "좋습니다."

     아가씨가 입에 가져다대던 찻잔을 멈칫하고 다시 내려놓으며 검투사를 바라봤다.

     "..네?"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곧바로 응할줄은 몰랐다. 아가씨는 말을 바꿔보았다.

     "그럼 제 호위는 어떤가요?"

     "그것도 좋습니다."

     "..."

     아가씨에겐 혼란이 찾아왔다. 이렇게 호의적이고 순순한 사람일줄이야.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면 다 받아들여줄 것 같다. 단어 하나가 머릿 속을 맴돈다.

     '그...그럼..그..나..나나나...남ㅍ...남편은..'

     맴돎이 맹렬했다. 속으로 혼자 질문을 하다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검투사가 의문스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가 뒤를 홱 돌아봤다. 그리고 거기에 서있던 집사에게 다그쳐 물었다.

     "뭐라구요?! 저..저녁 식사가 벌써 준비 되었다고요?!! 얼른 가야겠네요!!"

     아가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또 고개를 홱 뒤로 돌렸다. 그리고 검투사를 직시했다가 살짝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식사자리에 투구는 그.. 예의가 아닌데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검투사가 투구를 벗었다. 짧고 투박한 금발. 조금 흔하고 평범하지만 전사다운 다부진 얼굴. 이마에 남은 상처자국 때문에 생김새에 비해 인상이 강렬했다.

     "흠흠."

     아가씨는 헛기침을 하고 생각했다.

     '나..쁘지 않군요.'

     아가씨는 기쁜 발걸음으로 먼저 떠났다. 그리고 검투사는 하인들에게 드레스 룸으로 안내받았다.

     피냄새가 빠지지 않는 원래 복장을 벗은 검투사에게 처음에는 저택 하인들이 입곤 하는 정장이 권해졌다. 하지만 그의 굵은 팔뚝과 허벅지는 도통 맞아 들어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당장 재단을 하기엔 식사자리의 아가씨를 너무 기다리게 할 테고, 어쩔 수 없이 펑퍼짐한 비단 가운따위가 묶음끈을 잔뜩 써서 도복처럼 걸쳐 입혀졌다. 검투사는 금발을 가진 아라비안 검객같은 모습이 되었다.

     식사자리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보고 아가씨는 짧게 폭소를 터트렸다. 검투사가 멋쩍어 했다.

     "제 모습이 이상합니까?"

     "앟ㅋㅋ 아뇨 ㅋㅋ 아, ㅋㅋ. 크흠 흠. 웃어서 죄송해요. 너무 의외의 모습이라. 너무 잘 어울리는게 의외라서. 어, 음. 그래서요. 네.."

     ㅎㅎㅎ. ㅎㅎㅎ. 아가씨는 테이블에 차려진 파스타를 포크로 말면서 계속 실웃음을 지었다. 검투사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피부에 닿는 느낌부터가 한번도 입어보리라 여긴적 없는 재질의 천이었다. 어쩌다보니 임시로 차려입게 되었지만, 원래라면 그와는 인연이 없을 고급스러운 것. 어색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검투사는 아가씨를 따라 파스타를 들고 와인을 마셨다. 조금 이르게 이뤄진 저녁식사인 만큼 느긋하게 하고 나서도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고 있었다. 해질녘이었다. 아가씨가 물었다.

     "티타임 어때요?"

     "좋습니다."

     이젠 당연하다고 할만한 검투사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가씨가 살짝 웃으며 되물었다.

     "검투사도 티타임을 즐기나요?"

     "아뇨. 처음입니다."

     "그럼 어떻게 좋은 줄 알아요?"

     "아가씨의 권유는 무엇이든 좋아합니다."

     "음, 그래요? 흠흠."

     아가씨는 이 자식 근육질 싸움뇌인 주제에 말하는 뽄새가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사다운 시원스런 단호함이 사교적으로 좋게 작용해 보였다.

     티타임의 다과 자리는 2층 테라스에 준비되었다. 해의 산넘기가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다. 하늘 반대편에는 달이 떠있고, 온통 붉고 새파랬다. 복잡한 그림자가 투성이로 펼쳐진 정원을 내려다보며 검투사가 말했다.

     "정원의 모습을 보니 저것을 관리하게 되었어도 영광이었을거라 생각이 듭니다."

     아가씨의 장난스레 노려보는 시선이 왔다.

     "그래도 당신은 제 호위니까 말예요? 그런 욕심을 내면 안 돼요."

     아가씨의 말투에 살짝 취기가 어려있다. 식사로 마신 와인 탓인 모양이다.

     집사가 따라주는 홍차가 채 두잔째가 되기 전에 해가 산을 넘었다. 밤이 빠르다. 별들이 하늘 가득 찾아왔고, 검투사와 별 것 없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꺄륵꺄륵 웃던 아가씨가 문득 의자를 가볍게 밀고 일어났다.

     주변 걷기를 산책 하듯 했다. 검투사가 따라 일어나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테라스 난간에 멈춰서 살짝 걸터앉았다. 아가씨는 그대로 이것 보라는양 난간에 올린 엉덩이를 축으로 삼아 무대 위의 여배우처럼 빙글 돌았다. 치마가 무릎 살짝 위까지 펼쳐지며 빙글 꽃피는 흉내를 내었다.

     술기운 때문일까, 세상이 한번 휘청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투사의 두꺼운 팔뚝이 아가씨를 감싸안고 있었다.

     아가씨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몸이 어느새 난간 바깥으로 잔뜩 기울어 정원 위의 허공으로 비죽 튀어 나와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떨어지려는 그녀를 검투사의 한쪽 팔이 감싸안고 있었다.

     시선의 작은 틈으로 기겁한 집사와 안도하는 하녀들 몇몇이 보인다. 그리고 검투사의 다부진 가슴팍이 시야의 대부분을 매워온다. 이러고 있으니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고 있는 것인지 유혹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라고 아가씨는 생각했다.

     그리고 '호위다운 행동이야.' 라고도 생각했다.
     '기특해' 라고도 생각했다.
     '나쁘지 않아' 라고도 생각했고
     '..너무 좋아..' 라고도 생각했다.

     아가씨는 충동을 느꼈다. 이대로 검투사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냥 되는대로 해버리고 싶은 충동. 하지만 두 사람의 다과자리를 한발 물러난 거리에서 빙둘러 지켜보고있는 집사나 메이드들의 눈치가 보였다. 보나마나 아버지와 어머님에게 보고되겠지. 키스 같은 건 조금 곤란한 이야기가 될테고.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아버지와 어머님은 아가씨의 이런 행동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검투사는. 검투사는 오늘을 좋아해줬을까?

     파스타와 와인이 있는 식사를 좋아해줬을까? 사실 투기장 동료들과 고기를 뜯으며 맥주를 마시고 싶었던게 아닐까. 해질녘의 다과자리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운치같은걸 좋아해줬을까? 지금 쯤 술집에 가서 좀 더 공격적인 몸매를 가진 언니들의 계곡을 내려다보고 싶었던건 아닐까?

     "궁금해.."

     아가씨가 여전히 정원위의 허공에서 몸을 일으킬 생각이 없어보였기 때문에, 검투사는 그녀를 끌어당겨 바로세워주었다. 아가씨가 다시 말했다.

     "나 궁금한게 있어요."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검투사가 묻자 아가씨의 복잡한 질문이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형태로 튀어나왔다. 혹 어느 것도 즐겁지 않았더라도 그냥 다 행복해진 것으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취객의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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