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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는 '외부'와 차단되어있는 곳이다.
개인적 측면으로는 고단한 외부의 노동이 쉼으로 바뀌는 곳이기도 하고, 상처를 회복하기도 하며, 내부로의 깊이가 깊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생산적 측면으로는 기억과 데이터가 우선시되고, 부품이 모아지는 곳이며, 미래를 열기위한 이제까지의 역량을 모으는 곳이기도 하다.
게오르그 짐멜은 이러한 현대의 실내를 자본의 관점에서 개인의 보호장치가 되는 곳이자, 내면이 숨쉬는 곳이자, 외부에 대항하는 체력과 깊이를 선사하는 곳으로 보았고
발터 벤야민이나 건축 명장인 르코르뷔지에는 내부의 궁전을 쌓는 아르누보적 가치 충족 행위가 벌어지는 실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르누보에 대해 기술로 포위된 채 상아탑에 갇힌 예술의 마지막 탈출시도 라고까지 언급한 20세기의 실내를 벤야민은 산업화가 진전되는 국가일수록 고립화되고 개인화되며 구조화되는 경험을 인간에게 선사해주는 곳이라고 이야기했다.
현대의 대도시가 자본주의에 물들수록 어느 거리든 비슷해지고 있다.
역사의 서사는 수익화와 권리화에 단절된다. 내려다볼 기념비나 바닥의 슈톨퍼슈타인 -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박아놓은 독일의 집 앞 보도블럭 - 은 가격 방어요소가 되고 있다.
작금은 실내에서도, 야외에서도, 심지어 이동중에 걸으면서도 사각의 실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손바닥만한 틀에서 사실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 있기에 현실의 구조속에 오히려 갖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무한의 세계는 현실적 충돌을 피할 수 있거나 안식할 수 있거나, 또는 대체된 금전으로 도전이 일어나는 곳 - 새로운 실내가 되는 곳이다.
과거에 서로를 이어주는 곳에서 현실의 모든 실내적 경험을 대신하게 하는 요소로 바꾼 이, 스마트한 기기는, 이제는 인간과 같이 공존하는 Ai와 함께 한층 더 '무한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가 되었다.
인간은 눈으로 무한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여기서 일어나는 노동, 상처, 회복, 심연이 실제 육체적 자아의 성숙과 연결 될까?
또는 비판적인 입장의 벤야민처럼, 허상으로 치부하고 모든 단절이 진행되는 가상의 연결만 남는 곳일까?
빛의 속도로 전달되는 정보는 외부로부터의 공격, 외국의 침공과 같은 곳에서 빠른 안전망을 구축하게 할 수 있다.
대한외국인 타일러 라쉬도 이 시대는,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는 '안전한 세상' 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가장 빠르게 개인이 안전한 정보속에 사는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편안한 나라는 아니라고 한다. 인간적 연대 속의 희노애락은 미디어 콘텐츠 소재로만 남아 있어서, 현실의 개인은 너무나 외롭고 우울하게 비춰지는 것이다.
여기서 오유저인 나는 Ai의 시대, 새로운 실내-핸드폰 세상이 압제하고있는 지금의 인간에 대한 미래를 3가지 측면으로 예견될 수 있다 생각한다.
1. 스펙화되는 커뮤니티 - 전 세계 인류가 디지털 생활의 일상화로 현실에서의 거부를 맞이할 수 있다. 즉, 디지털화된 신용과 자격증명이 현실의 지구촌 어디든 바코드 인식을 유도하고 있는데, 심지어 모임이나 클럽에서도 사전 디지털로 배포된 바코드에 대해서만 초대와 입장을 허락하는 곳들이 늘어가고 있다. 현실에서 사람을 알아가고 소개를 하는 과정 대신, 디지털 스펙 증명을 통해, 처음 모이는 사교장소에도 입장 허락이 이루어지고 있다.
2. 핀테크 - 1번의 기저주의로써 요구되는 핀테크는 소셜 인프라로까지 작동하려하고 있다. 한국은 정말로 빠르게 은행간 또는 공인 인증을 통한 소셜 금융에 참여하게 유도하고 있다. 1번에서 요구되는 곳에서 소셜 등급은 이 기술로 인한 뱃지로써 자격증명은 마쳐질 것이다. 글로벌한 금융적 기술로는 해커, 암호화폐등과 결합되어 미국 국채, 또는 국가적 현금가치와 거래망을 한 발 앞서서 선점하고 있는데, 미국은 국채로, 중국은 물류로 줄다리기를 진행하고 있다.
3. 실물과 행동에 대한 가벼운 추앙 - 실질적인 현장의 행위와 행동은 정말로 더 가치를 띄게 될 것이다. 맛있는 요리를 하는 집은 이제 동네 아저씨만의 솜씨가 아니다. 전세계가 추앙을 할 수 있고, 'K-' 와 같은 흐름을 타면 세계적인 후원으로까지 연결된다. 디지털화된 자본은 서사나 전설 속에 숨겨있던 오브제를 금전을 통한 추앙을 '하게 만듦'으로써 실물과 행동을 '더 하게' 만든다. 라이브 방송은 이 문화의 가장 근접한 형태이다. 어쩌면, 아니 벌써, 벤야민이 보았던 아케이드 속의 '성-문화'는 이제 디지털 아케이드에서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요리든, 명품이든, 일회용품이든, 충분히 추앙하고나면, - 지금까지의 내가 직접 찾아가서 군침을 흘리고 동전을 깝짝거리며 깜냥질을 하며 살지 말지 고민하던것은 없이 - 소비품으로 박스에 담겨, 어쩌면 중독된 사람들은 박스를 뜯지도 않고 다음 콘텐츠 미디어에 또 추앙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몸집을 키우고 있다. 여기서 1ㅡ2ㅡ3은 밀접히 연결되어 커뮤니티를 구축하고 위계를 만든다. 여기서 테무, 알리 등은 저가시장에 포지션 되지만, 고가의 시장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앞으로의 세계 자본주의와 생산공장, 혹은 장인들은 생활 속에 이렇게 파고들 것이다. 중국의 일대일로는 여기서 승부를 걸 수 있고, 미국이나 세계의 극우단체 혹은 보호무역주의는 이것을 경계할 것이다.
당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처럼 느껴지더라도, 주체를 확립하는 순간, 바깥에서부터 존재를 환기하는 순간, 불현듯 데이터가 아닌 최후의 존재로써 '나'는 몸을 움직여야함을 깨닫게 된다.
세상의 개인에게의 재단은 늘 있어왔다. 여기서 '존재의 위치'를 먼저 결정짓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발' 이다.
알림창으로부터 개인을 계속 압제하려는 시도는 손가락에서보다 발걸음으로부터 환기될 수 있다.
어쩌면, 존재를 느끼게 하는 행위 - 눈을 감고 발을 계속 움직이는 것은 이 시대에 저항하는 첫번째 시작 행위가 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쩌면, 번민과 걱정, 위축되는 존재를 물리치고 세상을 품에 안고 극복하는 행위로써 '등산'이 강조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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