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br>몇년 전 이 맘 때, 아직 무더위가 가시기 전인 8월 초에<br>어느 고속버스터미널 2층의 매점에서 몹시 이상한 것을 본 적이 있다.<br><br>그것은 '얼은물 팝니다'라고 쓰여져 있는 팻말.<br><br>얼은 물이란게 대체 뭘까? 그 생소한 말에도 불구하고,<br>꼭 직접 매점 안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지 않아도<br>누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br>실제로 팔고 있는 건, 냉장고에 꽁꽁, 아니 아주 꽝꽝 얼린 생수.<br><br>1.<br>대체 왜? 얼은 물일까. 말할 것도 없이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된다. 얼은 물은 곧 얼음이다.<br>그런데 왜 '얼음'이 아니라 '얼은물'을 팔고 있는 것일까?<br>'얼음 팝니다'는 물리학적으로도 사전적으로도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일상언어로선 틀린말이다.<br>얼음과 '얼은 물'은 다르다. 왜냐하면 '얼음'이라는 상품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br>'얼음 팝니다'라는 말은 얼음장수를 떠올리게 만든다.<br><span style="font-size:12px;">얼음 톱으로 잘라 </span>수조나 아이스박스에 덩어리째 담아서 파는 각지고 커다란 통얼음.<br>요새야 얼음을 파는 얼음집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br>대학 축제때나 캠핑을 한다거나 하는 소소한 행사마다 꼭 자영업자가 아니라도 통얼음을 쓸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br>얼음을 판다는게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br>그렇기 때문에 '얼음 팝니다'라는 말은 상품으로써는 얼은 물과는 다른 것이다.<br><br>무엇보다, 매점에서 파는 것은 얼어있다고는 하지만 얼음이 아니다.<br>파는 순간에는 얼음이지만, 구매자가 소비할 때는 녹아서 물이 되었을 때인 것이다.<br>매점에서 파는 것은 얼음이지만, 구매자가 구매하려는 것은 물이다.<br><br>2.<br>그렇긴한데, 얼음이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이상하다.<br>우리가 마시는건 결국 물이긴 한데, 그럼 얼음물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br>매점 주인은 얼은물이라는 요상한 신조어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뭘까?<br><br>얼음물. 이 단어를 이미지로 떠올려 보자. 뭐가 떠오를까.<br>시원스럽게 투명한 유리컵 표면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물방울,<br>그리고 컵 속엔 한잔의 물과 그위에 동동 띄워진 각얼음.<br>아마 이런 이미지가 아닐까.<br>그렇다. 얼음물은 언 물이 아니라 '얼음과 물'이다.<br>얼음만 있어도 얼음물이 아니고, 물만 있어도 얼음물이 아니다.<br>물반 얼음반, 그것이 얼음물의 이상적인 상태 아닐까?<br>그렇다고 한다면, 매점에서 파는것은 얼음물 역시 아니다.<br>소비자가 소비하는 것은 물이지만, 매점에서 팔 때는 물기 한방울 없이 꽁꽁 얼어 있는 얼음이다.<br>그렇다. 매점에서 파는 것은 한여름의 열기를 뺏으며 천천히 녹아서 물이 될 얼음이지,<br>단지 얼음과 물을 더해 놓은 것이 아닌 것이다.<br><br>3.<br>물은 물인데 물이 아니다. 그렇기에 얼음도 아니고 얼음물도 아니고 '얼은 물'이다.<br>하지만 여전히 비문이다.<br>얼은 물을 굳이 바르게 쓰자면 '언 물'이 맞다.<br>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얼음이라고 쓰면 썼지, 언 물이라고 쓰지는 않기 때문에<br>얼핏 생각하면 무슨 말인가 싶을 정도로 낮선 말이 된다.<br>그래서 '얼다'의 어근을 살려 '얼은물'이라고 쓴 것이다.<br><br>이런 것을 보면 '얼은물 팝니다'를 쓴 매점 주인은 그렇게 뛰어나게 학식이 높은 사람은 아니다.<br>얼음도 아니고 얼음물도 아니고 언물도 안된다면,<br>굳이 맞게 쓰자면 '얼린 물'이라고 했으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br><div>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점 주인은 '얼은물'이라는 기묘한 단어로,<br>얼음집의 통얼음이나 각얼음을 띄운 얼음물과는 다른 또 하나의 개념을 구분해냈다.<br><br>4.<br>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궤변 같은가? 그렇다면 '빙수'라는 말을 생각 해보자.<br>빙수氷水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얼음물이다. 하지만, 빙수와 얼음물이 같은가?<br>팥빙수는 팥얼음물인가? 아니다. 얼음물에 팥을 올린다고 팥빙수가 되진 않는다.<br>빙수는 얼음을 곱게 갈아 놓은 것을 뜻하니까.<br>빙수와 얼음물은 같은 말이면서도, 다른 맥락에서 나온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말이다.<br><br>일상언어조차 맥락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세밀한 정보를 전달한다.<br>학자가 아닌 사람도 새로운 단어로 엄밀하게 구분된 개념을 창출한다.<br>때로는 이런 언어는 다른 맥락을 가진 사람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힌다.<br>'얼은물'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는 이와 같은 맥락을 생각하고 있지만,<br>과연 다들 그렇게 생각할까? '뭐야 이 병신은'하는 사람은 없을까?<br>내가 알지 못하는 또다른 '얼은 물'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까?<br><br>훨씬 더 복잡한 개념들을 다룰 때는 대체 얼마나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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