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이야기입니다.<br><a target="_blank" href="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anic&no=94642&s_no=94642&kind=search&page=5&keyfield=subject&keyword=%EC%83%A4%EC%9B%8C" target="_blank">샤워 중 사라지는 시간 1/3</a><br><a target="_blank" href="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anic&no=97480&s_no=97480&kind=search&page=1&keyfield=subject&keyword=%EC%83%A4%EC%9B%8C" target="_blank">샤워 중 사라지는 시간 2/3</a><br>그럼 이야기 시작합니다...<br><br>==<br>한달반 남짓 겪었던 그 특별했던 경험은 현정의 임신과 결혼으로 이어지는 굵직한 일들로 나의 기억 속에 묻혀졌다.<br><br>나는 그 때의 일을 무의식이 만들어낸 작은 해프닝 정도로 여겼다.<br><br>마치 우리가 매일 밤 꾸는 꿈 역시 우리의 무의식이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말이다.<br><br>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때의 일을 떠올일 사건이 벌어졌다.<br><br><br>==<br>현정은 나와 결혼식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아이를 출산했다.<br><br>우리 아들은 현정과 나의 바람대로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br><br>아들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교제하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br><br>우리 부부는 내심 손주를 보는 건가 싶었는데, 아들 녀석이 사고를 친 건 아니었다.<br><br>보육원에서 자란 여자친구에게 가족이라는 선물을 하루라도 빨리 주고 싶다는게 아들의 이유였다.<br><br>현정의 반대가 있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우리 부부는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br><br><br>==<br>아들 부부의 행복하던 신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br><br>며느리는 위암 판정을 받았고,<br><br>두번에 걸친 수술과 항암치료를 통해 병은 완치가 되는 듯 했다.<br><br>하지만 치료를 마칠 즈음 암세포가 다시 발견되었는데, <br><br>이번에는 암세포가 여러 장기에 전이된 상태라 병원에서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다.<br><br>결국 아들은 직장과 신혼집을 정리하고 우리집으로 들어와 며느리를 간병하기 시작했다.<br><br><br>==<br>한지붕 아래서 생활을 하다보니 나와 며느리는 많이 가까워졌다. <br><br>직설적인 성격의 시어머니는 불편했는지 며느리는 마음 속 이야기를 내게 종종 해주곤 했다.<br><br>사소하게는 아들과 연애할 적 이야기에서 시작해서,<br><br>어릴적 사고로 죽었다는 아버지에 대한 단편적인 추억들,<br><br>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을 보육원으로 보낸 어머니의 기억까지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 해주었다.<br><br>하루는 며느리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말을 꺼냈다.<br><br>“아버님,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br><br>“응? 무슨 부탁인데? 말만 하거라.”<br><br>“저…한번만... 아빠라고 불러보고 싶은데... 그냥 어릴적부터... 아빠하고 부르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서...”<br><br>“허허. 난 너를 항상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거 아빠가 조금 서운한걸.”<br><br>며느리는 작은 목소리로 ‘아빠’하더니 금새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br><br>나는 며느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br><br>“그래 우리딸 지연이 많이 힘들었지? 이렇게 바르게 자라줘서 고맙구나.”<br><br>며느리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br><br>“아빠......... 우리 하늘에서 만나면... 아빠는 나 버리지마.”<br><br>어린 시절 친모에게 버림받은 자식의 상처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br><br>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며느리를 말없이 안아주었다.<br><br><br>==<br>며느리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br><br>우리는 서울 근교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며느리의 마지막을 준비했다.<br><br>아들은 거의 24시간 며느리 곁을 지켰고, <br><br>우리 부부는 일주일에 서너번 병실을 찾았다.<br><br>어느 늦은 밤...<br><br>아들을 간병인 휴게소에서 눈을 붙이게 하고 나는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br><br>졸음이 쏟아져서 여분의 담요를 베개 삼아 간이 침대에 몸을 눕히는데,<br><br>담요에서 올라오는 섬유유연제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br><br>‘뭐지? 이 냄새!?’<br><br>그리고 나는 무언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을 둘러보았다. <br><br>오른쪽에... 커다란 창문 그리고 창을 가린 블라인드.<br><br>나는 창문 앞으로 가서 블라인드를 걷었다.<br><br>창문 가까이 뻗어난 나뭇가지가 어둠 속에 잔잔히 흔들리고 있었다.<br><br>습도를 맞춰둔 가습기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br><br>가습기 기계음 소리에 나의 심장 박동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br><br>서있기가 힘들었다.<br><br>의자에 앉아 떨리는 손을 올려 침대 위 담요로 가져갔다. <br><br>손에 느껴지는 담요의 감촉.<br><br>요동치는 심장은 언젠가 내가 이 병실 바로 이 침대에 누워있었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br><br>나는 침대 위 담요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br><br>그리고 나는 아내와 첫 관계를 가졌던 날 밤의 꿈을 기억해냈다.<br><br><br>==<br>나는 한참을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br><br>25년 전 흐릿한 기억들이 한조각 한조각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br><br>꿈 속에서 경험했던 죽음, <br><br>그리고 나의 임종을 지키던 남자.<br><br>아내를 만나기 시작하던 시절 겪었던 다중인격 증상.<br><br>아내가 해준 화장실에서 있었던 이야기, <br><br>그리고 지연이라는 이름.<br><br>머리 감겨주는 자아가 남긴 메세지.<br><br>혼란스러웠다. <br><br><br>==<br>다음날 아침 간병인 휴게소에서 누워있을 때 나는 아내의 떨리는 손길에 눈을 떴다.<br><br>아내는 한손으로 입을 막고 울고 있었다. <br><br>나는 허겁지겁 병실로 뛰어갔다. <br><br>담당의사는 간호사와 병실에서 나오며 나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지나갔다.<br><br>열린 문 사이로 아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br><br>내가 병실로 들어가려하자 아내는 뒤에서 나의 손을 잡아 끌었다.<br><br>나는 병실로 들어가는 대신 울고있는 아내를 기계적으로 안아주었다.<br><br>무언가로 쎄게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멍했다.<br><br>아내를 안은 채로 한참이 지나서야 꿈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br><br>사람 마음이란게 참으로 간사하다. <br><br>정신이 들자 며느리를 잃은 슬픔보다 아들 걱정이 앞섰다.<br><br><br>==<br>장례를 치룬 후 나는 아내에게 결혼 전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지 물었다.<br><br>잘 기억하고 있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br><br>아들이 훈련소에 입대하는 날, <br><br>며느리를 처음 만나자 마자 그때 일을 떠올렸다고 했다.<br><br>아내는 며느리가 부모 없이 자랐다는 이유로 아들 결혼을 반대했는데,<br><br>반대한 이유가 사실은 며느리의 성장 배경이 아니었다고 고백하듯 이야기했다.<br><br>며느리의 행동거지나 마음 씀씀이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br><br>말도 안되는 줄 알지만 며느리의 이름이 그렇게 마음에 걸렸다고...<br><br>그리고 며느리의 위암 판정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단다.<br><br><br>==<br>사십구제를 마치고 아들은 바람을 쐴 겸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br><br>아내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아들을 말렸다.<br><br>하지만 이튿날 새벽 아들은 마음이 정리되면 돌아오겠다는 짧은 메모를 남기고 사라졌다.<br><br>현정과 나는 불길한 예감에 오전 일찍 119에 신고했지만, <br><br>연락이 끊기고 24시간 전에는 실종신고 접수가 안된다 했다.<br><br>자살 정황이 있다는 거짓말을 보태 다시 신고를 했고, <br><br>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휴대폰이 꺼져있어 위치 추적이 안된다는 답을 들었다.<br><br>다중인격 증세를 보이던 시절 ‘육신을 떠나있어 기억을 못한다’는 메세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br><br>그래서 나는 바로 사설 흥신소에 아들 찾는 일을 의뢰했다. <br><br>30분이 채 안돼서 흥신소에서 문자 메세지가 왔다.<br><br>아들은 신용카드로 렌트카를 빌렸고, 빌린 차가 강원도 삼척시 외각 마을에 있다 했다.<br><br>화장한 며느리 유골을 뿌리기 위해 배를 구했던 곳이다.<br><br>삼척 방향으로 급하게 차를 몰고 가던 중 흥신소 직원에게서 아들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br><br>아들은 자동차 안에 번개탄을 피워놓고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br><br><br>==<br>우리 부부는 급히 아들이 옮겨진 병원으로 갔다.<br><br>아들은 일산화탄소 중독 치료를 받고 있었다.<br><br>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아직 의식이 없다고 했다.<br><br>그리고 10분만 늦었어도 살기 힘들었을 것이라 했다.<br><br>치료를 마친 후에도 아들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았다.<br><br>혼수상태가 2주를 넘어가자 의사는 아들을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br><br>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컴퓨터 단층 촬영과 뇌파 검사 등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다. <br><br>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깨어있을 때의 정상 뇌파가 규칙적으로 감지되었다. <br><br>의사는 코마상태에서 의식이 회복되고 있는 듯 하다며 우리 부부를 안심시켰다. <br><br>하지만 의사의 긍정적인 의견에도 혼수상태는 한달이 넘게 계속되었다.<br><br>그리고 한달반이 지나서야 아들은 의식을 되찾았다.<br><br><br>==<br>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회복이 되었을 때 <br><br>아들은 우리 부부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터뜨렸다.<br><br>죽은 아내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했다.<br><br>번개탄에 불을 붙이고 아내가 간 곳으로 보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고...<br><br>자신이 죽는다는 생각보다 아내를 찾아간다는 생각만 들었다고...<br><br>그리고 아들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했다.<br><br>“꿈에 지연이는 젊은 남자로 환생을 했어요. 그런 지연이에게 자주 찾아갔어요.”<br><br>현정이 물었다.<br><br>“그래, 지연이에게 가서 뭘 했는데?”<br><br>“머리를 감겨줬어요. 지연이 머리가 다시 자라면 머리를 감겨준다 했거든요. 그런데 거기는 오래 있을 수 없어서, 다시 병원 병실로 와서 내가 누워있는 모습도 보기도 하고...”<br><br>아들은 잠시 쉬었다가 이야기를 계속했다.<br><br>“처음에는 그 사람이 지연이라고 믿었는데... 한번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왜 그러냐고... 그래서 계속 그러면 안될 것 같아서...”<br><br>현정은 말없이 아들의 손을 잡아주었다.<br><br>“마지막으로 지연이 얼굴 보면서 작별인사 하고는... 잠에서 깼어요.”<br><br>현정은 아들을 끌어안았다.<br><br>“엄마… 미안해요.”<br><br>“아니야... 엄마는 네 맘 다 이해해. 우리 아들 많이 힘들었지?” <br><br>두 모자는 서로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br><br><br>—끝—<br><br>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br><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