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누구나 한번쯤은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눈을 뜬 경험이 있을 것이다.<br><br>지나치게 취해서 친구 집에서 잠이 들거나 엄청난 피로감에 기절하듯 잠에 빠져든 경우.<br><br>하지만 지금 내 상황은 분명 그런 단순한 상황은 아닌 듯 보였다.<br><br>적어도 차디찬 지하실에서 기억이 날아간 채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일리 없다. <br><br>게다가 주변에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다면 더욱더.<br><br>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 도망치고 싶었지만<br><br>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좀 더 침착해 지기로 했다.<br><br>우선은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br><br>내 이름? 박정훈. 이름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br><br>나이? 스물여덟... 아니 스물아홉. 그래 스물아홉이다. <br></p> <p>한참동안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딱 이정도 였다.<br><br>지금 상황을 비롯한 모든 것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br><br>난 정수리의 상처를 조심스레 만져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br><br><br><br><br>제법 큰 저택의 지하 창고인 듯 보였다.<br><br>창고로 쓰이는 듯 한켠엔 온갖 잡동사니 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br><br> 내 주변으로는 몇 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br><br>끔찍한 광경에 구역질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상황파악이 더 중요했다.<br><br>난 힘껏 숨을 들이켠 채 쓰러진 사람들을 관찰했다.<br><br>쓰러진 사람들은 총 네명.<br><br>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 한명.<br><br>스무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한명. <br><br>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한명과 40대 후반정도의 부인 한명.<br><br>나이도 성별도 다양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다들 나처럼 피를 흘리며 기절해있다는 것이다.<br><br>아니 어쩌면 기절한 것이 아니라 죽었을지도 모른다.<br><br>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볼 용기는 나질 않았다.<br></p> <p><br></p> <p><br></p> <p><br></p> <p><br></p> <p><br>피냄새를 맡지 않으려 애쓰며 이번엔 내가 쓰러져있던 곳 근처를 둘러보았다.<br><br>멀지않은 곳에 피가 뭍은 각목이 떨어져있었다.<br><br>내 기억을 날려버린 정수리 상처의 원흉이 저녀석 인 듯 했다. <br><br>나가는 문 역시 나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br><br>어쩌면 난 급히 이 방을 빠져나가려다가 뒤에서 공격을 받았는지도 모른다.<br></p> <p>정황상 누군가가 모종의 이유로 나를 포함한 이 사람들을 납치하고 기절시킨듯 했다.</p> <p>아직도 상황파악이 다 끝나지 않았지만 우선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br><br>밖으로 나갈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경찰에 신고 할 수 있다.<br><br>상황을 이렇게 만든 범인에게 들키지 않는다는 가정이긴 하지만 잘만하면 쓰러진 사람들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br><br>난 문이 잠겨있지 않기를 기도 하며 조심스레 굳게 닫힌 문으로 다가갔다.<br><br>그리고 잠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저항없이 열리는 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br><br>거친 철문 너머 위로 올라가는 투박한 계단이 보였고 계단의 맨 끝에서는 밝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br><br>다행히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br><br><br><br><br>내 생각대로 이곳은 어떤 저택의 지하실이 맞는 듯 했다.<br><br>계단을 다 올라오자 제법 신경 써서 꾸며놓은 거실이 보였다.<br><br>잠시 귀를 기울여 봤지만 특별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br><br>다행히 사람들을 납치하고 공격한 범인은 지금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br><br>익숙한 거실의 모습을 뒤로하고 난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br><br>‘잠깐.....익숙하다고?’<br><br>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집안을 둘러보았다.<br><br>고급져 보이는 카펫과 푹신한 소파. 장식부터 시작해서 벽에 걸려있는 그림까지.<br><br>처음보는것들이 아니다.<br><br>이곳으로 끌려오면서 눈에 들어왔다거나 하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br><br>분명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디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고 있다. <br><br>기억을 열심히 더듬어 봤지만 머리만 아플 뿐 더 이상은 떠올릴 수 없었다.<br><br>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 급한 일이있다.<br><br>난 고개를 강하게 휘젓고는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br><br>현관역시 이미 구조를 알고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찾아갈 수 있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밖으로 향했다.<br><br><br><br><br>밖으로 나오니 건물은 한적한 산 중턱에 위치해있었다.<br><br>아무래도 별장 개념의 건물인 듯 보였다.<br><br>주변에 건물은 없었지만 근처에 잘 포장된 도로가 있는걸로 보아 첩첩산중은 아닌듯했다.<br><br>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람을 찾기 위해 서둘러 도로로 달려갔다.<br><br>마을까지 거리가 제법 되겠지만 마냥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릴수도 없다.<br><br>게다가 범인이 내가 도망친걸 알고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br><br>최악의 경우 마을까지 뛰어갈 생각각까지 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br><br>저 멀리서 차 한 대가 내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br><br>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br><br>체력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는데 벌써 숨이 찬걸 보니 몸상태가 엉망인 모양이다.<br><br><br><br><br>차가 오길 기다리며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br><br>지하실에 쓰러져있던 사람들. 왠지 눈에익은 별장.<br><br>잠겨있지 않았던 문. 그리고 기억 상실증.<br><br>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br><br>분명 범인은 되는대로 사람들을 잡아와서 저 별장 지하실에 모아 놓았을 것이다.<br><br>그리고 흉기를 휘둘러 모두를 기절시키고 문조차 잠그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갔다.<br><br>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 <br><br>난 고민하며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br><br>상처투성이의 손. 단순히 저항하다가 생긴 상처가 아니다.<br><br>적어도 거친 각목을 수차례 휘둘러야 나올만한 그런 상처.<br><br>난 숨을 들이켜며 별장을 돌아보았다.<br><br>그러는 사이 멀리서 다가오던 차가 내앞에서 멈췄다.<br><br><br><br><br>“무슨일 있으세요? 도와드릴까요?”<br><br>선해보이는 인상의 청년이 창문을 열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br><br>피로 얼룩지고 엉망이된 내 상태를 보고 차를 멈춘 모양이다.<br><br>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별장과 내 손만 번갈아 쳐다보았다.<br><br>“어디 다치신 것 같은데 병원에 모셔다 드릴까요?<br><br>아니면 경찰 불려드려요?“<br><br>경찰이란 말에 난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br><br>“어? 저기 잠시만요.”<br><br>남자의 부름을 무시한채 난 있는힘껏 달리며 생각했다.<br><br>내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br><br>난 범인에게 공격당한 것이 아니다.<br><br>그저 희생자들의 저항에 부딪힌 것 뿐이었다.<br><br>어지러운 기억들 사이로 누군가의 머리를 내려치는 내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br><br>“아저씨! 조심하세요!”<br><br>귓가에 들려온 말에 고개를 돌릴새도 없이 귀가 찢어질듯한 경적 소리가 울리며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br><br><br><br><br>정신을 차려보니 구급차 안이었다.<br><br>어떻게 해서든 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지만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br><br>옆에서는 구급대원인 듯 한 사람이 무전기로 보고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br><br>“네. 교통사고입니다. 지금 의식은 없는 상태구요. 환자는....”<br><br>구급대원은 손에 지갑을 들고있었다. <br><br>아무래도 내 품속에 있던 걸 꺼낸 듯 했다.<br><br>“그러니까... 이름은 박정훈. 네. 54세 남성입니다. 주소는.....”<br><br> ‘54세?’<br><br>다시 희미해져 가는 의식너머 간신히 바라본 곳에는 지갑에 꽃혀 잇는 가족사진이 있었다.<br><br>내 기억보다 훨씬 나이가 든 내 모습과 내 옆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중년 여성.<br><br>그리고 우리의 양 옆으로 서있는 남학생과 여대생.<br><br>그제야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모든 것이 다 기억이 났다.<br><br>여름휴가. 큰맘 먹고 빌린 멋진 별장.<br><br>즐거워 하던 딸과 아들.<br><br>날 자랑스러워 하던 아내.<br><br>별장 지하에 쓰러져있던 그들이었다.<br><br>아무래도 난 내 상상 이상으로 긴 시간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렸던 모양이다.<br><br><br><br><br><br><br><br><br><br>지하실에서 깨어난 남자는 한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br><br>“젠장맞을.....”<br><br>경찰에 쫒기는 와중에 별장을 발견한 남자는 몸을 숨길 좋은 장소라 생각하며 문을따고 들어와 지하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br><br>하지만 갑작스레 별장안으로 들어온 가족에 의해 몸을 숨길 겨를도 없이 들켜버리고 말았다.<br><br>살인죄로 공개수배가 내려진 남자가 할 수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br><br>남자는 근처에 있던 쇠막대를 휘둘러 어린애 둘과 중년여성을 제압했다. <br><br>하지만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흥분하여 휘두른 각목에 머리를 얻어맞고 말았다.<br><br>남자는 정신을 잃기 전 발악적으로 쇠막대를 휘둘러 그 사람의 머리를 맞출 수 있었다.<br><br>남자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br><br>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br><br>마지막 일격이 큰 소용이 없었던 듯 경찰에 신고를 하러 갔거나 도움을 요청하러 간 것 같았다.<br><br>서둘러 도망치면 아직 가능성이 있을거라 생각한 남자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br><br>그때 뒤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br><br>머리에 피를 흘리며 일어난 중년의 여성 그리고 그 근처에서 움찔거리는 어린 두명.<br><br>남자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br><br>“내가 네놈들 때문에...”<br><br>남자는 자신의 옆에 떨어져 있던 쇠막대를 집어들고는 쓰러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br><br><br><br><br><br>By. neptunuse<br><br><br><br><br><br><br><br><br><br><br> PS. 소재를 주시고 호명을 해주신 '김치찌개는쨩' 님께 감사드립니다.<br>부족한 작품이지만 재미있게 봐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