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불합격입니다, 애초에 안 될 걸 잔뜩 기대하고 계셨다면 조금 죄송합니다.</div> <div>귀하는 인재가 아니니까 불합격이나, 굳이 위로해드리자면 우리와 맞지 않는 인재라 그렇다고 해드리죠.]</div> <div> </div> <div>" 아악! "</div> <div> </div> <div>길동은 고개를 휘휘 저은 뒤 화면을 다시 쳐다본다.</div> <div> </div> <div>[ 불합격입니다. 귀하의 인재성은 우수하나 저희 기업의 인재상과는 상이하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사료되어</div> <div>부득이 불합격 통보를 드리게 된 점 아쉽고도 죄송합니다. 그러나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라</div> <div>생각하며 귀하의 앞날에 건승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겠습니다. 소정의 사례비를 동봉하였으니 심심한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div> <div> </div> <div>" 지랄하네! 옘병! "</div> <div> </div> <div>참을 수 없단 듯이 괜히 책상을 내려치지만 아픈 건 자기 주먹뿐이다.</div> <div> </div> <div>" ... "</div> <div> </div> <div>전화를 들어 항의 전화라도 할 듯 노려보지만,</div> <div> </div> <div>" 하아... "</div> <div> </div> <div>결국 탓할 건 자기 자신뿐이다.</div> <div> </div> <div>노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야.</div> <div>점수가 모자라서? </div> <div>그럼,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거야.</div> <div>난 천재 아니잖아, 따라가느라 나 죽을 것 같아,</div> <div>공부하다 죽은 놈 없고 노력하다 죽은 놈 없다지만ㅡ,</div> <div>다들 '죽을 것 같은데', 같은데ㅡ... 같다는데ㅡ...</div> <div> </div> <div>길동은 이번 기업 채용에서 불합격할 경우 아무 일자리라도 구해서 반년 정도 돈을 벌겠노라 생각해둔 터였다.</div> <div>하지만 잔뜩 기대한 이번 결과마저 물거품이 되버리자 앞선 다짐은 이미 걸레짝 마냥 너덜거리고 있었다.</div> <div> </div> <div>" 몰라, 다 집어치우자, 어?! 뭘 더 어떻게 할까? "</div> <div> </div> <div>탈락할 때마다 '눈을 낮추라'는 배려 없는 조언이 갈수록 아파왔기에 그야말로 줄만 서면 들어갈 수 있는 일자리에 마저</div> <div>써놓은 이력서들을 마구 구긴 뒤 바닥에 던져버렸다.</div> <div> </div> <div>" 몇 번째냐고... "</div> <div> </div> <div>눈에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지만,</div> <div>차라리 하루 이틀 울고 위로 받고 나면 웃을 수 있었던 이전의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우울감이었다.</div> <div>길동은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그의 자존감은 이미 땅으로, 땅 속으로 꺼져들어가 멀고 먼 바닥의 아래, 또 그 아래에 흘러있었다.</div> <div> </div> <div>딩ㅡ동.</div> <div> </div> <div>귀에 들리지만 반응하지 못 한다.</div> <div> </div> <div>딩ㅡ동. 딩ㅡ동.</div> <div> </div> <div>" ...? "</div> <div> </div> <div>이번에는 초인종 소리를 알아챘는지 힘겹게 일어난 길동이 문 앞으로 다가간다.</div> <div> </div> <div>" 누구세요. "</div> <div> </div> <div>- 길동아, 나야, 나! </div> <div> </div> <div>" 누구신데요...? "</div> <div> </div> <div>문을 열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지 길동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div> <div> </div> <div>" 짜잔! 보고 싶었어, 길동아! "</div> <div> </div> <div>" 으아악! "</div> <div> </div> <div>발 끝에서 들려온 소리에 길동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자 눈에 들어온 건 초록색 덩어리였다.</div> <div>미끈매끈거리는 피부, 통통하고 길다란 꼬리, 당췌 들어본 적도 없는 생물ㅡ..</div> <div>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div> <div> </div> <div>" 나 둘리야! "</div> <div> </div> <div>" 씨, 씨팔. "</div> <div> </div> <div>그랬다. 둘리다.</div> <div>듣고보니 둘리였다.</div> <div> </div> <div>" 길동아, 너 생각보다 좋은 집에 사는구나ㅡ? "</div> <div> </div> <div>" 뭐.. 뭐야, 저게...? "</div> <div> </div> <div>길동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집 안으로 불쑥 들어가버리는 둘리.</div> <div>신난 듯 꼬리를 흔들대며 어느새 집을 둘러보고 있다.</div> <div> </div> <div>그러나 태연한 둘리와 달리 길동의 심장은 터져버릴 지경이었다.</div> <div>갑작스러운 방문, 게다가 방문객이 둘리라니.</div> <div> </div> <div>" 야. "</div> <div> </div> <div>조심스레 길동이 외쳐보자 둘리가 혀를 빼꼼 내민 채 길동을 쳐다보며,</div> <div> </div> <div>" 왜? 나 목 마른데 마실 거 없어? "</div> <div> </div> <div>" ... "</div> <div> </div> <div>탈락 메시지를 볼 때처럼 순간적인 착각인가 싶었더니 뻔뻔히 마실 것까지 달라는 둘리.</div> <div>그제서야 길동은 정신이 아찔해지며 어린 시절 매일 밤마다 빌었던 소원이 떠올랐다.</div> <div> </div> <div>' 내가 어른이 되면 둘리 같은 친구가 생기게 해주세요. '</div> <div>'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매일 매일 놀러 다니며 지구를 모험하고 싶어요 '</div> <div>' 저는요, 이름은 고길동이지만 둘리를 괴롭히지 않고 저희 집에서 같이 재밌게 살 거에요 '</div> <div>'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신님, 꼭 저에게 둘리를 보내주세요. '</div> <div> </div> <div>기적이라는 걸까,</div> <div>취업 하나도 지독하게 도와주지 않는 하늘이, 내 어릴 적 소원을 들어준 게 저 초록 괴물이란 말인가,</div> <div>징그럽다. 만화가 아니라 실사로 만난 둘리는 너무나도 징그럽다. 초록색 피부와 커다란 덩치,</div> <div>묘하게 사람을 닮은 생김새가 녀석을 더욱 이질적으로 보이게 한다.</div> <div> </div> <div>" 길동아, 마실 거 빨리 줘! "</div> <div> </div> <div>'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div> <div> </div> <div>쟁반 위에 쥬스 한 잔을 담아 가져오던 길동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div> <div> </div> <div>" 오우, 땡큐 베리마취. 길~똥. "</div> <div> </div> <div>편하게 누운 자세로 쥬스를 받아든 둘리가 곧장 쥬스를 핥아대고,</div> <div>길동은 화장실로 들어가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div> <div>유기견 신고센터를 검색한 뒤 전화를 건다.</div> <div> </div> <div>" 유기견 신고를 하려는데요. 여기 봉계동 테크로마트 앞 주택가요. "</div> <div>...</div> <div>" 아니에요. 제 개 아니에요. 근데 개가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꼬리가 좀 커요. "</div> <div>...</div> <div>" 예? 아, 아뇨. 개 맞아요. 개 맞는 거 같아요. 견종은 모르겠어요. 좀 데려가주세요. 불쌍해서 그래요. "</div> <div>...</div> <div>" 무슨 119에요, 물지는 않아요, 개가 크긴 큰데 성격은 순한 거 같아요, 저기요, 좀 데려가세요! 제발! "</div> <div>...</div> <div>" 네, 감사합니다. 빨리 와주세요. "</div> <div> </div> <div>' 누가 봐도 개는 아니지만 동물보호 센터에서 어떻게든 해주겠지.</div> <div>원래 내 식구도 아니고, 저런 걸 데리고 살 수는 없어.</div> <div>난 나 한입 먹여살리기도 벅차다고ㅡ.. 모은 돈도 다 떨어져가고.</div> <div>부모님께는 뭐라고 설명할건데? 결혼도 못 간 자식 걱정 때문에 잠도 편히 못 주무셔. '</div> <div> </div> <div>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div> <div>이성적으로 판단해야 극복할 수 있었다.</div> <div>둘리를 쫓아내야 한다.</div> <div>그렇지 않으면 둘리의 존재로 인해 일어날 일련의 사건들에 휘말리게 된다.</div> <div>둘리의 룸메이트? 만화 속에서 걸어나온 둘리와 함께 토크쇼도 나가고, 영화도 찍고,</div> <div>초능력으로 우주 여행도 하면서 살면 되는 걸까? 어릴 적의 꿈처럼?</div> <div>저기요, 신 나으리. 아니지, 신 씨발나으리.</div> <div>사람 소원 들어주려면 그간 떨어진 면접 중에 하나만 붙여줬어도,</div> <div>나, 차도 사고, 장가도 가고, 집도 사고 그냥 당신에게 원망없이 살아갔을거야.</div> <div>아니지, 감사하면서 살겠지, 매일 하늘을 향해 백 번 절도 할게.</div> <div>근데 이게 뭐야.</div> <div>둘리? 하하하..</div> <div>일억년전 옛날이 너무나 그립다는 저 놈 소원이나 먼저 들어줘서 지 애미나 만나게 해주지,</div> <div>왜 나한테ㅡ..</div> <div>왜 하필 나한테!</div> <div> </div> <div>화장실 안에서 생각 정리를 마친 길동이 마침내 거실로 나오자,</div> <div>둘리는 허락도 없이 냉장고를 열어놓은 채 빵을 꺼내어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div> <div> </div> <div>" 음냐음냐, 쥬스를, 마시니까, 쩝, 배도, 고파서! "</div> <div> </div> <div>... 어느새 둘리의 뒤에는 이불을 꺼내온 길동이 서있었다.</div> <div>곧장 둘리를 이불로 덮은 길동이 둘리를 꽁꽁 싸매려 했지만,</div> <div> </div> <div>" 길동아! 뭐하는 거야! "</div> <div> </div> <div>둘리의 완력이 생각보다 엄청 났기에 길동은 속수무책으로 나뒹굴 뿐이었다.</div> <div> </div> <div>" 으아악! "</div> <div> </div> <div>땅바닥에 내려꽂힌 길동이 아픔을 속으로 참아내며 다시 달려들었다.</div> <div>어떻게든 제압해서 동물보호센터에 보내지 않으면 언제 이 녀석을 떨쳐낼 수 있을지 모른다.</div> <div> </div> <div>" 길동아! 왜 이러냐구! "</div> <div> </div> <div>길동과의 계속된 힘씨름 끝에 발톱을 꺼내든 둘리가 길동의 얼굴을 할퀴어버렸다.</div> <div> </div> <div>" 갸아악. "</div> <div> </div> <div>길동은 얼굴을 감싸쥐며 뒷걸음질 쳤다.</div> <div> </div> <div>" 괘, 괜찮아? 미안해, 마법으로 낫게 해줄 수 있으니까... "</div> <div> </div> <div>둘리가 조심히 다가서자 다시 길동이 둘리를 넘어뜨렸다.</div> <div>이번에는 길동에게 한참이나 유리한 자세였다.</div> <div> </div> <div>" 케엑...! "</div> <div> </div> <div>길동의 두 손이 둘리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div> <div>있는 힘껏, 더 세게, </div> <div>그럴수록 둘리의 저항도 같이 거세졌다.</div> <div>휘두르는 꼬리가 길동의 등을 몇 번이고 망치질해댔다.</div> <div> </div> <div>' 제발 기절해라, 제발! '</div> <div> </div> <div>빠드득ㅡ.</div> <div> </div> <div>" ... "</div> <div> </div> <div>둘리의 목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div> <div>길동이 떨리는 손을 놓자 힘없이 둘리의 혓바닥이 늘어졌다.</div> <div> </div> <div>" 으... 으아... "</div> <div> </div> <div>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div> <div>모든 게 잘못되어간다.</div> <div>길동은 급히 휴대전화를 든다.</div> <div> </div> <div>" 전화.. 받아.. 빨리 받아.. 앗, 네. 아까 그, 유기견 때문에 전화했던, 네, 맞아요 네! "</div> <div>...</div> <div>" 아뇨, 안 오셔도 됩니다, 개 사라졌어요. 안 오셔도 됩니다. "</div> <div>...</div> <div>" 거의 다 오고 말고 간에, 개가 없어요, 처음부터 개는 없었어요! 장난전화였다고! "</div> <div>...</div> <div>" 장난전화였다고, 메롱, 메롱. 약오르지 까꿍. 이해 안 돼요? 장난이라고! 장난! 개 없다고! "</div> <div>...</div> <div>" 둘리야. 둘리! 둘리라고! 거짓말 같냐? 내가 미친 것 같아? 그래,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div> <div> </div> <div>" 허으으... "</div> <div> </div> <div>휴대전화를 집어던진 뒤 길동은 방 언저리에 주저앉았다.</div> <div>어릴 적 소원이 이뤄진 어느 행복한 날의 오후에.</div> <div> </div> <div>...</div> <div>......</div> <div> </div> <div> 어느새 밤이 깊었다.</div> <div>그러나 길동의 방 안에는 조명 하나 켜져있지 않다.</div> <div>건너편 으리으리한 빌딩에서 번져온 인공적인 빛만이 길동의 방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div> <div>그 덕분에 실루엣 두 개가 간신히 분간이 된다.</div> <div>조각상처럼 멈춰있는 두 그림자.</div> <div> </div> <div>길동의 생기 없는 눈동자는 차갑게 식은 둘리의 입가에 맺혀있는 핏방울을 바라보고 있다.</div> <div>아무 기력도 남지 않은 길동이 무심히 노래 부른다.</div> <div>귀 기울여도 듣기 힘들 작은 목소리로...</div> <div> </div> <div>쏙쏙쏙 방울 빙글빙글 방울 여기저기 내방울 내방울</div> <div>쏙쏙쏙 방울 빙글빙글 방울 여기저기 무지개</div> <div>파란하늘 많고 빨간하늘 많고 둥글둥글 내방울 내방울</div> <div>파란하늘 많고 빨간하늘 많고 둥글둥글 무지개</div> <div>이리저리 구름따라 마음대로 두리둥실 두리둥실 춤추며</div> <div>아름다운 꽃잔치에 바람타고 두리둥실 두리둥실 춤추며 와</div> <div>산너무 먼나라까지 바다건너 먼나라까지 이리저리 춤을춘다...</div> <div> </div> <div>길동은 담배를 입에 물려다 '퉷'하고 뱉어낸다.</div> <div>발 밑에 굴러다니던 이력서에 시선이 잠시 머무르더니,</div> <div>라이터가 엉뚱한 곳에 불을 붙인다.</div> <div>불이 옮겨붙는다.</div> <div> </div> <div>...</div> <div> </div> <div> " 하아! 상황 종료입니다. 불씨 하나 없어요. 다행히 유류나 전기 화재가 아니었네요. "</div> <div> </div> <div>소방관 김 씨는 같이 출동한 동료 장 씨 옆에 다가와 앉았다.</div> <div>주택가에서 발생한 방화, 그로 인한 화재 진압 작전에 투입된 그들이었다.</div> <div> </div> <div>" ... 피해자는 아마 집주인인 것 같고, 또 하나는 뭐야? 개는 아니던데. "</div> <div> </div> <div>" 글쎄요. 감식반도 당황하던데... 뭘까요. "</div> <div> </div> <div>" 아무튼 불이 빨리 꺼졌으니 다행이지 뭐. "</div> <div> </div> <div>" 형님, 저기 재 날리는 것 좀 보세요. 어디까지 가는 걸까요? "</div> <div> </div> <div>" 그러네. 불도 없고 바람도 없는데 희한하네. 저러다 달까지 가겠다. "</div> <div> </div> <div>" 멀리도 가네요. 에휴, 저게 별똥별이면 소원이라도 빌어볼텐데. 오늘 같이 사람 죽은 날엔... 그럴 맘도 안 들겠어요. "</div> <div> </div> <div>왠지 모르게 반짝이는 재가 그 끝을 가늠할 수도 없이 멀리,</div> <div>아주 멀리까지 날아가고 있었다.</div> <div>마치 은하수가 그러하듯이.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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