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다리 난간에 붙여진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br><br>‘많이 힘들었죠?’<br><br>피식하고 쓴웃음이 나온다. <br><br>난간 위에 조심스레 두 손을 올렸다. <br><br>차갑다. <br><br>나는 난간 위로 고개를 넘겨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br><br>시커먼 한강물이 흐르고 있다. <br><br>그리고 흐르는 물 위로 반사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br><br>반짝이는 불빛 때문인지 그리 차가워 보이지는 않지만.. <br><br>많이 차갑겠지? <br><br>문득 물이 차가울까 걱정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우스웠다. <br><br><br><br>내가 죽으면.. <br><br>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br><br>은우는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까? <br><br>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은우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br><br>“이런.. 미친..”<br><br>다시 쓴웃음이 나온다.<br><br>이 모양 이 꼴이니 사기나 당하는 거겠지. <br><br><br><br>은우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던 그 순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br><br><br>* * *<br><br><br>은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br><br>“이게 정말 전부야? 내가 이런 푼돈 챙기자고 지금까지 그 개고생을 한 거였어?”<br><br>“은우야, 너 말투가 갑자기 왜 그래? 아파트랑 상가 점포를 정리하면 장모님 치료비로 충분할 거라고 그랬잖아.”<br><br>나의 말에 은우는 비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br><br>“처음부터 이야기를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아파트에 대출이 물려있다고! 이게 어떻게 네 거야? 은행 거지. 안 그래?”<br><br><br>* * *<br><br><br>거짓이었다. <br><br>장모님이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말도, <br><br>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병원이 미국에 있다는 말도, <br><br>수술만 끝나면 다같이 미국에서 살자는 말도, <br><br>나를 대신해 혼인신고와 영주권을 신청했다는 말도, <br><br>모두 거짓이었다. <br><br>그때라도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br><br>어리석은 나는 그러지 못했다. <br><br><br><br>돈이 부족하다는 은우의 말에, <br><br>나는 신용대출과 제3금융권의 대출까지 받았고, <br><br>은우는 그렇게 준비한 대출금과 부동산을 정리한 돈을 모두 챙겨 사라지고 말았다. <br><br>나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녀의 실종 신고를 했고, <br><br>그때야 비로소 은우라는 이름조차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br><br><br><br><br>나는 다리 난간에 몸을 밀착시켰다. <br><br>난간 아랫부분을 밟고 올라가 상체를 난간 위로 살짝 넘길 수 있었다. <br><br>이제 난간을 집고 있는 양팔에 힘을 주어 몸을 넘기면 된다. <br><br>그래 후회는 없다. <br><br>다음생에 은우를 다시 만난다면.. <br><br>나는 또 속아줄 것이다. <br><br>그녀를 다시 내 품에 안을 수 있다면, <br><br>나의 품에 안긴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br><br>열 번, 백 번, 천 번이라도 기꺼이 속아줄 것이다. <br><br>다리 아래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읍조렸다. <br><br>“은우야, 사랑한다.”<br><br>이 말이 나의 마지막 말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죽음조차 두렵지 않았다. <br><br>양팔에 힘이 들어가자 몸의 무게중심이 난간 너머로 옮겨졌다. <br><br><br><br>“빵빵!”<br><br>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br><br>하얀색 고급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br><br>이내 비상 깜빡이가 켜지고 운전석의 문이 열렸다. <br><br>검은 정장을 입은 젊은 남성이 차에서 내려 나를 향해 외쳤다. <br><br>“김우진 씨?”<br><br><br>누구지? <br><br>처음보는 사람인데.. <br><br>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것일까? <br><br><br>그는 급히 달려와 나의 팔을 붙들었고, <br><br>정차된 승용차를 향해 나를 인도했다. <br><br>그는 뒷좌석 문을 열며 말했다. <br><br>“타시죠.”<br><br>“누구세요? 나를 어떻게 아는 거죠?”<br><br>“우선 차에 타시죠.”<br><br>그렇게 차에 올랐을 때, <br><br>운전석 뒤에 앉아있는 여성이 나를 향해 말했다. <br><br>“안녕하세요.”<br><br>“누구..세..”<br><br>남성이 운전석 문을 여는 순간, <br><br>차량 내부의 실내등이 켜졌고, <br><br>나에게 방금 인사를 한 여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br><br>“..!”<br><br>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br><br>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br><br>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br><br>그녀는 전혀 늙지 않았다는 것이다. <br><br>20대 초반의 앳된 얼굴 그대로였다. <br><br>“혹시.. 너.. 현정..이..니?”<br><br><br>* * *<br><br><br>20여 년 전. <br><br>그 당시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고, <br><br>현정을 처음 만난 곳은 내가 일하는 회사 앞이었다. <br><br>길을 잃었다는 그녀는 나의 설명에 고개를 저었다. <br><br>“잘 모르겠어요. 멀지 않으면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br><br><br><br>볼 일을 마친 그녀는 나에게 고맙다며 저녁을 같이 먹자 했다. <br><br>식사를 하며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br><br>그녀는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br><br>“현정이에요. 이현정.”<br><br>그녀는 다시 식사를 계속했고, <br><br>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br><br>“내 이름은.. 안 물어..봐요?”<br><br>그녀는 방긋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br><br>“제가 안 물어봤나요? 그쪽은 이름이 뭐에요?”<br><br>“김우진이에요.”<br><br>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듯 입을 열었다. <br><br>“어리석을 우(愚), 다할 진(盡)?”<br><br><br><br><br>우진(愚盡).<br><br>어리석음이 다하다, 라는 뜻의 이름이다. <br><br>내가 태어났을 때 용하다는 무속인에게 받은 이름이라고 한다. <br><br>무속인은 내가 현모양처를 버리고, 크게 사기를 당할 운명이라고 했다. <br><br>그래서 그런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말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br><br><br><br><br>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br><br>“제 이름 한자 뜻은.. 어떻게 알았어요?”<br><br>그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br><br>“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br><br><br><br>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br><br>우리는 모텔로 들어가 잠자리를 가졌다. <br><br>그래, 맞다. <br><br>그녀를 만난 첫 날 원나잇을 한 것이다. <br><br>그것도 만난지 단 2시간 만에..<br><br><br><br><br><br>그녀를 다시 만난 건 꼭 한 달이 지나서였다. <br><br>퇴근 시간. <br><br>회사 앞에 나타난 그녀는 그동안 잘 지냈냐며 환하게 웃었다. <br><br>내 앞에 다시 나타난 그녀가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는 나도 모른다. <br><br>그냥 그녀에게 끌렸다. <br><br>그녀는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고, <br><br>식당을 찾아 길을 걷던 중.. <br><br>그녀가 나의 팔을 잡아 끌었다. <br><br>그녀는 모텔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br><br>“나 좀 쉬고 싶은데..”<br><br><br><br><br>모텔방. <br><br>침대 위에서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br><br>콘돔을 집어드는 나에게 그녀가 속삭였다. <br><br>“나 오늘 안전한 날이야.”<br><br>한 달 전, 그녀는 같은 말을 했었다. <br><br>그때 그녀와 관계 후 내심 걱정이 되었던 터라 이번에는 콘돔을 쓰고 싶었다. <br><br>“그래도 이게 더 안전하니까..”<br><br>나의 말에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손 안의 콘돔을 집어 휴지통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br><br>“콘돔 없이 하고 싶어.”<br><br><br><br><br>모텔에서 나온 우리는 근처의 유명한 어묵 전문점을 찾았다. <br><br>나는 모듬 어묵탕과 어묵 김밥을 주문하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br><br>“소주도 한 병 같이 주세요.”<br><br>주문을 마치고 종원원이 뒤로 돌아서는데.. <br><br>그녀가 종업원을 다시 불러세웠다. <br><br>“사장님, 잠시만요.”<br><br>“네?”<br><br>“소주 잔은 하나만 주시고요, 대신 저는 사이다 하나 주세요.”<br><br>그렇게 주문을 마친 후, <br><br>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br><br>“미안.. 술을 못 마시는지는 몰랐어.”<br><br>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br><br>“못 먹는 건 아닌데.. 당분간 안 먹으려고.”<br><br><br><br>그날 그녀는 어묵을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br><br>우리는 대화를 거의 나누지 못했다. <br><br>이것이 20여 년 전 현정과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br><br><br>* * *<br><br><br>어두운 차 안. <br><br>현정이냐는 나의 물음에 그 여성은 살짝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br><br>당연히 현정일 리가 없었다. <br><br>처음 본 사람에게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br><br>운전석의 남자가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br><br>“상무님, 어디로 모실까요?”<br><br>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br><br>“많이 추운데 어묵탕 어떠세요?”<br><br><br><br><br>짭짤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어묵 국물을 입에 넣었다. <br><br>뜨뜻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비어있는 위장을 자극하자 그제서야 허기가 느껴졌다. <br><br>지난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br><br>어느새 입안은 군침으로 가득찼고, <br><br>나는 어묵꼬치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br><br>부드러운 식감의 어묵이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br><br>그렇게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중에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br><br>죽겠다는 다짐으로 한강 다리를 찾았는데, <br><br>지금은 어묵 맛에 감탄하며 배를 채우는 꼴이라니..<br><br>밀려오는 자괴감에 손에 들려있는 어묵꼬치를 앞접시에 내려놓고 말았다. <br><br>나는 고개를 들었고, <br><br>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br><br>아..!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구나..<br><br>나의 무안한 표정을 눈치 챈 그녀가 입을 열었다. <br><br>“어묵 좋아하시나 봐요?”<br><br>“...”<br><br>“제 태명이 뭔지 알아요?”<br><br>나는 입안 가득한 어묵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br><br>“우리 엄마가 날 임신한 날 어묵을 먹었는데, 그날 먹은 어묵 맛을 잊을 수가 없대요. 그래서 내 태명을 ‘어묵이’로 지었대요.”<br><br>“...”<br><br>“그런데 막상 나를 낳았는데, 얼굴이랑 온몸이 어묵처럼 쭈글쭈글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아하하하!”<br><br>그녀는 혼자 박장 대소를 하며 웃었고, <br><br>그녀가 웃음을 멈췄을 때 나는 물었다. <br><br>“그런데..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안 거죠?”<br><br>“회장님이 알려주셨어요.”<br><br>“회장님?”<br><br>“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천천히 하기로 해요. 어쩌면..”<br><br>그녀는 나를 향해 찡긋 웃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br><br>“어쩌면, 회장님이 직접 만나주실지도 모르니까요.”<br><br><br><br><br>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br><br>“박 실장님, 지난달에 회장님 지시로 준비한 아파트 아시죠?”<br><br>“네, 알고 있습니다.”<br><br>“그곳으로 가주시겠어요?”<br></p> <p> <br></p> <p> </p> <p> <br></p> <p> <br></p> <p>(다음편에 이어집니다.)</p> <p> <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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