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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mystery_9379
    작성자 : 다트 (가입일자:2021-01-29 방문횟수:6)
    추천 : 0
    조회수 : 1133
    IP : 121.55.***.39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21/01/29 12:27:48
    http://todayhumor.com/?mystery_9379 모바일
    단편) 월면의 구체성에 관하여
    옵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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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정적이 방 안을 가득 메우는 동안 유일하게 청각을 자극하는 효과음이었다. 그와 상담 시간을 가질 때에는 이런 일이 많다. 그래서 채훈은 이것에 이미 익숙해져있다. 그가 갑작스럽게 침묵을 유지할 때 그것은 상담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위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 ,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최근 불면증이 온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고 하셨죠, 가을 씨.”

    맞아요, 맞아. 불면증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죠.”

     

    가을이라고 불린 남자는 대화를 하는 도중 집중력을 잃거나 말수가 적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말수가 많아지기도 한다. 우울증 상태와 조증 상태를 오가는 그의 이런 행동 패턴은 가끔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을 가을 또한 충분히 인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행동 패턴을 고집하는 것은 -사실 고집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른다. 어디까지나 무의식의 층위에서 비롯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검고 깊은 그의 마음속 암굴에서 그의 자아가 숨어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채훈은 생각했다. 마치 원시인과 같이, 그의 자아는 동굴 속 깊은 곳에 자리를 잡아서는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곳에 칩거하고 있는 듯 했다. 채훈은 그런 그의 습관이 어딘가 모르게 마음에 들었고,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그의 말은 특별한 마술과도 같아서, 오직 조울증 환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낙차와 그 낙차에서 비롯되는 강한 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을 씨, 그러면 얘기해주실래요? 불면증이 온 이유에 대한 가을 씨의 의견을?”

    좋아요. 하지만 그 전에, 선생님, 한 가지 퀴즈를 내보아도 괜찮을까요?”

    퀴즈요?”

    .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드리는 문제에요.”

    그러죠, 그럼.”

     

    가을의 자아가 오랜만에 동굴을 벗어나 밝은 햇살을 받고 있다, 라고 채훈은 생각했다. 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그의 자아가 처음으로 하는 일은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그것으로부터 매력적인 수수께끼를 빚어내는 것이었다.

     

    지저분한 땅 속 지렁이가 어느 비가 오는 날 급하게 지하를 벗어나 바깥으로 나왔어요. 몇 주간 그는 지하로 돌아오지 않았고, 지렁이의 가족들은 그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애도했죠. 그런데 며칠이 지나고는 지렁이가 다시 땅으로 돌아왔어요. 그러고는 말하기를, ‘지상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어, 지하에 돌아오기 싫을 만큼.’. 그렇다면 지렁이는 대체 왜 지하에 돌아왔을까요?”

    ... 혹시 넌센스 퀴즈인가요?”

    그건 받아들이기 나름이에요. 선생님도 정답을 들어보면 고개를 끄덕이실 거예요.”

    그렇군요. 혹시 포식자가 너무 많아서였나요?”아닙니다. 힌트를 하나 드리자면, 오히려 포식자는 비를 피하느라 아무도 없었어요. 지상에는 나비와 풀벌레, 진딧물처럼 그의 친구들만 있었습니다.”

    채훈은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적절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적절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몇 달 간 가을을 내담하면서 파악한 그의 사고방식이나 말버릇 등을 채훈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어떤 결론을 내려는지 얼추 파악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인상을 구체화할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도저히 모르겠네요. 혹시 답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오늘 상담이 끝나면 모두 알려드릴게요.”

    좋아요. 이번 퀴즈는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돼요.”

    . 그나저나 이제 불면증의 이유를 알게 된 건에 대해서 얘기해야겠네요.”

    그렇죠.”

    아시다시피, 직접적인 원인은 밤에 떠오르는 달에 있어요.”

     

    몇 달 전 가을이 상담소를 찾아오면서 호소한 것은 불면증이었다. 불면증 환자가 인지상담치료를 받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상담 시 지켜야 할 것 몇 가지를 가을에게 가르쳐준 후 둘은 곧바로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을 시작한 지 며칠 만에 그들은 곧 공통적으로 합의할 만한 불면증의 원인을 발견했다. 그것은 월면()’이었다. 달의 표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달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 처음 채훈은 이 말을 듣고 약물 치료를 권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어 권유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내담자의 얼굴에서는 진지하고 진실된, 그리고 단순히 약물로 바뀌지 않을 월면에 대한 은유적이고 순수한 확신이 느껴졌다. 약물이 그로 하여금 월면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이 남자의 깊은 곳에서는 무언가가 변질되어버릴 것만 같았고, 그것이 채훈은 내키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직업윤리에 반하는 행동이었지만 채훈은 자신의 직관을 믿는 성격이었고, 이번 환자에게도 자신의 직관의 신뢰도를 걸어보기로 했다.

     

    가을이 묘사하는 월면은 어떤 젊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20대 초중반의 여성의 얼굴인데 구체적인 형상은 항상 볼 때마다 묘사가 달랐고 가을 자신은 그 묘사들 또한 옳지 않다고 말했다. 한 순간에도 수십 번씩은 그 생김새가 바뀌고, 그것들로부터 받는 인상들 또한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순간에는 선하고 순한, 마치 어머니처럼 자신을 보듬어주는 따뜻한 인상인가 하면 또 어떤 순간에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내치고 상처 입힐 것 같은, 사악한 악녀의 인상이라고 가을은 묘사했다. 채훈은 그런 가을의 묘사들을 기록하느라 고생했다. 왜냐하면 처음 그것에 대해 논의할 때에 가을은 적절한 표현을 찾느라 한 문장을 말하는 데에도 10 분씩은 기본으로 잡아먹었고, 그 때문에 종종 상담시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죠. .”

    달에 보이는 얼굴이 너무나 신경 쓰여서 잠을 자지 못하겠어요.”

    그렇게 말했죠. 하지만 그 달에 보이는 얼굴이 왜 신경이 쓰일까요?”처음에는 제가 알고 있던 누군가의 얼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저런 인상을 가진 사람을, 20대 초중반에 내게 중요했던 여자를. 그렇게 돌이켜봤더니 총 세 명의 여자를 떠올릴 수 있었어요.”

    달에 보이는 얼굴은 실존 인물의 얼굴이고, 그 얼굴의 정체로 추정되는 사람이 총 세 명이 있군요.”그렇죠... 잠깐 생각을 좀 해볼게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좋을지 쉽게 떠오르지 않네요.”천천히 생각하세요. 항상 그렇듯이 저는 가을 씨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차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은 이윽고 자신만의 세계로 다시 빠져 들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이따금씩 위를 향한다. 입은 오므린 채 앙다물어져 열릴 생각을 하지 않고 표정은 굳어져 마치 수심에 가득 찬 사람을 연상케 한다.

     

    가을이 말하기를, 그가 처음으로 얼굴들을 본 것은 1년 전 그가 술을 먹고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고 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뒤풀이 자리였다고 한다. 오랜만에 친구들도 다 모이고, 신입생들도 볼 수 있는 즐거운 자리에서 가을은 꽤나 과음을 했다고 한다. 술을 많이 마신 후 가을은 집까지 걸어가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가을의 집은 강변을 걸어 한강대교를 건너가야 하는 코스였다. 술에 취한 채로 약 10km 남짓한 거리를 걸어가려고 하자 처음에 친구들은 만류했지만 가을이 굳이 고집을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 때 가을은 한강변을 걸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날씨는 선선하고 밤공기가 맑고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채훈은 그 말에 동의했다. 평소에 가장 좋은 해장은 걷기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발걸음도 한결 가벼웠고, 기분도 좋았기 때문에 가을은 어떤 기분 좋은 예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분 좋은 예감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이었어요.>

    <그래도 시도라도 해 보시죠.>

    <잠깐만요... 그렇지. 마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의 고양감?>

    <고양감이라고요.>

    <, 고양감. 뻣뻣하게 긴장도 되고 설레어서 가슴이 간질거리기도 하는 느낌이었어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어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건 그 때였어요.>

    왜 그 때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본 걸까? 채훈은 그 후로도 계속 생각했다. 도무지 알 수 없어서 가을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가을은 그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채훈은 가을에게 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뭐라고 물어보아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채훈은 이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그를 부른 것이라고.

     

    실제로 월면이 그의 이름을 호명했고, 자연스레 그는 자신을 부른 사람을 돌아본 것이라고.

    그런 확신이 든 것은, 우습게도, 자신의 내담자의 눈이 너무나 맑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불면증 환자도 그토록 맑고 선명한 눈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만약 달이 자신을 호명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달이 가을을 호명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 남자의 말에는 마술적인 진실성이 느껴졌다. 가을의 말투에서, 또는 제스처에서 채훈은 마치 갓 세공된 렌즈와도 같은 투명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의인화와 은유를 수시로 사용한다. 의인화와 은유는 세상을 가장 멀리서, 동시에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때만 가능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토록 생생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것은 시선이 좁은 곳에서는 아무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는 것이 가까이서 보는 것 보다 아름답다고 말한 어떤 코미디언의 말처럼, 가을은 삶을 아름답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채훈을 자극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을에 대한 채훈의 고찰이 이어지는 동안, 가을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는 듯 채훈에게 물을 요청했다. 채훈은 그에게 500ml 생수병 한 통을 가져다주었고 가을은 한 번에 반은 마시고서 잠시 채훈의 뒤에 걸려있는 추상화를 바라보았다. 채훈은 함께 바라보았다. 이윽고 가을이 말을 열었다.

     

    아무래도 20대 초중반의 여자의 얼굴, 월면에 드러난 그 얼굴을 떠올리자니 제가 어디에선가 분명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생생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 없을 정도였거든요. 분명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어디에선가 본 얼굴을 계속 떠올리고 있고, 그 이미지가 제게 주는 내적 충격이 너무 커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요컨대 어떤 사건의 이미지가 가을 씨에게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와서 그것에 얽매이게 되어버렸다는 거군요.”

    그렇죠. 마치 고장이 나버린 비디오테이프처럼 계속 한 장면만을 반복하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큰 충격을 준 사람이 내 인생에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내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 누가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나요?”

    . 정확히는 사람들인 것 같아요.”

    사람들?”

    , 총 세 명입니다.”

     

    가을은 세 명의 여자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여자는 우희라는 이름의, 가을의 과 동기였다. 가을과 우희는 신입생 MT때 처음 만난 후 서로에게 호감이 생겼고, 조금씩 가까워지다가 어느 날 가을이 먼저 고백을 해서 사귀게 되었다고 했다. 흔한 레퍼토리였다. 채훈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가을이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대화에 집중하는 척 했다-. 왜냐하면 가을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너무나 정석적인 연애담이었고, 그래서 누구나 예상 가능하게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십 여 분을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던 가을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왜 그러시죠? 괜찮아요?”...”

     

    잠시 그는 말을 곱씹으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채훈은 그의 입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을 기다리며 참았다.

     

    잠깐, 아까 전의 퀴즈의 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그렇군요.”

    아무튼, 그렇게 잘 지내던 우리는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우희 쪽에서요.”

     

    어느 날부터 가을은 우희와의 연락이 잘 안 되기 시작했다. 전화나 메시지를 보내면 답장이 늦거나 아예 답을 하지 않았다. 가을은 우희의 주변인들에게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다들 잘 모르거나 어영부영 답을 흐릴 뿐이었다.

     

    그 때였어요. , 우리는 끝났구나, 라고 직감한 건.”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뒤로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느 날 캠퍼스에서 다른 남자와 손을 잡고 있는 우희를 발견했고, 그 자리에서 저는 이별을 선언했어요.”

    큰 충격이었겠군요.”

    이별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큰 충격을 받지 못했어요. 오히려, 너무 예상한 범위 안의 일이라 무덤덤할 뿐이었어요. 하지만 제가 충격을 받은 부분은, 제 순수함이 부정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에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는 공부만 하고 다른 재주는 하나도 없던 제가 처음으로 공부 외에 다른 것을 시도한 게 우희와의 첫 연애였어요. 그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경이 우희의 바람으로 인해 산산조각 난 것 같았어요.”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가을 씨의 믿음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도난당한 셈이군요.”

    그 표현이 정확한 것 같아요, 선생님. 제 믿음을 누군가가 도둑질해간 사건이었어요. 그 때 이후로 저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었어요. 그보다는 좀 더, 뭐랄까, 정신적인 사랑보다는 육체적인 사랑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그 부분은 가을 씨가 좀 더 설명해주면 좋겠네요. 두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정신적인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완벽한 둘 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시작하는 사랑이에요. 반면 육체적인 사랑은 그런 가능성은 배제한 채, 오로지 현실적으로 오고 가는 피드백으로만 구성되는 사랑이에요. 저는 우희와의 이별 이후로 전자는 허망하고 후자가 리얼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시다시피, 리얼한 게 허망한 것보다 옳고 유익하잖아요?”

    사고의 극적인 전환이 일어난 거로군요.”

    . 그리고 바로 그 전환점에서 제게 큰 충격을 준 두 번째 여자가 등장했어요.”

     

    두 번째 여자의 이름은 채인 이었다. 채인은 가을이 우희와 헤어진 직후 가입한 과 동아리의 1년 선배였다. 동아리의 선배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던 가을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소개해준 것을 계기로 하여 가까워진 사이였다. 1년 선배였지만 나이는 동갑이었기에 가을과 채인은 쉽게 가까워졌고, 많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점점 친근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다가 가을이 채인의 자취방에서 놀다가 자고 간 이후로 가을은 채인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방적인 호감이었고, 가을에 대해 채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가을은 얘기했다. 물론 -우희와 있었던 일과 마찬가지로, 채인과의 얘기에도 나름의 풋풋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 이야기에도 채훈은 그렇게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가을이 겪었을 또 다른 사건의 극적인 전환이 언제 일어날지를 충분히 조심스럽게 기다릴 뿐이었다.

     

    짝사랑이었군요.”

    . 짝사랑이었죠.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갔어요.”

    무슨 일이 있었죠?”... 같은 동아리의 2년 선배가 채인에게 고백했고, 둘이 사귀게 되었어요.”

    저런.”

    이번에는 우희 때와는 달리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어요. 실제로 사귀었던 사람도 아닌데, 그 사람을 놓쳐버렸단 생각이 너무 분하고 견딜 수 없었어요. ... 질투심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어요.”

    왜 질투심을 느꼈다고 생각하세요?”

    ...”

     

    이번에도 가을은 자신만의 적절한 언어를 찾기 위해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했다. 문득 채훈은 그와의 상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앞으로 20분 남짓, 과연 그 안에 가을이 채인과의 남은 이야기와 다른 세 번째 여자, 그리고 수수께끼의 답을 다 말해줄 수 있을까? (이 느림보가?)

     

    문득 밖을 보았다. 가을이었다. 눈으로 보아도 서늘한 바람이 창문을 몇 번 건드리고는 지나간다. 상담소가 있는 벽돌 건물의 밖으로 많은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다니는 것이 보인다. 채훈의 상담소는 대학가와 가까운 곳에 있다. 가을과 같이 연인 문제로 인해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들이 오는가 하면, 진로 문제, 가족 문제, 범죄 피해 등으로 인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문제로 많이 지친 탓에, 그것을 직시하는 데에만도 몇 달은 걸린다. 그 몇 달 동안 자신의 상처들에 연고와 반창고를 바르는 일만이 진행될 뿐이다. 하지만 가을은 전혀 다른 내담자였다. 불면증이라는, 다소 심각한 증세를 겪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문제를 계속 직시했으며 그것을 월면이라는 소재로 구체화할 줄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월면의 정체를 스스로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는 와중에 채훈이 들인 노력은 하나도 없었다. 채훈은 그 점에서 가을에 대한 관심을 쉬이 접을 수 없었다. 그와 하는 모든 대화에 집중하고 -직업적인 관심 이상으로- 그의 이야기에 동조하기도 했다.

     

    , 질투심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해요.”

    그렇군요. 어떤 이유였나요?”

    아무래도 좌절감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좌절감.”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아이 같은 비유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는데, 어린애가 장난감을 갖고 싶다고 부모님께 계속 졸라요. 언제는 밥을 안 먹으면서 조르기도 하고, 언제는 용돈을 안 받으면서 조르기도 하고, 또 언제는 떼를 쓰면서 조르기도 하죠. 하지만 어떤 짓을 해보아도 결국 부모님은 그걸 사주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는 최초의 좌절감을 맛보고, 그것 때문에 이전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거예요. 분노, 질투, 절망 따위의 감정들을 말이죠.”방금 비유를 돌이켜보면, 아이는 가을 씨고 장난감은 채인 씨군요.”

    그리고 좀 더 생각해보면 저는 단순히 채인 이라는 사람 이상의 무언가를 바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물리적인 것 이상의 무언가. 요컨대... ... 이번에는 단어가 바로 떠오르네요. 제 가슴 속의 비어있는 공간을 빈틈없이 채워줄 것만 같은, 하지만 실체가 있는 어떤 관념을 바란 것 같아요.”

    실체가 있는 관념.”

    우희가 떠난 이후로 제가 바랐던 육체적인 사랑, 피지컬한 피드백이 존재하는 관계를 채인에게서 바랐어요. 그녀를 보고 있자면 그런 확신이 들었거든요. , 이 사람은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와 제가 처음으로 만난 이후로 저는 동굴 속의 보물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그게 사랑인지 몰랐지만. 하지만 제가 그녀를 짝사랑하고부터는 어떤 가능성이 완전히 전복되었어요. 제가 그녀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 저는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나는 왜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곧 결론을 내릴 수 있었어요. 우희와의 관계가 끝날 때, 나는 모든 것들의 끝을 보게 된 것이라고. 채인이 물리적인 실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녀에게도 필연적인 끝이 있다면... 또는, 채인과 나의 실체가 있는 관계가 끝이 있는 거라면...”

    ,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가치해진 거였군요.”

    그 말이 적절한 것 같군요. 말하자면 저는 조루가 된 거에요. 모든 것의 끝이 너무 빨리 그리고 직관적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어요. 저와 선생님의 대화도 15분 뒤에 끝날 거고, 언젠가 저와 선생님의 상담도 끝이 날 거에요. 물론 저의 불면증도 언젠가는 끝날 거고, 월면도 언젠가는 없어질 거에요.”

    그런 생각은 너무 비약이 아닐까요? 어쨌든 끝까지의 과정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중에 없어질 거라면 지금 바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가능성들 속에서 과정은 무의미해질 뿐이에요.”

     

    채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 속에 가을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가을 씨의 논리에는 한 가지 난점이 있어요.”

    난점이라고 한다면, 어떤?”

    가을 씨의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가을 씨에게 세 번째 여자는 존재할 수 없어요. 모든 관계가 무의미해진다면, 가을 씨에게 우희 씨나 채인 씨 만큼의 충격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가을은 잠시 채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채훈은 머쓱해져서 뭔가 다른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가을의 침묵이 시작된 것이었고, 따라서 채훈은 불필요한 말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채훈은 생각했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고 무의미한 걸까? 물론 머릿속에 답은 이미 도출되어 있다. 무의미하지 않다. 왜냐하면 결과만큼이나 과정은 중요하고, 따라서 -가을의 논리를 따른다면- 설령 모든 결과가 무의미하더라도, 그의 논의에서 배제된 과정들에서도 의미가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채훈은 어떤 반성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연 내가 아는 답은 올바른 답인가?’ 왜냐하면, 가을과 채훈이 어떤 답에 직면한 과정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채훈은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상담사로서 활동하기 위해 석사와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따라서 모두에게 인정받는사람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는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지식만을 습득했고 남들에게 인정받아야만 먹고 살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로 인해 그는 남들의 인정이라는 시스템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가을은 그 시스템의 범주를 벗어나는 인물이다. 그의 모든 묘사 -월면, 불면증, 신원 미상의 여자, 우희 그리고 채인- 는 오롯이 그의 경험에서만 비롯된 그의 인상이었다. 그는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지식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 점에서 난감함을 느꼈다. 인정받을 수 없는 지식은 거짓인가? 그의 묘사는 거짓인가? 그의 모든 인상과, 불면증과, 월면의 여인에 대한 목격담은 모두 거짓이어야만 하는가?

     

    상념에 잠긴 새 가을의 시선은 채훈을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저처럼 묵상할 때가 있군요.”, 죄송합니다. 잠시 집중력을 잃어서.”

    그나저나 선생님,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무엇을?”세 번째 여자에 대한 해명과, 수수께끼의 답에 대한 설명.”. 수수께끼는 다음 내담 때 설명해주세요. 우리는 상담에 집중하는 것이 원칙이니까.”그렇군요.”

     

    가을은 못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나름 문제에 공을 들였던 모양이다.

     

    아무튼 세 번째 여자에 대한 해명을 하자면, 이런 거예요. 레이싱 카를 전문적으로 몰던 드라이버가 몇 차례 사고를 겪고 자신감이 떨어져서 은퇴를 했어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레이싱에 대한 열망이 있고 그걸 실현하기 위해 눈과 팔과 다리도 항상 준비되어있어요. 그건 이미 몸이 마음의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눈, , 다리가 아무리 잘 준비되어있더라도 그건 신예 드라이버들과는 상대가 안 되는 나약한 피지컬이에요. 그래서 그는 그의 자식 또는 손주들에게 점차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기 시작한 거예요. 처음엔 장난감 차를 사주는 걸로, 그 다음엔 경기장에 함께 데려가는 것으로, 그리고 기어이 드라이빙 아카데미에 그를 입단시키는 걸로.”항상 그랬지만 이번 비유는 유독 짠하네요.”

    불면증 환자의 상상력은 단출해요.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그렇군요. 그래서 어떤 일들이 있었죠?”

     

    세 번째 여자의 이름은 아영이었다. 아영은 가을의 과외학생이었다. 나이는 18살에서 멈춰 버렸다고 한다. 이유는 그녀가 18살의 마지막 날에 학원 건물에서 투신했기 때문이다. 왜 투신했는지, 해야만 했는지 가을은 많은 고민을 했다. 아영이 가을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고민의 원인이었다. 그 표현은 누구라도 헛갈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은근한 직접성을 갖추고 있었다. 아영은 가을이 과외를 하러 오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서 인사를 했고, 그가 과외를 맡기 시작한 이후로 잘 하지 않았던 숙제도 열심히 했고, 과외가 끝나고 지하철역으로 향할 때면 항상 산책을 핑계로 함께 걸어 다니며 수 없이 많은 고민 상담도 했다. 상담을 요청했던 고민의 내용은 삶의 이유에 관한 것이었다. 삶에 목적성이나 방향성, 심미성도 없는 상태에서 삶은 무슨 이유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매우 많이 가을에게 던졌다 -, 가을이 묘사한 그녀의 대부분의 질문들을 압축할 수 있었다. 가을은 참으로 난감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러한 질문들이 모두 그녀의 배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너무 뻔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수성이 풍부한 그녀에게 어떤 답을 적절하게 해야만 그녀의 수준에서 만족스러울지 가을은 항상 고민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항상 답이 내려지지 않는 고민 상담의 끝에 지하철역에서 가을을 배웅할 때, 아영이 그의 손을 잡았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을 잡은 상태로 1분을, 2분을 보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을이 그녀와 마주잡은 손을 떼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지하철역으로,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도망가듯 뛰어 내려갔다.

     

    그 때 저는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나를 좋아해준 사람은 아영이 처음이었다고.”우희 씨는요?”

    우희는 나를 좋아한 게 아니었어요. 그건 그저 모든 갓 성년이 된 어린 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감정적인 범죄의 일종이었어요.”그렇군요.”그렇게 그 날이 제 과외의 마지막이었어요. 어느 날 아영의 부모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아영이 더 이상 과외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고, 앞으로는 주변의 학원에 다닐 거라고 했어요. 그 학원은 누구라도 들으면 알 만한 유명한 입시학원이에요. 저는 걱정이 되었어요. 그 학원은 우리나라에서 1, 2등을 앞다투는 대학교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만이 다니는 어렵기로 소문난 학원이었거든요. 그 학원에 들어가 버리는 순간 아영이 부서져버릴 거라고, 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하지만 부모님께 그 사실을 말하지는 못했군요.”말했어도 뭔가 바뀌지는 않았을 거예요. 모든 것은 아영의 뜻이었고, 제가 손을 놓았던 그 날부터 나는 아영을 볼 수 없었을 거예요.”

    어느덧 상담 시간이 다 되고 다음 내담자가 방에 들어올 차례여서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가을과 채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고치고 짐을 챙겼다. 배웅을 하는 채훈에게 가을은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문으로 다가갔다.

     

    , 맞다. 선생님께 해야 할 말이 있어요.”뭐죠?”월면은 너무 외로웠던 거예요. 그래서 자신을 바라봐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죠. 이게 수수께끼의 정답이에요.”

    잠깐, 그건 무슨 뜻이죠?”

     

    가을은 사이 즈음에 성큼성큼 문을 나섰다. 채훈은 속이 복잡해졌다. 오늘만큼 상담이 진전을 보인 적도 없었고, 수많은 에피소드를 다룬 적이 없었다. 비정상적일 만큼. 그래서, 그는 가을을 다시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만 해버렸다.

     

    가을은 다음 주 상담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채훈은 그가 그리워졌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불면증이 다 나았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지렁이가 왜 지하로 돌아갔는지, 왜 월면이 나타났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채훈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렁이는 외로워서 지하로 돌아갔다고. 그게 채훈의 짧은 생각이 닿을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그렇게 하면, 월면이 외로웠기 때문에 자신을 불렀다는 가을의 힌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은 그 동안 채훈이 가을에게 바랐던 심미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답을 내린 후에도,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만 했다.

     

    가을 낙엽이 지는 날이었다. 채훈은 TV를 보았다. 뉴스 채널이었다.

     

    “... 다음 소식입니다. 서울 용산구 한 정신병원의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투신해 지나가던 행인을 덮쳐서 두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

    꿈을 꾸는 듯 했다.

    그 다음 채훈이 들을 수 있는 것은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뿐이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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