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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새 빛
얼마만한 아픔이 그 속에 있었을까
손가락 내밀어 살결 만지면
가만히 떨림으로 응답해 오는
들꽃에게 머리 숙인다
언 땅에 갇힌 채 제 모습 드러내지 않고
열매 같은
따뜻한 이의 마음 같은
꽃송이 피워 올린 뿌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가만히 귀 대어보면
물 긷는 꽃들의 두레박 소리
길어 올린 물들이 졸졸거리며 줄기 속을 달려가는 소리
햇살을 맞이하며 활짝활짝 생명이 문 여는 소리
남은 날은 얼마일까
가려 있던 마당에 가득한 새 빛
홍영철, 흐르는 것
시간이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또 아침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늙는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시간은 흐르는 것일까
시간은 저 혼자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시간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흘러서 자꾸만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장경린, 그게 언제였더라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단골 약국의 친근한 약병들
검은 열차들
작은 집과 다리와 먼 산
나를 스쳐 지나가는 젊은 풍속과 늙은 불안감들
욕망들 시와 담배 연기로 지워버린
가랑비 웅덩이에 고인 빗물
그게 언제였더라
갈매기들이 해안 초소에서 튀어나오던 저녁
해물탕 꽃게 다리를 빨아먹던 저녁
작은 하늘에서 큰 눈이 쏟아지던 날
자신의 일기에 밑줄을 그으며
낯설고 기뻐서 술병을 따던 저녁
황지우, 망년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 뒤편 미루나무 숲으로
가시에 긁히며 들어가는 저녁 해
누가 세상에서 자기 이외의 것을 위해 울고 있을까
해질녘 방바닥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는 자도 있으나
이제 얼마나 남았을꼬
아마 숨이 꼴깍하는 그 순간까지도
아직 좀 더 남았을 텐데, 생각하겠지만
망년회라고 나가보면 이제 이곳에 주소가 없는 사람이 있다
동창 수첩엔, 벌써 정말로 졸업해버린 놈들이 꽤 된다
배 나오고 머리 빠진 자들이
소싯적같이 용개치던 일로 깔깔대고 있는 것도
아슬아슬한 요행일 터이지만
그 속된 웃음이 떠 있는 더운 허공이 삶의 특권이리라
의사 하는 놈이, 너 담배 안 끊으면 죽는다이, 해도
줄창 피우듯이 또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 잊는다
마종기, 그림 그리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겨울같이 단순해지기로 했다
창밖의 나무는 잠들고
형상(形象)의 눈은
헤매는 자의 뼈 속에 쌓인다
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빈 들판같이 살기로 했다
남아 있던 것은 모두 썩어서
목마른 자의 술이 되게 하고
자라지 않는 사랑의 풀을 위해
어둡고 긴 내면(内面)의 길을
핥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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