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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슬픔에게
슬픔이여 오늘은 가만히 있어라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땅을 치며 울던 대숲도
오늘은 묵언으로 있지 않느냐
탄식이여 네 깊은 속으로
한 발만 더 내려가
깃발을 내리고 있어라 오늘은
나는 네게 기약 없는
인내를 구하려는 게 아니다
더 깊고 캄캄한 곳에서 삭고 삭아
다른 빛깔 다른 맛이 된 슬픔을
기다리는 것이다
김명인, 너무 무거운 노을
오늘의 배달이 끝났다
방죽 위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저무는
하늘을 보면
그대를 봉함한 반달 한 장
입에 물고 늙은 우체부처럼
늦 기러기 한 줄
노을 속으로 날고 있다
피멍 든 사연이라 너무 무거워
구름 언저리에라도 잠시 얹어놓으려는가
채 배달되지 못한
망년의, 카드 한 장
정호승, 젖지 않는 물
나는 젖지 않는 물이다
봄이 와도 뿌리에 가닿지 못하고
지금까지 젖지 않는 물처럼 살아왔다
오늘은 소년인 양 신나게 물수제비를 뜨다가
무심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용서했으면 때리지 말고
때렸으면 용서하지 말라고
강물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나는 저벅저벅 강물 속으로
젖지도 않은 채 걸어들어간다
물은 딱딱하다
젖지 않는 물은 늘 딱딱하다
딱딱한 물을 헤치고 청둥오리 한 마리
웃으면서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청둥오리가 평생 자맥질을 하며 이끄는 길
그 푸른 물의 길은 어디인가
청둥오리는 끝내 나를 데리고
물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저 멀리 강둑 위에
용서할 사람과 용서받을 사람의
그치지 않는 싸움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강둑의 나무들이 칼집에 칼을 꽂지 못하고
칼을 든 채 울고 있다
잊을 수는 없으나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거짓을 위하여 더이상
목숨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청둥오리의 손을 놓고
등 뒤에서라도 더욱 너를 껴안기 위하여
자맥질을 하면서 딱딱한 강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감태준, 아름다운 나라
거기가 어디지?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거기
우리 손 잡고 찾아갔다 번번이
길을 잃고 돌아오는 거기
눈 감으면 불쑥
한 발자국 앞에 다가서는 거기
신달자, 얼음신발
가을이 그를 데리고 갔다
안간힘으로 겨우 발목을 덮었던
이 세상의 가장 따뜻한 옷깃 한 자락
하필이면 가을은 더는 구할 수 없는
내 심장 한쪽을 가져갔을까
대신 얼음신발 하나 두고 갔다
그것을 신고 앞으로 나 미끄럽게 살겠네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위태롭게 흔들리겠네
가을이 사라진 쪽으로 너를 부르지만
이미 소리보다 먼저 내 몸도 앞질러 달아났다
아파서 뒤따르지 못한 가슴 한쪽만
세상이 다 얼음 위라는 조용한 경종을 듣고 있네
어디를 딛어도 세상은 얼음신발 하나네
그러나 그대가 우리의 별이라고 하던 그 별에
내 두 발에 매달린 얼음신발
업보의 쇳덩어리 다 녹을 때는 닿을까
내 발이 함께 얼음이 되더라도
나 기어이 그 별을 걷고 걸어
생의 가설무대를 허물어 그 별에 다시 짓겠다
이마로 박박 얼음 문질러
화끈한 불꽃 활활 켜고 사라진 가을을
헤집어 너를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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