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어 욕실 가득한 김을 보내고 찬 공기를 맞는다. 
샤워를 하고 나가보니, 남친이 TV를 보고 있다.

"너희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넌 정말 살아남지 못 했을 것이다.  그만 가자."

또 야인시대 보는구만. 아, 옛날사람.
밤11시 무렵에 케이블 채널에서 <야인시대>를 틀어주는데, 
이 남자는 때를 놓치지 않고 사수한다. '내가 고자라니' 와 '4달라' 짤로 유명하지만, 옛날사람이라 그런 건 모른다.

드라마는 2부로 나뉘는데, 김두한 역할의 안재모가 김영철로 바뀌는 순간을 호사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청률 반토막, 광속 노화, 광복이 빼앗아간 젊음.
내 남자만 김영철의 2부를 더 좋아하나보다.
궁예도 매번 챙겨보던데, 말을 안해서 그렇지 김영철 골수팬인 것 같다. 드라마는 <태조왕건>인데 궁예 부분만 본다.
아는형님에서 궁예 성대모사를 하는 김희철을 좋아하고, 
코미디빅리그에 나오는 이진호의 궁예 개그에 배를 잡는다.
김영철 마니아다.

나는 거울 앞에서 로션을 바르면서 귀만 열어 놓았다. 
이상민의 말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이번에는 <차트를 달리는남자> 다. 일요일 아침을 깨우는 어른들의 디즈니 만화동산 
<신비한TV 서프라이즈> 못지 않게 흥미진진하다.

벤에플렉이 유모랑 바람이 났다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우겼고, 브란젤리나 커플은 브래드피트의 폭력때문에 헤어졌다고 한다. 이상민이 파고파고 매일매일 파고파는 헐리웃 커플.
화장대 옆으로 머리털 난 궁예가 알짱대며 장난의 시동을 건다. 오늘의 주제가 별론가보다. 이 남자를 공략하는 단어는 공포, 귀신, 믿거나말거나 계열인데 말이지.
미스터리 마니아다.

TV보는 남친 옆에 앉아서 홀쭉해진 헤어에센스 튜브를 건내줬다. 치약 좀 짜본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튜브용기는 아귀힘이 골든골을 장식하지않나. 마동석은 아니지만 205호 유일한 챔피언이 힘줄을 불끈대며 출전한다.
 "손을 줘야 할것이야." 
이것도 궁예 톤으로 읽어야 된다.

얌전히 손을 갖다 댔더니 케첩통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에센스가 콸콸콸이다.
"시마이?" 하고 물으니까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 남자의 아귀힘 크러쉬. 이건 내 취향이다.

머리에 에센스를 치덕대는데 조승우 목소리가 들렸다. 
아귀챔피언께서 비밀의숲을 보신다. 재탕 삼탕을 넘어 사골에 구멍이 숭숭 뚫릴 정도로 봤다.
재탕마니아 사골마니아다.

"재판장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건가?
그 혀 좀 어떻게하지.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증거가 뭐라고생각해?"

황시목 검사가 따로없다. 
똑같이 대사를 따라하다가, 자기가 검사를 하면 잘 할 것 같다길래 무언의 고개를 저었다. 또 시작이군.

아이언맨을 보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어벤져스를 보면 헐크, 엑스맨을 보면 돌연변이가 되고 싶은 남자. 
5살때 만났다면 장래희망이 강아지라고 말했을테지.

이것만큼은 말리고 싶은 역할도 있었는데, 
<악마를보았다>의 최민식이다.
연애4년차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자다 일어났더니 혼자 영화를 보고 '씨(앗)발아' 라고 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싸늘했고,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다중인격이 의심스러운 장래희망 마니아,
성대모사 마니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