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는 단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릴 적 우리집은 그리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기에 남들 다 받았다던 크리스마스 선물은 구경조차 못 해봤고,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른이 된 후엔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일하느라 애인을 만들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선물이나 애인이 있었으면 내 삶이 좀 더 나아졌을까?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런 푸념 어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오늘도 수면유도제 네 알을 꿀꺽 삼킨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휴대폰 액정 화면에 2014/12/24 11:48이라는 숫자가 빛나고 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눈을 뜨면 저 숫자가 26일 7시로 바뀌어 있기를…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빌어먹을 크리스마스… 빌어먹을 예수님… 빌어먹을 이벤트 회사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런저런 상념 속에 머리가 멍해지면서 잠이 온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잠에서 깬 건 지독한 공복감 때문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머리가 핑핑 돌고 무릎이 후들거릴 정도였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6년째 이 짓을 하면서 깨달은 건 잠들기 전엔 음식과 물을 최소한으로 먹어야 한단 것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처음엔 '오래 자면 배가 고플 테니 미리 많이 먹어둬야지.' 하는 생각에 밥을 두 공기나 꾸역꾸역 먹었더랬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당연히 속이 부대끼고 소변이 마려워서 25일 점심쯤 깨고 말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 쓰라린 실패를 경험 삼아 이젠 완벽하게 일어날 시각을 맞춰놓을 수 있게 되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증거를 보라. 휴대폰 액정에서 반짝이는 이 숫자…</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 젠장."</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3시 27분이다. 그것도 26일 오후 3시 27분.</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이다. 즉 회사에 무단결근했단 소리.</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허기와는 다른 현기증이 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서둘러 출근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뭐라고 변명해야 좋을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심한 몸살에 걸렸다고 할까? 아니면 갑자기 사고라도 났다고 할까?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 배고파서 머리가 더 안 돌아가는 기분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알람은 대체 왜 안 울린 거지… 잠결에 꺼버린 걸까? </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그나저나 망할 보일러는 왜 꺼졌지… 타이머를 잘못 맞췄나? </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5;">추위 탓에 온몸의 뼈마디가 욱씬거렸다. </span></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에라, 모르겠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차피 늦은 거, 30분 더 늦어도 한바탕 일 치를 건 매한가지니 일단 배나 채울까.</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냉장고를 열고 간단한 반찬을 꺼내 밥을 먹는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놈도 수명이 다 되어가는지 반찬이 영 서늘하질 않다. 그래, 이번 연말 보너스로 냉장고나 바꿔야지.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헌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우리 회사는 작은 유통 회사다. 직원은 17명이 전부고, 26일은 담당 거래처와 미팅도 있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런데 어떻게 아무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전화 한 통 없이 결근한 내게 괘씸함을 느낀 사장님의 불호령이 떨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회사에서 잘릴지도 모른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하아… 망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군대 전역 후 세 번째 직장이었고, 지금껏 8년을 일한 곳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 나이 서른여섯. 변변한 기술 하나 없는 일개 영업사원인 내가 새 직장을 구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얘기겠지.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사장님께 엎드려 빌어야겠다. 만일 너그럽게 받아주신다면 비상금이라도 깨서 고급 양주 한 병 사드려야지.</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면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옷을 주워 입은 다음 회사로 향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회사 앞에 다다랐을 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막상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니 긴장이 된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마치 학창시절의 지각한 날처럼. 수업 중에 들어가기 멋쩍어 뒷문 앞에 서서 안절부절하던 그 느낌 말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렇지만 마냥 피할 수만은 없는 법- 용기를 내어 문고리를 돌린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사무실 안의 온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뱃속이 간지럽고 얼굴이 불타는 양 화끈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사장님은 자리에 없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 안녕하세요. 제가 많이 늦었죠…?"</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보았지만 반응들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니, 아예 달랐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동료 직원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 눈빛은 황당함이라기보다 당황스러움에 가까웠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저… 누구십니까?"</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자리에 앉아있던 박 실장이 물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실장님? 저 엄 대리입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니, 저희 회사에 엄 대리라는 분은 없는데요. 뭔가 잘못 찾아오신 거 같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박 실장님 왜 이러세요? 저기 강 부장님 옆 책상이 제자리잖습니까?"</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직원들 중심으로 수군거림이 번져갔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녀들은 이상한 사람이라도 보는 눈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나를 흘끔거렸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무슨 얘기하시는 겁니까? 그 자리는 빈자리에요."</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모두들 내가 얄미워 짜고 장난을 치는 모양이지? 유치하기 짝이 없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코웃음을 치며 내 자리로 갔을 때, 난 더욱 불쾌해졌다. 그 책상은 정말로 빈자리였던 것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심지어는 컴퓨터조차 연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 서류철과 메모장도 없다. 서랍을 열어봤지만 텅 비어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뿐만 아니라 방석, 슬리퍼 같은 개인 물품까지 깡그리 치워놓은 것이다. 나는 분노에 휩싸여 웅성대는 직원들을 향해 물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사장님 지시입니까?"</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 사람 왜 이래!"</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박 실장은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뚝을 움켜쥐었다. 체대 출신이라 그런지 힘이 장난이 아니었지만, 이미 나도 반쯤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실장님이야말로 이거 놓으시죠!"</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난 거칠게 몸을 뒤틀며 팔을 빼내려 했고, 박 실장은 그런 나를 순식간에 제압하여 바닥에 패대기 쳐버렸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여직원들은 꺅꺅거리며 공포에 질려있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무슨 망상증 환자야? 당신 뭐 하는 사람인데 남의 회사에 들어와서 행패야!"</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저 여기 8년 근무한 영업팀 엄훈 대리란 말입니다! 진짜 왜들 이러세요? 장난이 도가 지나친 거 아닙니까!"</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소리치는 나에게 박 실장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는 내 멱살을 잡아 인정사정 없이 일으켜 세우고는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여기 CCTV 설치되어있어. 무단 침입에 업무 방해로 경찰 부르기 전에 썩 꺼져."</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 순간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흥분이 가라앉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떻게 된 일인진 몰라도 이 회사에서 더 이상 내 자리가 없단 건 확실하다. </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그렇다면 이 악질적인 장난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게 모두 무의미한 일이지. </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5;">한숨을 푹 내쉬며 사무실 내부로 눈을 돌렸다. </span></font></div> <div><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5;"><font color="#595959"> 입사 동기였던 오 대리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font></span></div> <div><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5;"><font color="#595959"> 내 감정이 가라앉음을 느꼈는지 박 실장은 멱살을 놓고 내 가슴팍을 툭 밀쳤다. 나는 패배감과 무력감에 젖어서 집으로 돌아왔다.</font></span></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접대나 회식에서 지겹게 마시던 술. 그놈의 술을 오늘은 날 위해 마셔야겠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27일 새벽 4시. 그간 회사 생활로 어지간히 술이 늘어서 소주 네 병으론 취기가 오를 기미도 없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니면 고장난 보일러 탓일지도 모르겠다. 영하 6도 날씨에 보일러가 고장날 건 또 뭐야. 낮에나 알았으면 수리기사라도 부르는 건데…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욕설을 중얼대며 체크카드를 챙겨 일어섰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12월 말의 밤바람은 칼날처럼 차갑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재촉해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노라니, 저기 가로등 밑에서 낯익은 얼굴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가 누군지 확신이 들었다. 고등학교 동창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각별한 사이는 아니지만 군대 전역 후에도 가끔 만난 적은 있는 친구다. 나는 괜한 반가움에 씩 웃으며 주머니에서 손을 빼 흔들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야아~ 정상호, 오랜만이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러나 상호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그대로 휙 지나쳐버린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뭐야, 이거? 당황한 난 흔들던 손이 무안해져 다시 주머니에 넣지도 못하고 멀어져 가는 상호의 뒷모습을 얼떨떨하게 바라볼 뿐이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분명히 상호 맞았는데? 광대뼈가 유달리 크고 오른쪽 눈 옆에 점이 있는 정상호, 걔 맞는데…?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두워서 못 알아본 건가? 아님 술이라도 진탕 취한 건가?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굳이 쫓아가서 왜 날 무시했냐고 추궁하고 싶은 맘은 들지 않는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인사하다 보면 대화가 길어질 테고, 근황 얘기가 나오면 결국 평일 새벽 4시에 술을 사러 나온 내 비참한 상황을 설명해줘야만 할 테니까. 차라리 잘 된 거지,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뭐. 자기합리화하며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오른손만 차갑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하지만 오늘의 사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니지, 되려 여기서부터 사건은 심각성을 띠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음, 손님… 이 카드 안되네요."</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맥주와 소주 몇 병을 카운터로 가져가 계산을 하려는데 아르바이트생 청년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한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게 뭔 소리에요? 이거 얼마 전에도 잘만 쓰던 건데. 신용카드 아니고 체크카드입니다. 한도고 뭐고 없어요. 잔고 있어요."</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뇨, 그게 아니고요. 잔고 부족이라고 뜨는 게 아니거든요…"</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르바이트생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카드와 나를 번갈아보며 말을 이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등록되지 않은 미승인 카드라고 나와요."</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씨발, 뭐? 저 통장에 잔고만 600이 넘게 들었는데?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난 카드를 빼앗다시피 가져와 편의점 구석에 있는 현금인출기 앞에 섰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저 포스기가 이상한 모양이다. 아예 돈을 뽑아서 계산해야지, 젠장.</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 어?"</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게 뭔 경우란 말이냐. 정말 아르바이트생의 말이 맞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 카드는 쓸 수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뭔가 은행에서 전산 착오를 일으킨 게 틀림없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따 낮에 은행에 가서 깽판을 치던가 해야지.</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나저나 하필이면 카드만 들고 나올 게 뭐야. 일이 꼬이려면 어디까지 가는지 궁금해질 정도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는 청년에게 사과하고 급하게 가게를 나왔다. 뒤통수에 박히는 의심의 눈초리가 따가웠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집에서 깨었을 땐 오후 2시 무렵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딱히 퍼먹진 않았만 술 마신 다음날 냉장고에 넣어둔 차가운 콩나물국 한 그릇을 먹는 건 나의 소박한 즐거움이었기에 이럭저럭 백수로서 첫 식사를 해치울 수 있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리곤 수염이 까슬하게 자란 부스스한 몰골로 은행에 간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가는 내내 어떻게 클레임을 걸면 좋을지 고민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부당한 발상이지만 어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은행에다가 풀어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러나 내 기대는 처참하게 박살 나고 말았다. 이젠 아주 최악으로 치닫는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저희 은행에 엄훈이란 이름의 고객님은 없으십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은행원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나는 대본에 없는 돌발 상황에 당황한 배우처럼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기껏 내 입에서 나온 소리라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가 고작이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혹시 저희 은행이 아니라 다른 은행과 거래하신 잠깐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저희 전산에는 전혀 거래 내역이 없습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럴 리가…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통장을 만들면서 이 은행에만 20년 가까이 거래를 해왔는데…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다음 달 만기인 1,800만 원짜리 적금도 있고… 전세 자금 대출도 있는데… 그게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 아니… 저… 저… 여기 적금이랑 대출도 있다구요.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저도 세 번째 확인해보고 있는데… 고객님, 저희 ○○은행엔 아무 데이터도 없으세요."</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거 정말 심각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 살아생전 전 재산이 공중분해되었단 선고를 들어볼 줄야…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난 비틀대며 은행을 나와 휴대폰에서 전셋집 주인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러나… 휴대폰도 먹통이었다. 등록되지 않은 전화란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쯤 되면 놀랄 기운도 없어졌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머리가 점점 맑아지면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b>존재의 소멸.</b></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서울에서 태어나 36년을 살아온 엄씨 집안의 장남, 엄훈은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신이나 악마의 농간인지는 몰라도… 그것 외엔 이 현상들을 설명할 답이 없어보였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크리스마스 이브에 잠들고 일어난 다음 순간부터 나란 존재는 소멸되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날 알아보지 못 했던 회사 동료들과 동창 녀석, 사용할 수 없게 된 카드와 휴대폰, 갑자기 없어진 회사의 내 자리나 은행 거래 내역…</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는 사라지고 말았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무엇을 해야 할지… 그전에 어떤 감정을 느껴야 되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가 걱정하고 있는 건 가족들이나 친구들조차 날 잊어버렸단 감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평생 피땀 흘려 억척스럽게 번 돈이 증발해버렸단 것이나 이 엄동설한에 전셋집에서 쫓겨나게 될 거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일단 외투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아 꺼내 물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입김인지 담배 연기인지 한숨인지 모를 하얀 것이 햇살에 부서지며 허공으로 날아간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 존재가 꼭 저것 같지 않은가. 눈엔 분명 보이지만 뭐라고 정의할 수 없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것.</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씨발, 쓸 데 없는 감상은 집어치우자.</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5;"> 나 지금 진짜 엿된 거다. 그치? 젠장, 젠장!!! </span></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가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얼마나 되더라?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연초에 부모님께 용돈 좀 넉넉하게 드리려고 뽑아놓은 100만 원, 지갑에 3만 8천원, 잔돈 모으는 저금통에 2만 원 남짓…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또 하나 다행인 점은 실질적으로 전셋집을 관리하는 주인네 아들이 해외로 장기 출장을 갔다는 것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확실하진 않지만 내년 여름에 돌아온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차를 팔아서 돈을 마련할까 생각이 들어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발상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휴대폰이나 카드처럼 그것도 미등록된 차량일 테니…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행여 단속이라도 걸리거나 사고가 나는 경우 일이 복잡해진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하는 걸까?</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PC방으로 가 인터넷을 켜고 닥치는 대로 키워드를 입력하여 정보를 찾아 헤맸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물론 내가 회원등록해놓은 정보도 다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에 비회원용 카드를 들고 올 수 밖에 없었고,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 순간 존재의 소멸이라는 내 발상에 확신이 들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찌 되었든 인터넷 검색은 별 소용이 없는 짓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가 찾을 수 있는 내용들은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들이 재등록을 하는 방법이라든지, 만화 주인공들이 어떤 이유로 존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잊혀졌다든지-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얘기들뿐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말소자들이야 존재를 증명해줄 사람이나 자료가 뭐든 있게 마련이지만 난 그딴 것도 없고, 만화 속은 가상의 판타지 세계니까 주민등록이니 전셋집이니 하는 문제가 일어나지도 않는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피시방에서 나온 나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동네를 배회하다가 별 수 없이 집으로 향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득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쳤다. </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젠장</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9.5px;">… </span><font size="2" face="돋움">바람이 치지 않는 실내인데도 끔찍한 한기가 느껴졌다. </font></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 넓고 넓은 세상에 완벽히 혼자 고립되었단 게 새삼 피부로 와 닿아 소름이 끼쳤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는 바닥에 쓰러져 태아처럼 몸을 말고 소리 죽여 울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꺼이꺼이 울었다간 혹시라도 누군가 경찰에 신고할까봐 맘껏 울 수도 없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경찰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며 내 신분증이라도 보자고 하면 어쩌나.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운전면허증을 보여줘야겠지.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조회를 해봤자 없는 주민등록번호일 테고 경찰들은 날 신분증 위조니 뭐니 하면서 조사하려 들 것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치만 난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이고, 내가 아무리 살아온 날들을 설명해봤자 가족도 학교도 직장도 증명해줄 곳은 없을 터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난 신원 불명의 정신이상자가 되어 후줄근한 병원이나 요양 시설에 처박혀 있다가 정말로 미쳐버리고 말겠지… </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그런 장면들이 영화처럼 머릿</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5;">속을 스쳐가고 난 뺨이 흥건해지도록 계속 울었다.</span></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의 능력은 의외로 별로 대단하지 않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가 이 괴상한 현상에 적응하길 포기하는 데엔 딱 석 달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첫 일주일은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족과 친척을 찾아가 보거나,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들고 공중전화에 매달려 동창들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물론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 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하려 했고, 동창들은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며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세 살배기 딸을 둔 내 여동생에게 '우리 조카 사타구니에 커다란 반점 있잖아.'라고 말했을 때,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 녀석이 지은 표정-더러운 소아성애자를 보는 듯한-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였던 경진이는 '그런 이름은 전혀 모르겠네요. 당시엔 딱히 누구랑 친했다기보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냈었거든요.'라고 말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는 그들을 모두 기억하는데 그들의 세상에선 나만 지워져 있는 것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기억들을 자꾸 되새김질 하다 보니 내가 경험했던 과거들이 정말 허상이었나 스스로 긴가민가해지기 시작했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윽고 "나"라는 개념이 희미해졌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가끔은 내가 졸업한 학교 이름이나 어릴 적 살던 동네 이름이 한참이고 기억나질 않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 무렵부터 집 밖에만 나오면 숨이 가빠 오고,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것만 같은 감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심할 땐 한 시간이나 발을 떼지 못하고 전봇대에 기댄 채 숨만 헐떡거린 적도 있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가 세상에 없는 존재… 이방인임을 다 알아차린 거 아닐까?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러다가 내가 사고를 칠 때를 기다려 날 끌고 가는 건 아닐까?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공황장애와 망상장애가 함께 찾아왔고, 한 달째부턴 외출을 하지 않게 되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먹을 걸 사러 갈 때엔 집 밖을 나서야 했지만 그 외엔 늘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 한 편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초기엔 기분 전환을 위해 외식을 하기도 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러나 이젠 그럴 의욕도 나지 않았고, 활동량이 극도로 적으니 배고픔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식탁 위엔 조리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통조림과 소세지, 그리고 최소한의 비타민을 공급하기 위해 산 과일 몇 알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젠 그마저도 말라버린 지 오래된 사과를 보자 신경질적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사기꾼도 아니고 살인자도 아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파렴치한 강간범들도 교도소에서 몇 년 살고 나오면 사람들 속에 모른 척 섞여 살 수 있는데, 좀도둑질 한 번 해본 적 없는 난 그것조차 할 수 없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도리어 난 지금 이렇게 벌벌 떨며 폐인이 되어가고 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마지막으로 사람과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지?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한 열흘 전쯤 슈퍼마켓 계산원 아줌마가 "적립 카드 있으세요?"라고 물어봤을 때, 그게 다구나.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정말 고독에 짓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전기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참치캔을 뜯어먹는 나를 거울로 바라보는 건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문이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가 엄훈이라고, 콩나물국을 좋아하고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남자라고, 새해에 부모님께 드릴 용돈 100만 원을 모아놨었다고 누구라도 좋으니-내 존재를 얘기하고 싶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젠 질렸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지갑을 열어 남은 돈을 확인한다. 저금통의 돈까지 다 포함하니 딱 5만 6600원이 남아있다. </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집안을 둘러본다. </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5;">황량하고 삭막한 풍경. 불도 켜지지 않은 방, 물기 없이 바싹 마른 화장실 바닥, 텅 빈 냉장고. </span></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다.</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5;"> 체취조차 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정말 사라진 인간인 것이다. </span></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출장 다닐 때 쓰던 캐리어를 찾아 신분증, 통장, 이력서, 자기소개서, 졸업 앨범, 증명 사진...</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무튼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쑤셔넣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리고 가까운 인쇄소에 찾아가 이걸 잔뜩 복사하고 택시를 잡았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살고 싶다. 너무 너무 살고 싶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택시 기사 아저씨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나를 룸미러로 흘끔거린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디 아프신가요? 병원으로 차를 돌릴까요?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뇨, 괜찮습니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땀이 흐른 자리에 셔츠가 바짝 달라붙는다. </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헉헉, 제기랄</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9.5px;">… </span></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내 숨소리가 너무 커서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차가 막혀 멈춘 상태인데도 눈이 핑핑 돈다. 복사물을 껴안은 손끝에 감각이 희미하다. </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헉, 헉, 헉</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9.5px;">… </span></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택시 기사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이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 아, 알아차렸을지도 몰라. 무섭다. 신고하면 어쩌지. 경찰을 부를 거야.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잡혀가겠지. 정신병원? 의사는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거야. 싫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를- 알려야 해.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저, 여기서 내릴게요- </font></div> <div><font color="#595959"><font size="2" face="돋움"> 네? 여기는</font><span style="font-family:'돋움';font-size:small;line-height:19.5px;">… </span><font size="2" face="돋움">아니, 설마 젊은 양반. 나쁜 생각하는 거 아니죠? </font></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지갑에 남은 돈을 전부 꺼내어 운전석을 향해 던지고 재빨리 차에서 내린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품에 안은 종이들을 던진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하늘을 향해 던진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강을 향해 던진다. 물살을 타고 떠내려간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사람들이 바라본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웅성웅성- 수군수군- 찰칵. 찰칵.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택시 기사가 휴대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전화하며 내게로 다가온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이제 소용 없어, 신고해봤자. 하하, 이미 뿌려버렸는걸.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수백 장의 종이가 팔락팔락 날아간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나는 옷을 벗는다.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 던진다. 양말도 속옷도 전부 벗어버렸다.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욕설과 고함- 찰칵.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저런 미친 자식- 찰칵.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머, 어머! 찰칵.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래, 나를 찍어줘! 나는 여기 있어!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씨발, 나는 엄훈이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font></div> <div><span style="font-family:'돋움';line-height:1.5;"><font size="3" color="#595959"> 내가!</font></span></div> <div><span style="font-family:'돋움';line-height:1.5;"><font size="4" color="#595959"> 내가!!! </font></span></div> <div><span style="font-family:'돋움';line-height:1.5;"><font size="5" color="#595959"> 여기!!! </font></span></div> <div><font size="6" color="#595959"><span style="font-family:'돋움';line-height:1.5;"> 살아있다고!</span></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오, 야야, 아까 페북에 뜬 거 봄?"</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뭔데?"</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떤 미친 바바리 새끼가 한강에서 홀딱 벗고 지랄하다가 자살했대."</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헐~ 크크크크... 그거 완전 관종 아니냐?"</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어, 그런가봐. 자기 사진이랑 이력서 같은 거 복사해서 존나 뿌렸다더라."</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누군데? 뭐 유명인이야?"</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아니, 걍 아저씬데. 이름이 뭐더라... 엄... 뭐였는데. 몰라"</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엄창?"</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엄창이래, 시발! 크크크크~"</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동영상 뜬 거 보여줄까? 페북에 존나 많은데."</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여자도 아니고 남자 벗은 걸 왜 보냐. 눈 버려."</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왜~ 웃기던데, 막 뭐라고 소리도 지르고."</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너나 많이 보세요. 됐고, 서든이나 하러 가자."</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그래, 크크크~"</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 </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div><font size="2" face="돋움" color="#595959"><br></font></div> <hr><div><font face="돋움" size="2" color="#595959"><span style="line-height:19.5px;"> </span></font></div> <div><font face="돋움" size="2" color="#595959"><span style="line-height:19.5px;"> 단편을 쓰고 싶어서 깨작이던 걸 급하게 마무리 했더니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게 나왔네여...ㅋ</span></font></div> <div><font face="돋움" size="2" color="#595959"><span style="line-height:19.5px;"> 그래도 흥미롭게 읽어주셨으면 바랄 데 없이 기쁠 거예요^.^</span></font></div> <div><font face="돋움" size="2" color="#595959"><span style="line-height:19.5px;"> </span></font></di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