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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istory_28429
    작성자 : LI르VrLr
    추천 : 1
    조회수 : 1528
    IP : 211.218.***.142
    댓글 : 2개
    등록시간 : 2017/06/27 17:19:36
    http://todayhumor.com/?history_28429 모바일
    인종말살의 그림자 역사
    <div> </div> <div><br></div> <div>미국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은 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div> <div>미국 백인 정착민(white man)과 미국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 사이에 일어난 정복 전쟁을 총칭하는 말이다. </div> <div>초기부터 아메리칸 인디언과 이주민의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div> <div>이민자의 증가와 함께 열강의 식민지 전쟁과 물리면서 대규모화되어 갔으며, </div> <div>북미 식민지 전쟁, </div> <div>인종 청소, 학살 등으로 표출되었다.</div> <div><br></div> <div>목차  </div> <div>1 개요</div> <div>2 원인 2.1 토지에 관한 오해</div> <div>2.2 부족 제도에 관한 오해</div> <div>3 백인의 식민지 개척 3.1 최초 항쟁</div> <div>3.2 인디언과 백인의 항쟁 시작</div> <div>3.3 유럽 열강의 대립</div> <div>3.4 영국 대 인디언</div> <div>4 미시시피 강 동쪽(1775년 -1842년) 4.1 미국 독립 전쟁</div> <div>4.2 치카모가 전쟁</div> <div>4.3 북서 인디언 전쟁</div> <div>4.4 테쿰세, 크리크 전쟁과 미영전쟁</div> <div>4.5 강제 이주의 시대</div> <div>4.6 알래스카</div> <div>5 미시시피 강 서부(1823년 -1890년) 5.1 대평원</div> <div>5.2 남서부</div> <div>5.3 서부 인디언의 전쟁 연보</div> <div><br></div> <div>개요]</div> <div><br></div> <div>원래 백인과 아메리칸 인디언과의 전쟁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상륙부터 시작된다. </div> <div>콜럼버스는 중미의 아메리칸 인디언 지파들을 함대를 이끌고 몇 년 동안 학살했으며, </div> <div>그 인구를 격감시켰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황금 채집을 위해 노예로 만들었으며, </div> <div>생활권을 뺏긴 인디언들은 기아와 역병(외래 전염병)에 시달리며 그 인구가 더 줄어들었다. </div> <div> </div> <div><br></div> <div>"미국" 성립 이전 동해안에서 조지 워싱턴은 아메리칸 인디언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했다. </div> <div>워싱턴의 방법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div> <div>워싱턴의 군대는 이로쿼이 연방과 뉴잉글랜드 전역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근절하라”는 </div> <div>워싱턴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div> <div>미국 독립 전쟁’ 이후 “넓고 싼 땅"을 요구하던 백인 정착민이 서진하게 되면서 </div> <div>그곳에 사는 인디언은 저항을 하였고, 이들을 근절시키려는 미국 정부와 인디언 박멸 전쟁이 벌어졌다. </div> <div>인디언 영토에서 쫓겨나 연방 정부가 마련한 땅인 “유보지(Reservation)”에 들어갈 것을 강요하자 </div> <div>격렬한 저항을 하게 된다.</div> <div><br></div> <div>영국이 미국에 정착을 시작한 1610년대와 1620년대는 평온한 시기였지만, </div> <div>피쿼트 전쟁이 일어난 1637년 무렵부터 정착민의 안전을 도모하기와 새로운 정착촌의 확대를 모도했고, </div> <div>식민지 백인은 인디언 부족 간의 분쟁을 이용하여 대리전쟁을 실시하게 되었다. </div> <div>이 전쟁은 17세기(필립왕 전쟁, 윌리엄왕 전쟁과 18세기 초 앤여왕 전쟁)에 </div> <div>운디드니 학살로 이어지며, </div> <div>1890년에 미국의 변방이 소멸’할 때까지 인디언의 땅을 백인 정착민의 위해 몰수하고 </div> <div>인디언을 정복하고 백인에 동화시키는 동시에, </div> <div>인디언 유보지에 강제 이주시킨 결과로 나타났다.</div> <div><br></div> <div>이 전쟁에서 미국 측과 인디언 측이 입은 손실에 대해 다양한 통계를 제공해왔다. </div> <div>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숫자는 그레고리 미치노 등이 교전 기록을 엄격하게 일치한 것이며, </div> <div>1850년에서 1890년 사이에만, 21,586명의 시민과 병사가 사망, 부상 또는 포로가 되었다. </div> <div>다른 숫자로는 러셀 손튼 등의, 관련성이 빈약한 정부 자료를 참고한 것으로 </div> <div>45,000명의 인디언과 19,000명의 백인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div> <div>이 후자의 추정치 중에는 변경의 학살에 의해 비전투 민간인들이 종종 살해되었기 때문에, </div> <div>모두 여성, 어린이 희생자도 포함되어 있다.</div> <div>그 외에도 다양한 저자가 적게는 5,000명에서, 많게는 50만명이라는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div> <div>여기서의 논의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쌍방의 잔학함이다. </div> <div>인디언은 그 잔인한 전투방식으로, </div> <div>미국은 파괴적인 작전 실행으로 드러난 잔학성은 매년 신문, 기록보관소, 외교기록 및 </div> <div>미국 독립 선언(... 영국인 변경 거주자,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잔인한 인디언, 연령, 성별 및 </div> <div>상태에 관계없이 판단력 없는 파괴를 장려했다.)에서 지적되어 왔다.</div> <div><br></div> <div>인디언 전쟁은 작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div> <div>인디언은 각각의 역사를 가진 다양한 집단이었다. </div> <div>전쟁 동안에 인디언은‘백인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동원할 수 있는 체계화된 단일 민족은 없었다.</div> <div>다양한 방식으로 건설된 사회에서 살고, 지역적 수준에서 전쟁과 평화의 결단을 내렸다. </div> <div>그러나 이로쿼이 연방과 수족과 샤이엔 족, 아라파호족의 세 부족 동맹과 </div> <div>또한 테쿰세 같은 합의에 의한 임시 동맹을 공식적으로 맺고 공동투쟁한 일면은 엿볼 수 있다.</div> <div><br></div> <div>인디언 전쟁은 크게 다음의 네 개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div> <div><br></div> <div>1.첫번째 시대는 백인이 미국에 들어와 조심스럽게 인디언과의 공존을 모색한 시대이다.</div> <div><br></div> <div>2. 다음 시대는 미국이 탄생한 연속적인 기간이고, 인디언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div> <div>미국의 문화에 동화되지 못한 인디언이 근절되고, </div> <div>미시시피 강 동쪽으로는 거의 인디언 거주지가 없어진 시대이다.</div> <div><br></div> <div>3. 세 번째 시대는 미시시피 강 서쪽에 백인의 식민지가 개척되면서, </div> <div>미국의 국력이 충실해지고 미국 서부의 인디언이 굴복당한 시대이다.</div> <div><br></div> <div>4. 네 번째는 20세기에 들어 와 인디언 조약이 미국 측에서 파기되어 </div> <div>부족 자체가 소멸되기 시작한 시대이다.</div> <div><br></div> <div>크레이지 호스 등이 참가한 인디언 연합군이 커스터 중령의 제7기병대를 격퇴하여 전멸시킨 전과도 거두었지만, </div> <div>제로니모의 항복과 ‘운디드니 학살’ 이후 인디언의 군사적 항쟁은 없어지다 시피 했다. </div> <div><br></div> <div>대신 20세기에 와서 ‘레드 파워 운동’으로 대표되는, 권리 회복 요구 운동이 현대의 인디언 전쟁이 되었다. </div> <div>황금 대신 우라늄과 석탄, 물 등 유보지의 지하자원이 미국의 수탈 대상이 되었다. </div> <div><br></div> <div>현대의 “인디언 전쟁”은 지하자원의 수탈과 환경오염, </div> <div>그리고 ‘서부 영화’나 ‘ 인디언 마스코트’ 문제로 상징되는 미디어와 스포츠에서 왜곡된 민족 이미지, </div> <div>연판화가 큰 테마가 되고 있다.</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원인</div> <div><br></div> <div>1492년 10월 1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상륙한 후 백인들은 인디언 부족이 </div> <div>아프리카 부족 사회와 같은 ‘추장이 지배하는 수장제 부족 사회’라고 착각했다. </div> <div>실제로 인디언 사회는 합의제 민주주의 사회이며, ‘</div> <div>왕’이나 ‘수장’ 같은 개인 권력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div> <div>위대한 신비’ 아래 사람과 동물조차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div> <div>모두가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이 인디언 사회이며, 하물며 땅은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니었다. </div> <div>단, 씨족형 사회나 부족집단 사회는 북미 원주민에 한정된 얘기로 </div> <div><br></div> <div>중미나 남미의 경우 아스테카 제국이나 잉카 제국처럼 </div> <div>문자 체계, 화폐 제도, 계급 제도, 전국에 걸친 통신 및 행정 체계, </div> <div>전시 1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는게 가능한 국가 체계가 성립되어 있었다.</div> <div><br></div> <div>토지에 관한 오해[편집]</div> <div><br></div> <div>미국은 식민화 과정을 계속하면서, 먼저 인디언에서 영토를 ‘구매’하려고 물물교환을 시도했다. </div> <div>그러나 그것은 인디언 공동체에서 보면 ‘백인이 선물을 하고 여기에 살게 해 달라’는 청탁의 의미였을 뿐이다. </div> <div>백인은 “여기에서 나가 달라”는 의미의 행동이었지만, 인디언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div> <div><br></div> <div>그들에게 땅을 사고파는 문화 관습은 없었기 때문이다.</div> <div><br></div> <div>인디언은 평화 조약을 맺을 때, 평화의 ‘롱 하우스’, ‘티피’ 등으로 ‘회합의 불’을 둘러싸고 </div> <div>‘거룩한 파이프’로 담배를 돌려 피우고, ‘커다란 신비’에 평화를 맹세했다. </div> <div>모든 존재가 ‘커다른 신비’에 있다고 생각한 인디언에게 커다란 신비와 </div> <div>맹약은 깨서는 안되는 맹세였다. </div> <div>백인들은 ‘땅을 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맹세를 지키지 않았고, </div> <div>인디언을 몰아내기 위해 무력으로 학살했다. 그래서 ‘인디언 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div> <div><br></div> <div>부족 제도에 관한 오해[편집]</div> <div><br></div> <div>‘인디언 전쟁’ 중 백인들은 ‘추장’을 ‘부족 대표’, ‘부족장’이라고 생각했다. </div> <div>부족민들이 경애하는 ‘대전사’를 ‘대추장’이라고 믿어 버렸고, </div> <div>또한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div> <div>백인은 ‘대전사’도 ‘추장’도 구분하지 못했다. </div> <div>인디언 사회에서 ‘추장’(Chief)은 실제로는 ‘중재자’, ‘촉진제’ 또는 ‘봉사자’이며, </div> <div>‘지도자’도 ‘부족장’도 아니었다. </div> <div>인디언 사회에는 ‘지도자’도 ‘부족장’도 없었다. </div> <div>개인이 권력을 가진 상명하복 체제가 아니었던 것이다.</div> <div><br></div> <div>그런데 백인들은 ‘인디언 전쟁’을 하면서, ‘추장’ 또는 ‘대전사’를 ‘부족장’이라고 믿고서 </div> <div>평화의 조정이나 협상의 책임자로 간주했다. </div> <div>추장의 서명으로 X표를 쓰게하고 (대부분 인디언은 활자형 문자가 없었다) </div> <div>이를 ‘부족 전체의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div> <div>물론 이것은 완전한 오해였으며, 합의를 거치지 않은 부족의 총의는 있을 수 없었고, </div> <div>인디언 전사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div> <div><br></div> <div>또한 인디언 전사단을 백인은 ‘사령관이 지휘하고 이끄는 군단’이라고 착각했다. </div> <div>그것은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디언의 전투 참여는 개인의 의지였으며, </div> <div>그들은 ‘군대’도 ‘병력’도 아니었고, 특정인이 이끌고 있는 집단도 아니었다. </div> <div>미국은 종종 ‘인디언이 협정을 깨고 공격했다’</div> <div>고 했지만, 협정을 위반한 것은 백인 측이었다.</div> <div><br></div> <div>인디언 사회는 여러 갈래 집단으로 세분화되어 있어서, </div> <div>각각 자치를 유지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div> <div>인디언 부족은 튼튼한 지배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div> <div>이들을 종합하여 따르게 하려는 미합중국의 생각에는 무리가 있었다. </div> <div>인디언 부족에서 최종적인 판단을 결정하는 것은 장로와 추장들의 큰 합의이다. </div> <div>이것은 현재의 인디언 사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div> <div>이렇게 ‘인디언 전쟁’에서 미국은 본래는 협상의 역할을 맡았던 </div> <div>‘추장’을 ‘전쟁사령관’으로 오해하고 그들의 죽이는데 열중했고, </div> <div>그들을 잡아 시체를 마음껏 능욕했다. </div> <div>근본적으로 백인들은 인디언 문화를 착각한 채 끝없이 인디언 학살을 반복한 것이다.</div> <div><br></div> <div>백인의 식민지 개척[편집]</div> <div><br></div> <div>1620년에 필그림 파더스가 미국 동해안의 플리머스 식민지에 도착했을 무렵에 </div> <div>인디언과 백인은 우호 관계에 있었다. </div> <div>혹독한 겨울을 넘기기 위해 오히려 인디언의 도움으로 이주민이 정착 할 수 있었다. </div> <div>그러나 모든 지역에서 인디언이 친절한 백인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고, </div> <div>다양한 인디언 부족이 있었던 것처럼, </div> <div>백인을 맞이한 인디언의 대응도 다양했으며, 16세기 전반 플로리다처럼 가부를 묻지도 못하고 쫓겨난 사례도 있었다. </div> <div>17세기 전반 프랑스는 적대적 인디언 편을 들어 아직 근대적 화기가 없었던 인디언을 압도하도록 유도하였다.</div> <div><br></div> <div>인디언의 수렵 생활에 귀중한 도구가 된 총을 공급하는 한편 </div> <div>다양한 상품을 교역하고 선물을 보내주며 백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div> <div>러나 총을 일찍 도입한 부족은 그렇지 못한 다른 부족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div> <div>17세기 전반의 이로쿼이 연방이 바로 이 전형적인 예이며, </div> <div>미국 북동부의 매우 넓은 범위를 세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div> <div><br></div> <div>제임스 타운과 영국인이 이름을 붙인 초기의 식민지에서 계약자 존 스미스는 굶주린 정착민의 식량 확보를 위해 </div> <div>각지의 인디언 마을을 습격하여 추장을 인질로 잡고 물품과 식량을 강탈했다. </div> <div>스미스는 포우하탄 추장을 ‘포우하탄 족의 황제’라고 대영제국에 엉터리 보고를 하여 </div> <div>대 인디언 정책에 착오를 가져온 계기를 만들었다.</div> <div><br></div> <div>한편, 백인이 들여온 다양한 질병은 면역력이 없는 인디언 부족을 격감시켜, </div> <div>그 힘을 없앴다. 멸종한 부족도 많고, 규모가 줄어든 부족 대부분이 </div> <div>다른 부족에 흡수되어 북동부의 판도는 백인과의 전쟁과 전염병으로 크게 바뀌게 되었다.</div> <div><br></div> <div>최초 항쟁 -</div> <div>제임스 타운 학살 문서참고</div> <div><br></div> <div>1610년대부터 다양한 이유로 정착민과 인디언 사이 많은 다툼이 일어났다. </div> <div>최초의 충돌이 어떤 전투인지는 여러 설이 있지만, 제임스 타운 학살이 잘 알려져 있다.</div> <div>1622년 3월 22일, 알곤킨의 포우하탄 족의 오페찬카노우가 버지니아 식민지를 공격하여 </div> <div>제임스타운에서 347명이 사망했다.</div> <div><br></div> <div>인디언과 백인의 항쟁 시작</div> <div><br></div> <div>인디언과 백인 사이에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한 가장 초기의 것은 1637년의 피쿼트 전쟁을들 수 있다. </div> <div>이 전쟁은 영국 교역상 한 무리가 몰살당하자 </div> <div>매사추세츠만 식민지와 플리머스 식민지의 백인이 피쿼트 족과 적대하고 있던 </div> <div>모히칸족을 이용하여 피퀴트족을 섬멸하였다. </div> <div>정착 초기의 필그림 파더스는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구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div> <div>이때부터 청교도들이 대거 정착하면서 정착민이 마음대로 인디언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div> <div><br></div> <div>1650년대 이로쿼이족이 뉴프랑스의 정착민을 습격했다. </div> <div>이에 대해 프랑스가 군대를 조직하여 반격을 하여 일시적으로 정전 시기를 가졌지만, </div> <div>이 적대 관계는 약 반세기 가량 이어졌다. </div> <div>이 전쟁은 ‘비버 전쟁’이라고 부른다. </div> <div>이로쿼이족의 예처럼 일시적 적대관계가 일단 평화관계로 이어지면, </div> <div>그 동맹 상대가 다른 백인과 전쟁을 할 경우 강력한 전력이 되었다.</div> <div><br></div> <div>17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뉴잉글랜드는 몇 번이나 전염병에 시달렸으며, </div> <div>면역력이 없었던 인디언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div> <div>1670년대 뉴잉글랜드 남부의 인구는 백인 35,000명에, 인디언 15,000으로 크게 역전당했다. </div> <div>1675년, 그때까지 백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왐파노아그 족의 메타 코멧 무리가 반기를 들었다. </div> <div>백인은 메타 코멧을 ‘지도자’라고 착각하고 ‘필립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div> <div>이 전쟁을 ‘필립왕 전쟁’이라고 부른다. </div> <div>웜파노아그족의 공격으로 포틀랜드 등의 정착촌은 파괴되었지만, </div> <div>뉴잉글랜드가 다른 인디언 부족을 끌여들여 반격을 가하면서 왐파노아그족도 크게 패하여, </div> <div>인구가 10분의 1 이하로 줄어들었다.</div> <div><br></div> <div>18세기에 들어, 지금까지 비교적 평온했던 캐롤라이나 식민지에서 인디언 항쟁이 이어졌다. </div> <div>1711년에 시작된 ‘터스카로라 전쟁’과 그것이 끝난 후 이어서 4년 후인 </div> <div>1715년의 ‘야마시 전쟁’이 발발한다. </div> <div>터스카로라 전쟁에서 패한 터스카로라족의 잔당은 북쪽으로 도망쳐 이로쿼이 연방에 합류했다. </div> <div>마찬가지로 야마시 전쟁에서 패배한 크리크 족도 남쪽으로 도망가서 일부는 </div> <div>스페인령 플로리다에 들어갔고, 일부는 세미놀 족에 들어가 그 저항은 19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다.</div> <div><br></div> <div>유럽 열강의 대립</div> <div><br></div> <div>1688년에 시작된 대동맹 전쟁 이후 유럽에서의 대립 구도가 그대로 북미에도 반영되어 주로 </div> <div>영국의 북미 식민지와 프랑스의 누벨 프랑스 사이에 항쟁이 반복되었다. </div> <div>1689년 ‘윌리엄왕 전쟁’, 1702년 ‘앤여왕 전쟁’, 1744년 ‘조지왕 전쟁’ 및 </div> <div>1756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이어졌다. </div> <div>이들을 총칭하여 ‘북미 식민지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div> <div>프랑스와 영국은 반드시 동맹을 맺은 인디언을 전쟁에 동원하여 싸웠다. </div> <div>미국 식민지나 누벨 프랑스는 프랑스의 동맹 상대는 오대호 지역의 알곤킨 어족계 인디언 부족이었지만, </div> <div>남부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서는 촉토 족이 동맹 상대였다. </div> <div>이에 대해 영국은 프랑스가 동맹을 맺었던 적대 부족을 선택하여 </div> <div>북부에서는 이로쿼이족, 남부에서는 치카소족과 동맹을 맺었다. </div> <div>미시시피 강 통행이 얽힌 프랑스-촉토족 동맹군과 치카소 족의 싸움은 ‘치카소 전쟁’(1720-1760)으로 불렸다.</div> <div><br></div> <div>이 시기의 특징적인 것은 미국 동해안의 대부분 인디언이 없어진 것이다. </div> <div>남아있던 인디언은 대부분 식민지 정착민의 생활 습관을 받아들이고 사회적, </div> <div>종교적으로 동화된 인디언이었으며, 정부의 인디언 부서에 소속되어 업무를 대행하거나, </div> <div>일부에서는 혼혈도 진행되고 농장을 소유하는 사람조차 나타났다. </div> <div>식민지 사회에 동화될 수 없었던 인디언은 내륙으로 물러갔고, </div> <div>식민지와 교역을 계속하면서 평화를 유지하거나, </div> <div>이주민에 적대적인 행동을 하다가 식민지 백인에게 반격을 당해, </div> <div>또 내륙으로 물러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div> <div><br></div> <div>이 전쟁의 결과, 최종적으로 〈1763년 파리 조약〉을 맺고 프랑스가 북미에서 식민지를 </div> <div>포기하게 되면서 정세가 단번에 바뀌었다. </div> <div>캐나다에서 멕시코까지 광대한 식민지를 지배하게 된 영국과 </div> <div>지금까지 프랑스와 스페인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온 인디언 부족 사이에 대립이 시작되었다.</div> <div><br></div> <div>영국 대 인디언</div> <div><br></div> <div>1763년 영국이 프랑스령 미국을 획득하면서 ‘1763년 선언’을 발표하여, </div> <div>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백인 정착을 금지시켰다. </div> <div>이것은 백인 정착민과 인디언의 충돌이 두려워 내놓은 조치였다. </div> <div>그러나 지금까지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인디언 부족이 폰티액 추장의 요청에 따라 동맹을 맺고 </div> <div>‘폰티액 전쟁’을 일으켰다. </div> <div>이 전쟁에 참가한 것은 오대호, 오하이오 영토, 일리노이 영토와 </div> <div>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살던 많은 부족이었다. </div> <div><br></div> <div>이 전쟁은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움직였던 부족이, 여러 인디언 부족들과 연합을 결성하고, </div> <div>공동으로 대처한 가능성을 실현한 하나의 사건이었다.</div> <div><br></div> <div>〈1763년 선언〉은 실질적으로는 ‘폰티액 전쟁’ 발발 후 발령되었으며, </div> <div>전쟁을 종료시키기 위한 조약에 협상 재료로 사용되었다. </div> <div>그러나 식민지 백인의 서부 영토 정착을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div> <div>인디언과의 새로운 항쟁의 불씨가 되었으며, </div> <div>식민지 백인의 불만도 커져서 ‘미국 독립 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div> <div>그런 가운데 1773년 ‘던모어 전쟁’이 일어났다. </div> <div>오하이오 강 남쪽까지 침입해온 이주민을 쇼니족과 밍고족 인디언이 습격하였으며, </div> <div>버지니아 주지사 던모어가 군대를 보내 진정시켰지만, </div> <div><br></div> <div>이 싸움을 경계로 영국 대 인디언이라는 갈등 구도는 미국 식민지 개척민 대 인디언의 구도로 바뀌었다.</div> <div><br></div> <div>미시시피 강 동쪽(1775년 -1842년)</div> <div><br></div> <div>인디언 전쟁의 전투</div> <div> 미시시피 강 동쪽 </div> <div>서부전선 (미국독립전쟁)(1775년-1783년)</div> <div>치카모가 전쟁(1776년-1794년)</div> <div>북서 인디언 전쟁 (1785년-1795년)</div> <div>니커잭 원정(1794년)</div> <div>사비누 원정(1806년)</div> <div>미영전쟁(1811년-1815년) 테쿰세 전쟁 (1811년-1813년)</div> <div>크릭 전쟁(1813년-1814년)</div> <div>피오리아 전쟁(1813년)</div> <div><br></div> <div>제1차 세미놀 전쟁(1817년-1818년)</div> <div>윙네바고 전쟁(1827년)</div> <div>블랙 호크 전쟁(1832년)</div> <div>포니 인디언 영토 전략(1834년)</div> <div>크리크 앨라배마 봉기(1835년-1837년)</div> <div>플로리다 - 조지아 경계 전쟁(1836년)</div> <div>제2차 세미놀 전쟁(1835년-1842년)</div> <div>미주리 - 아이오와 경계 전쟁(1836년)</div> <div>서부 변방 (사비누) 분쟁(비전투)(1836년-1837년)</div> <div>오세이지 인디언 전쟁(1837년)</div> <div> </div> <div><br></div> <div>이 기간의 전쟁은 새로 건국된 미국에 대한 인디언의 공격에 의한 것이며, </div> <div>멕시코-미국 전쟁 직전까지를 하나로 구분하고 있다.</div> <div><br></div> <div>미국 독립 전쟁</div> <div><br></div> <div>미국 독립 전쟁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평행한 전선이 있었다. </div> <div>하나는 동부의 영국 지배에 대한 것이며, </div> <div>다른 하나는 서부의 인디언 전쟁이었다. </div> <div>신생국가인 미국은 미시시피 강 동쪽에 있는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과 싸우게 되었다. </div> <div>영국 정부는 서부로 정착지를 확장하려는 식민지와 인디언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는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div> <div>독립 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div> <div>영국 편에 섰던 인디언은 자신들의 영토로 침범하는 이주민들을 영국 정부가 막아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div> <div>독립 전쟁의 서부 전선은 미국의 역사에서 </div> <div>‘가장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인디언 전쟁이 되었다.</div> <div><br></div> <div>일부 인디언 사회에서는 이 전쟁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 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div> <div>뉴욕과 펜실바니아에 기반을 둔 이로쿼이 연방은 독립 전쟁에서 내란 상태가 되었다. </div> <div>여섯 개의 네이션으로 분열되어 오네이다족과 투스카로라족은 반군 편을 들었고, </div> <div>모호크족과 세네카족, 카유가족, 그리고 오논다가족은 영국 편을 들어 싸웠다. </div> <div>비록 이로쿼이 족이 서로에 대한 직접적인 충돌은 피했지만, </div> <div>독립 전쟁을 이로쿼이족의 내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div> <div>결국 양측 모두 새로운 정치적 분열로 인해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div> <div>남동쪽에서는 체로키 족이 중립파 (또는 미합중국파)와 친영국파로 분열되었고, </div> <div>미국파는 드래깅 카누가 이끄는 치카모가 족이었다. 다른 여러 부족 사회도 유사한 분열 상태에 빠졌다.</div> <div><br></div> <div>이 전쟁 기간에 개척민과 원주민 민간인들은 모두 상당한 고통을 겪었으며, </div> <div>식량은 빈번한 원정대로 인해 파괴되었다. </div> <div>이러한 원정대 중 가장 최대 규모는 1799년의 설리번 원정대로 40개 이상의 이로쿼이족 마을을 초토화시켰다.</div> <div><br></div> <div>1783년 영국이 미합중국과 〈파리 조약〉을 맺고 휴전을 하면서, </div> <div>인디언들은 자신들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div> <div>광대한 인디언 영토를 미국에 할양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div> <div><br></div> <div>미합중국은 당초 영국 편을 든 인디언을 땅을 잃은 적으로, 피정복민으로 취급했다. </div> <div>미합중국 연방 정부는 영토의 확장을 원했고, </div> <div>이것을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고, 전쟁을 통해 목적을 이루려 했다.</div> <div><br></div> <div>치카모가 전쟁</div> <div><br></div> <div>이러한 변경에서의 갈등은 끊이질 않았으며, </div> <div>치카모가 전쟁은 ‘미국 독립 전쟁’에 휘말린 체로키족과 식민지 개척민 사이의 일련의 분쟁이며, </div> <div>1794년까지 계속되었다. 치카모가 체로키족(이후 로워 체로키라고 불림)은 처음에는 오버힐 타운에서, </div> <div>이후는 로워 타운, 밸리 타운, 미들 타운의 체로키 족이 가세해서 </div> <div>전쟁 지도자 드래깅 카누가 이끌었던 남쪽의 치카모가 지역 (테네시 채터누가), </div> <div>그리고 이후에는 파이브 로워 마을에 살았던 자들을, 백인들이 ‘치카모가’라고 불렀다. </div> <div>이후 이 마을에서는 크리크 족, 백인 왕당파, 도망친 흑인 노예와 치카소족도 합류했고,</div> <div> 이후에는 북쪽으로 이주했던, 그리고 교환에 참가를 했던 100여명 쇼니족, </div> <div>그리고 다른 부족 70여명이 합류를 하게 되었다. </div> <div>당초 공격 목표는 와토가, 홀스톤 및 놀리척키, 그리고 테네시 동부 카터 계곡의 정착촌으로, </div> <div>1780년에는 내쉬보로 요새를 비롯한 컴벌랜드 강 정착촌과 켄터키, </div> <div>또한 이후에는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및 조지아까지도 확대되었다. </div> <div>치카모가 연합 공격은 소규모일 때는 400에서 500명, 많을 때는 1,000명 이상이 동원될 때도 있었다. </div> <div>드래깅 카누의 친밀한 동맹 알렉산더 맥길브레이가 이끄는 어퍼 무스코지족(크릭 족)은 </div> <div>종종 치카모가의 작전에 참가하거나 또한 단독적인 작전을 수행했다.</div> <div><br></div> <div>컴벌랜드 강 정착촌은 치카소족, 북방의 쇼니족과 델라웨어족의 공격을 받았다. </div> <div>드래깅 카누와 그 후계자인 존 와츠의 작전은 빈번하게 북서부의 작전과 연계하여 수행되었다. </div> <div>이에 대한 식민지 개척민들의 대응은 평화 지역의 체로키족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것이었고, </div> <div>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전쟁은 1794년 11월 《텔리코 블럭하우스 조약》으로 끝났다.</div> <div><br></div> <div>북서 인디언 전쟁</div> <div><br></div> <div>폴른 팀버스 전투, 1794년 8월 20일</div> <div>1787년 북서부 조례에 따라 북서부 영토에는 공식적으로 조직된 백인 정착민들이 대거 이 지역에 유입되었다. </div> <div>북서부의 인디언들은 이 ‘영토침범’에 대항하여 항전을 호소했지만, </div> <div>조지 워싱턴은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려했다. </div> <div>그러나 북서 인디언 전쟁에서 쇼니족의 블루 재킷이나 마이애미족의 리틀 터틀, 레나페족의 </div> <div>버콩가헬라와 오타와족의 에구샤와 등이 참여한 </div> <div>범부족 동맹이 죠시아 하마 장군과 아서 세인트 클레어 장군이 이끄는 미합중국 군대를 분쇄시켰다. </div> <div>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패배는 미합중국이 인디언에게 당한 가장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div> <div>미합중국 정부는 사태를 협상으로 수습하려 했지만, 블루 재킷과 쇼니족 인디언 동맹​​군은 </div> <div>미합중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경계선을 고집했기 때문에, </div> <div>앤서니 웨인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웨인 군은 </div> <div>1794년 ‘폴른 팀버스 전투’에서 인디언 동맹군을 제압쳤다. 인디언은 영국의 원조를 기대했지만, </div> <div>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중시한 영국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div> <div> </div> <div>결국 인디언들은 1795년 〈그린빌 조약〉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다. </div> <div>이 조약으로 인디언은 오늘날의 오하이오 전체와 인디애나의 일부를 미국에 양도할 수 밖에 없었다.</div> <div><br></div> <div>테쿰세, 크리크 전쟁과 미영전쟁</div> <div><br></div> <div>테쿰세</div> <div>미합중국은 〈그린빌 조약〉 이후에도 연이어 인디언 토지의 권리를 빼앗아 갔다. </div> <div>그래서 인디언 사회에서는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 </div> <div>1800년 인디애나 준주 주지사 윌리엄 해리슨이 취임하면서, </div> <div>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의 지시로 인디언의 토지 취득이 가속화되었다. </div> <div>쇼니족의 테쿰세와 텐스콰타와 형제는 미합중국의 확장에 대한 항쟁을 호소했다. </div> <div>테쿰세의 목적은 인디언들이 땅을 못팔도록 중지시키는 것이었다.</div> <div><br></div> <div>테쿰세가 남부에 가서 크리크족, 체로키족과 촉토족에게서 동맹자를 모집하는 동안, </div> <div>해리슨은 인디언 동맹을 향해 진군하였고, </div> <div>1811년 ‘티페카누 전투’에서 텐스카와타 무리들을 제거했다. </div> <div>미국은 이 승리로 무력 저항이 수그러들기를 기대했지만, 테쿰세는 영국인들과 공개적으로 동맹을 맺고, </div> <div>미합중국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이것은 곧 ‘1812년 전쟁’으로 확전되었다.</div> <div><br></div> <div>독립 전쟁 때처럼, ‘1812년 전쟁’은 서부 전선에서 대규모 인디언 전쟁이 되었다. </div> <div>테쿰세에게 동조한 크리크족은 당초 크리크족의 내전에서 시작된 </div> <div>‘크릭 전쟁’에서 미합중국의 팽창 정책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하게 되었다. </div> <div>‘1812년 전쟁’에서 영국과의 전쟁은 교착 양상을 보이고 있었지만, </div> <div>미합중국은 서부 전선에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div> <div>테쿰세가 템즈 전투에서 해리슨 군에 의해 전사하면서 북서부의 저항은 끝났다. </div> <div>미합중국에 반격한 크리크족도 패했다. </div> <div>1818년 제1차 세미놀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크릭 전쟁’의 연장이었지만, </div> <div>결국 1819년에 미합중국이 플로리다를 점령하게 되었다.</div> <div><br></div> <div>강제 이주의 시대[편집]</div> <div><br></div> <div>앤드류 잭슨은 “인디언은 없어져야 할 열등 민족이다.”라고 연설했고, </div> <div>크릭 전쟁의 호스슈 벤드 전투에서 승리하고 인디언 강제이주의 추진자가 되었다.</div> <div>이러한 일련의 전쟁의 결과 중 하나는 토머스 제퍼슨이 제창하고, </div> <div>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1830년에 서명을 하여 효력을 발생시킨 〈인디언 이주법〉이었다. </div> <div>인디언 이주법 자체는 인디언의 이주를 강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div> <div>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얻은 서부의 땅과 교환될 동부 인디언의 땅의 협상 권한을 대통령에 일임한 것이었다. </div> <div>사학자 로버트 V. 레미니에 따르면, </div> <div>잭슨은 영국과 스페인이 미합중국의 국경에서 인디언을 무장시켜 </div> <div>미합중국을 치게 하는 용병 투사로서 써먹지 못하도록 하는 국내 안보를 우선하는 정책을 촉진시켰다.</div> <div><br></div> <div>‘인디언 이주법’은 “인디언을 백인이 없는 </div> <div>서부 인디언 준주(현 오클라호마)에 강제 이주시키고, </div> <div>연방 정부가 신탁 유보한(reserve) 유보지(Reservation)에 살게 하고, </div> <div>그래서 백인 사회 체제를 구축하고, </div> <div>백인 사회에 동화시키는 일종의 인종 청소 정책이다. </div> <div>이것에 따르지 않으면 그 인디언 부족은 멸족된다”고 잭슨이 선언한 것이다.</div> <div><br></div> <div>이렇게 많은 인디언 이주 조약이 무력을 바탕으로 마련되었다. </div> <div>인디언 대부분은 마지못해 하면서도 이주 조약의 내용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div> <div>(눈물의 길). 그러나 이 조약의 집행에 저항하여 항전이 시작되었다. </div> <div>이것이 1832년 ‘블랙 호크 전쟁’과 1836년 ‘크릭 전쟁’ 및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희생도 컸던 </div> <div>‘제2차 세미놀 전쟁’(1835-1842)이었다.</div> <div><br></div> <div>알래스카</div> <div><br></div> <div>18세기 말에 알래스카까지 진출한 러시아 제국은 1802년에 시트카 섬 기지 트링깃을 인디언에게 빼앗겼다. </div> <div>1804년, 바라노프 주지사가 지휘하는 러시아 군이 </div> <div>완강하게 저항하는 트링깃족을 ‘싯카 전투’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러시아령 알래스카에 계속 정착을 했다. </div> <div>이 전투는 백인과 알래스카 인디언의 마지막 전투로 언급되고 있다. </div> <div>그 후에도 알래스카 인디언의 저항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지만, </div> <div>러시아는 알래스카의 식민지 경영으로 예상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867년에 미국에 알래스카를 팔게 된다.</div> <div><br></div> <div>미시시피 강 서부(1823년 -1890년)</div> <div><br></div> <div><span style="font-size:9pt;">동부뿐만 아니라 서부의 대평원과 산악지도 광산, </span></div> <div>목장 경영자와 정착민의 미국 식민지의 확장으로, 인디언과의 분쟁이 증가했다. </div> <div>그레이트 베이슨의 유테 족 등 많은 부족들이 백인들과 분쟁을 겪었다.</div> <div><br></div> <div>대평원은 북부의 수 족과 샤이엔 족, 코만치 족, 카이오와 족으로 한 사냥 기마 민족, </div> <div>또한 남서부 산악의 아파치 족이 그들의 영토 침범에 대해 가장 격렬한 저항을 했다. </div> <div>수 족과 코만치 등 평원의 부족은 말의 기동력을 이용한 고속 전투가 특기였다. </div> <div>수 족은 원래 오대호 지역에 정착 형 농업을 영위하다가 대평원으로 흘러들어왔다. </div> <div>수 족은 말 붙잡아 방법이나 타는 방법을 기억하여 서부로 이동했고, </div> <div>그 유파의 의식으로 다른 인디언 부족이 압도하고 두려워하는 전사 집단이 되었다. </div> <div>아파치 부족은 다른 부족을 습격해 그 경제력을 얻었기 때문에, </div> <div>친척의 죽음의 보복하기 위해 싸움을 일으키고 있었다. </div> <div>아파치 족은 모두 싸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으며, </div> <div>사막과 협곡의 주변 지형 환경을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남북 전쟁 동안에도 백인과 인디언의 충돌은 계속되었다. </div> <div>1862년 다코타 전쟁(실제는 폭동)은 미국과 수 족 사이에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충돌이었다. </div> <div>원인은 미국 정부의 태만에 있었다. </div> <div>수 족(다코타 족)은 당시, 좁은 유보지로 강제 이주당해 </div> <div>11년에 걸쳐 유보지 관리 사무소의 식량 배급이 밀려 굶주림이 일상적인 상태가 되어 있었다.</div> <div><br></div> <div>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오는 4명의 전사들이 실랑이 끝에 백인 농장주 일가를 죽여 버렸고, </div> <div>추장은 회의를 열어 살인자를 인도할지, 전면전을 벌일지 협의를 했다. </div> <div>여기서 타오야데도우타(리틀 크로) 추장은 당초에는 전쟁을 반대했지만, </div> <div>부족의 굶주림에 불만이 쌓여 있던 다른 전사들에게 압도되어 항전을 벌이기로 하고, </div> <div>미네소타 주 전역을 덮친 6주의 싸움을 시작하였다. </div> <div>500명 이상의 미군 병사와 이주자가 죽었다. </div> <div>그 외에도 작은 습격이나 포로가 된 후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믿고 있다.</div> <div><br></div> <div>이 봉기로 죽은 수족의 수는 문헌에 남아 있지 않지만, </div> <div>전쟁 후에 303명의 수 족이 살인과 강간으로 고소당해 </div> <div>미합중국 군사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판결 대부분은 감형되었지만, </div> <div>1862년 12월 26일 에이브러햄 링컨의 지시에 따라 </div> <div>미네소타 주 만카토에서 38명의 다코타 수 족 전사들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div> <div>이는 미국 역사 중에서도 최대 규모의 동시 집행이었다.</div> <div><br></div> <div>기아에 빠진 소수 민족이 항쟁을 일으켜 국가에 의해 무력 진압된 이 사건은 ‘</div> <div>"다코타 전쟁’으로 불린다 </div> <div>기본적으로 유보지 정책의 결함에 원인이 있는 이 폭동도 링컨 대통령은 신경 쓰지 않았다. </div> <div>미국의 무관심에 따라 인디언은 더욱 굶주리게 되었다. </div> <div>또 링컨은 미네소타 주에서 모든 수 족을 내쫓겠다고 선언하고, </div> <div>수우 말살 정책을 미네소타와 함께 진행했고, </div> <div>미네소타에서 인디언들의 유보지를 해제하고 영토를 몰수했다.</div> <div><br></div> <div>1864년에는 샌드 크릭 학살이라고 불리는 악명 높은 인디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div> <div>콜로라도 주 남동부의 샤이엔 족과 아라파호 족의 티피가 있는 땅에 </div> <div>민병대가 습격을 하여 약 150명의 남녀노소를 죽이고, </div> <div>남녀의 성기나 머리 가죽을 벗겼다. </div> <div>샌드 크릭에 사는 원주민들은 연방 정부에 의해 영토 내에서 안전을 보장 받고 있었지만, </div> <div>인디언에 반감을 가진 백인 이주자가 폭주했다. </div> <div>샤이엔 족은 티피에 백기를 내걸고 싸우지 않겠다는 의사를 나타냈지만, 무시당했다. </div> <div>나중에 연방 의회 조사에서 인디언 학살자에 대해 단기간이지만 대중의 항의가 잇따랐다.</div> <div><br></div> <div><br></div> <div> </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1876년, 다코타 골드 러시가 블랙 힐스에 일어나자, </div> <div>최후의 중요한 수 족 전쟁이 일어났다. </div> <div>블랙 힐스 일대는 ‘라라미 요새 조약’으로 수 족의 불가침 영토였지만, </div> <div>금이 발견된 후에는 완전히 무시되었고 백인은 마음대로 약탈을 했다. </div> <div>미국 군대는 마침내 조약을 스스로 깨고 수 족 소탕 작전에 나섰다. </div> <div>몇 번의 사소한 교전 이후, 조지 커스터 장군은 수 족, 샤이엔 족, 아라파호 족 </div> <div>총 1500명이 종교 의식을 위해 리틀빅혼 강변에 야영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div> <div>커스터는 공을 세우기에 급급했고, 이들을 기습하여 "리틀빅혼" 전투가 되었다. </div> <div>본대와 떨어져 행동하고 있었던 커스터 장군의 부대는 전술적 잇점에 수적으로도 웃돌았던 인디언에 섬멸되었다. </div> <div>인디언 전사는 라코타 족의 유명한 전사, </div> <div>크레이지 호스도 참여하고 있었으며, 시팅 불(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음)은 승리의 예측에 의해 고무되어 있었다.</div> <div><br></div> <div>이후 1890년, 사우스 다코타 운디드 니의 노던 다코타 유보지에서 </div> <div>고스트 댄스 의식은 그들을 진압하려는 군대의 공격으로 연결되었다. </div> <div>그러한 시도를 하던 12월 29일에 포격을 하여, 군인들은 대개 비무장이며, </div> <div>남녀노소인 300명 이상의 인디언들을 학살한 ‘운디드니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div> <div><br></div> <div><br></div> <div> </div> <div><br></div> <div><br></div> <div>미국 들소는 마켓 헌터즈에 의해 사냥을 당해 19세기 말기에는 거의 멸종 직전이었고, </div> <div>1880년 중반에는 수백마리로 줄어들었다.</div> <div>이러한 처참한 인디언 전쟁과는 별도로 </div> <div>대평원의 인디언 인구 감소의 배경에는 버팔로의 멸종이 있었다. </div> <div>평원지역 인디언들은 의식주의 기둥으로 4000만 마리를 넘는 버팔로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div> <div>1870년대에서 1880년대에 걸쳐 생계를 유지하도록 열어둔 </div> <div>마켓 헌터즈라는 백인과 메티에 의한 남획으로 </div> <div>대평원에서 버팔로가 멸종 위기(750마리)까지 몰렸기 때문에 </div> <div>대평원에서 생활이 힘들어지자 이주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div> <div><br></div> <div>남서부</div> <div><br></div> <div>남서부의 광대한 지역에서의 분쟁은 1846년에서 1895년까지 거의 50년간 지속되었다. </div> <div>이 지역의 모든 비 푸에블로 인디언 여러 부족을 참여시켜, </div> <div>스페인계 멕시코인과 분쟁이 계속되었다. 나바호 족과 아파치 족과의 분쟁이 잘 알려져 있지만, </div> <div>그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div> <div>남서부에서 최후이 대규모 작전 계획은 5,000명의 병사를 투입했다. </div> <div>이 작전에서 아파치 족의 제로니모와 24명의 전사, 여자 아이가 1886년에 항복했다. 제로니모는 추장이 아니었다.</div> <div><br></div> <div>남서부의 부족(푸에블로 족을 포함)은 미국이 멕시코에서 이 지역을 획득하기 전에 수세기동안, </div> <div>서로 또는 외부에서 들어온 이주민과의 교역과 전투를 반복했다.</div> <div><br></div> <div>서부 인디언의 전쟁 연보</div> <div>코만치 전쟁 (Comanche Wars) (1836-1875) 남부 평원 주로 텍사스 공화국과 텍사스</div> <div>카이유스 전쟁 (Cayuse War) (1848-1855) 오리건 준주 - 워싱턴 준주</div> <div>로그강 전쟁 (Rogue River Wars) (1855-1856) 오리건 준주</div> <div>야키마 전쟁 (Yakima War) (1855-1858) 워싱턴 준주 퓨젓 사운드 전쟁 (Puget Sound War)</div> <div>쿠다렌 전쟁 (Coeur d'Alene War)</div> <div>파인 크릭 전쟁 (Battle of Pine Creek)</div> <div>프레이저캐년 전쟁 (Fraser Canyon War) - 브리티시 컬럼비아</div> <div>캘리포니아 인디언 전쟁 (1860-65)</div> <div>라마루챠 전쟁 (1863) 브리티시 컬럼비아</div> <div>칠코틴 전쟁 (Chilcotin War) (1864) 브리티시 컬럼비아</div> <div>나바호 전쟁 (Navajo Wars) (1861-1864) 애리조나 준주, 뉴멕시코 준주 롱워크 오브 나바호</div> <div>블랙호크 전쟁 (Black Hawk War)</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 <div> 서부시대, 명백한 운명 - </div> <div>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명백한 운명/명백한 사명/팽창의 천명)이란, 제임스 매디슨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민주공화당, </div> <div>특히 매파(주전파, Warhawks)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 </div> <div>즉,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의 미국 팽창기에 유행한 이론으로, </div> <div>미합중국은 북미 전역을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지배하고 개발할 신의 명령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div> <div>이는 팽창주의와 영토 약탈을 합리화하였다</div> <div><br></div> <div><span style="font-size:9pt;">차근차근 갉아먹듯이 인종을 청소하기 시작한 비극의 흑역사입니다 </span></div></div> <div><br></div> <div><br></div> <div> </div>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A%B5%AD_%EC%9D%B8%EB%94%94%EC%96%B8_%EC%A0%84%EC%9F%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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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30 14:05:51  118.218.***.97  행길댁  58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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