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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freeboard_2004603
    작성자 : Re식당노동자
    추천 : 5
    조회수 : 813
    IP : 183.97.***.127
    댓글 : 4개
    등록시간 : 2023/03/22 02:19:45
    http://todayhumor.com/?freeboard_2004603 모바일
    립밤을 선물받고 멘탈털리는 이야기

     

     

    프로식당러로써, 새로 오픈한 매장의

    대부분 인원이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곳에서

    일하다보면, 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 역시 활력을 얻는다는것이 매우 좋다만,

     

    가끔 마주하기 힘든 경우를 겪기도 한다.

    예를들어 스물 두 살짜리 직원이 씩씩한 목소리로

    "실장님 담배는 제가 사겠습니다!" 라고 외치길래

     

    "니가 내 담배를 왜 사..." 라고 말하며 계산하려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억지로 카드를 들이밀려는 모습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니... 그냥.. 괜찮아요..." 라고 말하고

    내 카드로 결제를 했는데, 그 날 저녁 그 직원이 힘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솔직히 저는 실장님하고 좀 편하게 지내고 싶은데

    아무래도 실장님이 저를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라고 말하길래 굉장히 당황하며 그게 아니라, 나는... 으로

    시작해 왜 니가 나에게 담배를 사면 안되는지에 대해 설득을

    하고서야 오해를 푼 적도 있고,

     

    일한지 삼일 가량 된 젊은 직원들이 나와 치킨을 먹고 싶다며

    집까지 찾아온 탓에 문을 열어준 적도 있다.

     

    젊음이란 좋구나. 순수하구나. 고맙다. 나를 좋게 생각해줘서.

     

    얼마전에 그런 일의 연장선으로 립밤을 선물받았다.

    한 삼일쯤 집에도 못가고 대충 일하고 있다 보니 그 모습을 본

    직원이 나에게 립밤을 선물해줬는데...

     

    오렌지 립밤이였다.

    아마 오랜 고생으로 입이 부르튼 내 모습을 보고 준 것 같다.

     

    직원의 남자친구가, "근데 이거 오렌지빛 나는거 아냐?"

     

    라고 물었고, 직원이 남자친구에게 "아닐걸? 그냥 오렌지 성분만

    들어있을걸?" 하고 말했고, 나는 음. 하고 고민한 뒤 고마운 마음으로

    받고 입술에 발랐는데

     

    씨부레 진짜 입술이 오렌지색이 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는 그냥 '음 부드러워' 하고 바르고 나왔는데 어쩐지

    내 입술을 본 직원들이 나를 보며 오열하며 웃길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거울을 봤는데, 진짜 입술이 오렌지색이였다.


    심지어 인중을 타고 올라오는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더 당황했다.

     

    "오빠 미안해요 난 진짜 그런건줄 몰랐어요."

     

    "니가 그렇게 말한들... 나는 앞으로 손님응대를 할 때 메뉴와

    식사구성을 물을 뒤 '저는 성 정체성이 모호한 것이 아니라 단지

    립밤제품 선택을 잘못했을 뿐 입니다.' 라는 멘트를 추가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건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말하자 직원은 꺄아아아 하는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웃었고

    지점 사장은 '오랫만에 큰 웃음을 지었다' 라며 만족했으나,

    나는 앞으로의 거취와, 성 정체성을 이 기회에 바꿔야 하는가 하는

    깊은 고민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무튼 집에 돌아와 대충 컴퓨터를 하며 맥주를 한잔 마시고 있는데

    문득 입술이 또 까끌한 것을 느껴 무심결에 립밤을 발랐다.

    오렌지색이긴 했지만, 뭐 집이면 아무도 볼 사람이 없기도 하고...

     

    대충 그 상태로 맥주를 한잔 입에 댔는데, 나는 보고야 말았다.

    컵에 묻은 짙은 오렌지색 내 입술자국을.

    흔히 영화, 드라마 소설에서 보면 그런 장치로 나오지 않던가.

    상대방 성별에 대한 환상으로 화면이나 지문 등으로

    비춰주는 요소로 활용하는, 립스틱 묻은 컵. 상대 성에 대한

    욕망으로 남녀는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 씨부레.

     

    하도 당황해서 담배를 피우러 잠깐 밖에 나가 한참 피우고 있는데,

    필터에 묻은 이물감이 느껴져 바라보니 필터에도 오렌지빛 립밤자국이

    묻어있었다.

     

    흔히, 영화 드라마 소설에서 보면 그런 장치로 나오지 않던가.

    퇴폐적인 사랑 혹은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하는

    립스틱 자국 묻은 담배. 그 담배끝에서 피어오르는 생연기.

    '당신은 나를 사랑할 수 있나요?' 라고 묻는 짙은 화장의 여인

    이 씨부레.

     

     

    내일 출근하여 물을 것이다.

    아니 말할 것이다.

    내 어제 립밤을 바르고 소설의 로맨스 구성 그 기본원리와

    내가 손님에게 기어코 한마디를 더 덧붙이게 만드는 이 그림,

    고맙지만 나에게 이런 고뇌를 안겨준 이유가 무엇인가.

     

    대답 여하에 따라 차마 고마운 마음에 빠따를 들 수는 없겠으나

    대체 이런 제품을 어디서 구했는지, 그것도 새것을 가지고 있다가

    나에게 왜 주었는지, 제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너의 이야기는

    변명인지 기만인지, 그리고 나는 이걸 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재미있어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보고싶다.

    KakaoTalk_20230322_021802766.jpg

    문제의 립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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