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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245 정의는 승리한다. [새창] 2018-07-24 22:04:19 1 삭제
    정의가 승리한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습니다. 정의를 위해서 힘껏 싸워야된다는 것만큼은 당연하고 당위적인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지더라도 말이죠.

    정의가 승리한다는 믿음은 아마 전지전능하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 즉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근거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재난이나 질병, 빈곤에 의해 무고한 생명들이 죽는 것을 보면 그런 존재가 없다고 추정하는게 더 합당하죠.
    244 철학전공자에게 질문합니다. "현상학"과 "지향성"이 무슨 뜻인가요? [새창] 2018-07-23 19:00:37 2 삭제
    현상학쪽으로는 깊이 아는게 없어서, 지향성에 대해서만 설명드리겠습니다.

    지향성이란 심적/정신적 표상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죠. 뭔가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확신하거나, 추정하거나, 걱정하거나, 기뻐하거나, 후회하거나... 할 때, 그런 생각, 확신, 추정, 걱정, 기쁨, 후회... 등이 마음 속의 표상들입니다. 그리고 이 표상들은 다 이것 저것에 대한 것이죠. 화살표가 과녁을 향하는 것처럼 표상들이 대상을 향하는 것을 지향성이라고 합니다.

    그림이나 책에 나오는 단어/문장들도 이처럼 지향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들도 표상들이죠. 예를 들자면 다빈치의 모나리자라는 그림은 모나리자라는 인물을 묘사합니다, 즉 그 인물에 대한 것이죠. 그러나 그림이나 단어/문장으로 구성된 표상들의 지향성은 심적 표상의 지향성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세상에 지향성을 가진 모든 것들은 다 마음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자면 돌이나 번개는 돌이나 번개 이외에 다른 것을 뜻할 수 있는 자체 기능이 없고, 다른 것을 상징할 수 있다면 그건 마음이 돌이나 번개에 부여한 것이란 말이죠.)

    그러나 심적 표상의 지향성도 자연세계에의 일부이며, 자연세계의 인과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루스 밀리칸(Ruth Millikan)이 있습니다. 밀리칸의 입장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지향성을 자연선택에 의한 생물학적 기능으로 보는 것입니다. 벌은 꿀의 방향을 다른 벌들에게 알릴려고 8자 모향으로 움직이는 춤을 춥니다. 이 춤은 꿀이 어디 있는 지를 가리키는 지향성을 갖춘 자연현상입니다.

    지향성의을 갖춘 표상의 근본적 특징은 그 표상이 가리키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죠. 돌이나 번개는 틀릴 수가 없습니다. 뭔가 다른 것을 틀리게나 맞게 표현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니까요. 그와는 달리 표상들은 다른 존재들을 틀리게나 맞게 표현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질문: 거울은 다른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비교적 정확하게, 때로는 왜곡된 모습으로요. 그렇다면 거울이 비춰주는 모습들은 지향성을 갖춘 표상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답변: 아닙니다. 거울에게는 다른 사물들을 왜곡된 모습이 아니라 정확하게 묘사해야된다는 목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물들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줘도 맞는 것이 아니고, 왜곡된 모습을 보여줘도 틀린 것이 아니죠.

    밀리칸에 의하면 생물학적 기능은 긴 세월의 자연선택이 부여한 목적이 있습니다. 인지적 표상들의 기능은 우리들의 주변환경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이며, 의욕적 표상들의 기능은 우리들이 원하는 것들을 달성하게끔 해 주는 적이죠. 그래서 이 두가지 표상들의 지향성의 방향도 다릅니다. 인지적 표상의 경우에는, 그 표상의 대상을 세상에 맞춰야 합니다 (mind-to-world direction of fit), 즉 우리가 잘못 인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의욕적 표상의 경우에는, 세상을 그 표상의 대상에 맞춰야 합니다 (world-to-mind direction of fit). 즉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것을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세상으로 현실을 바꿔나가야 되는 것이죠.

    아무튼, 지향성에 이 두가지 방향성 (mind-to-world, world-to-mind)가 있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인 Elizabeth Anscombe가 처음으로 지적했고요, 디 두가지 방향성에 따른 당위성이나 목적성을 진화적/생물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자연철학적 입장은 대표적으로 밀리칸의 입장입니다. 둘 다 현상학자가 아닌만큼, 제 답변이 질문자님의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19세기, 20세기 초반의 현상학 이후에 영미 분석철학 쪽에서는 그만큼의 발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243 지적대화를 위한 넒고얕은지식을 읽다가 헷갈리는부분이 나와서 ㅎㅎ.. [새창] 2018-06-24 15:29:48 1 삭제
    본질 (to ti en einai, "essence")
    형상 (morphe, "form")
    질료 (hulos, "matter")
    현상 (phainomenon, "phenomenon/appearance")
    실체 (ousia, "substance")

    "본질 = 형상"은 맞습니다. 어느 실체를 그 실체로 특정지어주는 속성들이죠. 현대과학에서의 예를 들자면 물의 본질은 H2O라는 화학적 구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로 표현하면 어느 실체의 정의가 될 수 있는게 본질입니다.

    물을 구성하는 수소와 산소 입자들은 물의 질료과 되겠고요.

    "현상 = 질료"는... 글쎄요. 본질을 불변하는 것이고, 현상을 그에 반대로 변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 현상은 질료라고 구분지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상세계가 불변하는 것들도 포함한다고 보면 본질이나 형상을 현상세계에서 제외할 필요가 없죠. 물론 플라톤은 본질을 현상세계에서 분리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상"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저는 모르지만, 플라톤의 이원적 입장을 반대했기 때문에 "현상 = 질료"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갑니다.

    본문에 스캔된 페이지에는 "실체"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체란 형상을 갖춘 질료입니다. 질료없는 형상은 존재할 수 없으며, 형상없는 질료 또한 실제로 존재할 수 없죠.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hylomorphism)"이라고 하죠.

    끝으로 "아리스토텔레스 = 현상 = 질료"는 틀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죠, 그렇다면 질료와 형상을 다 갖춘 존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변하긴 하지만, 강아지나 알렉산더로 바뀌진 않죠, 인간으로서,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로서의 본질을 갖추었기 때문이죠.
    242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새창] 2018-06-23 11:07:32 0 삭제
    물론 제 개인적 입장이지만,
    이세상의 모든 것들의 기반이 되는 영역은 두가지라 생각됩니다:

    (1) 미래의 물리학이 밝혀낼 듯한 최소 단위의 입자들.
    (2) 수, 또는 수가 횐원되는 기반 (ex. 집합론의 집합들)

    개인적으로 마음이나 의식은 물질적인 기반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물질적인 기반에 의존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의식이나 정신은 창발적인 현상이라고 보는거죠: 물질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물질적 기반이 없으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라는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존재성에 대한 제 정의는 유심론의 가능성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수나 집합은 마음이 만들어낸 개념으로서만 존재할 수도 있고, 물질또한 감각/지각의 가능성으로 환원될 수 있는 거죠. 존재성의 대한 정의는 중립적이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서로 다른 뜻으로 "존재"라는 단어를 쓴다면 아무런 접점없이 서로 빗나가는 말만 하게 되는거죠.
    241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새창] 2018-06-22 16:39:48 0 삭제
    단순히 언어적으로 볼 때, 존재에 포함시키면 안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나 공간도 "있다", "없다"라고 하죠. 질서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형이상학적으로, 시공간을 다른 것들로 분석할 수 도 있겠죠. 예컨대 뉴턴은 공간을 "신의 감각기관 (God's sensorium)"이라고 정의했다죠. 감각기관은 기향님의 기준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서는 일종의 복합적인 관계이겠죠. 관계는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240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새창] 2018-06-22 16:24:17 0 삭제
    기향님 댓글 아래 1차적 존재와 2차적 존재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아니길 바라지만 결국은 말장난일 수도 있겠죠.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새 글로 콰인과 카르납, 그리고 제 자신의 입장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239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새창] 2018-06-22 16:21:24 0 삭제
    이전 대화를 좀 더 이어가 보죠. 기향님이 제시한 존재에 대한 인식적 기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죠. 인식자와 인식된 대상은 인식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인식적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대상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상이 물리적인 객체라면 인식적 관계는 그 객체와 인식자 간의 인과관계에 기반한 것입니다. 물리적 영역에서는 인식적 관계보다는 인과관계가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존재하는 것이란 고유의 인과적 효능성을 가진 것"이란 기준도 있습니다 (Alexander's Dictum).

    제가 보기엔 인과관계의 기준도 흄이 내세운 기준과 마찬가지로 편파적입니다. 물리적 영역, 시공간적 영역에는 적용할 수 있으나, 추상적 영역에는 (그 영역을 물리적 영역이나 시공간적 영역으로 환원하는 추가 논증이 없이는) 적용할 수 없죠.

    제가 옹호하는 기준은 어느 특정 관계를 존재의 기준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중립적이어야 되니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것이 진실이던 허구이던 간에, 이런 저런 관계들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계들은 대체로 X와 Y간의 의존관계이거나, 대등관계이겠죠. 예를 들자면 생물학적 영역은 화학적 영역에 의존하고, 화학적 영역은 물리학적 영역에 의존합니다, 후자가 없으면 전자도 없는거죠. 심신이원론자들은 심적 영역과 물질적 영역간의 관계가 대등하다고 주장하죠, 그래서 둘 중 한 영역이 없어도 다른 하나는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아무튼 이 세상의 모든 영역간의 의존관계를 경로모형처럼 화살표로 도표화한다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한 영역, 또는 대등한 여러 영역들에 도달할 것입니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영역이 1차적 존재성을 가진 것이고, 이러한 영역에 의존하는 영역들이 2차적 존재성을 가진 것입니다.
    238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새창] 2018-06-22 16:05:48 0 삭제
    글쎄요. 진리는 있는건가요, 없는건가요. 당연히 있다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아니라면 존재의 정의를 너무 좁게 잡은 듯 합니다.
    237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새창] 2018-06-22 15:00:43 0 삭제
    기향님: "수는 의식의 산물로서... 시공간을 점유하지 못하고 개념으로서만 존재하는 것..."

    제가 수를 개념이나 이름(숫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어와 의식이 생겨나기 전에, 인간이나 지각을 갖춘 생물들이 있기도 전에, 우주의 모든 것들 간에 수적 관계는 존재하고, 이를 수적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공식들에 따라 모든 것들이 움직였겠죠.

    수학을 바둑이나 체스에 비교해 보세요. 바둑이나 체스는 인간들이 만들었지만, 인간들이 미리 예측하지 못한 놀라운 한수나 전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임의적이지 않은 객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수학에서도 이런 객관성이 있죠, 그래서 수학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바둑이나 체스와 같이 객관성이 있는 분야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바둑이나 체스는 인간이 그런 게임을 만들기 전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물 간의 수학적 관계는 인간이 수학이라는 학문을 발견하기 이전에도 있다는 것이죠.
    236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새창] 2018-06-21 17:27:48 1 삭제
    순환의 오류에 대해서는 정확한 비유를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래 (4)번째 정의를 보세요].

    초록색만 못 보는 색맹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아이가 초록색이 뭔지 물어봅니다. 다음은 초록색이 뭔지 해명하려는 시도들입니다:

    (1) 초록색 = 녹색
    - "초록색"과 "녹색"은 동의어죠. "초록색은 초록색이야"라고 하는 것과 거진 비슷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순환적 정의겠죠. 물론 초록색의 뜻을 모르지만 녹색이 뭔지 아는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녹색 맹인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2) 초록색 = 나무나 풀잎의 색깔
    - 직시적 정의라고 할까요? 녹색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녹색 맹인에게는 초록색이 뭔지 보여줄 수 없습니다. "초록색"이 쓰이는 문맥이나 문화적 맥락에 대해서는 좀 도움이 되겠죠.

    (3) 초록색 = 파랑색과 노랑색의 혼합
    - 이 정의가 초록색을 못 보는 아이에게 제일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런식으로요: "노랑, 빨강, 파랑, 주황은 뭔지 알지? 노랑과 빨강을 섞으면 주황이 되잖아, 여기 보이지? 마찬가지로 파랑과 노랑을 섞으면 초록이라는 다른 색이 되는거야. 여기서 노랑 빨강 파랑을 원색이라고 할 수 있지, 이 색깔들을 섞어서 다른 색깔들을 만들 수 있어." 등등의 설명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대개 이런 식의 정의에 관심을 두고 있죠, 복합적인 것을 보다 단순한 것들로 분석하는 것입니다. 흄이 제시한 정의도 이런 시도라고 볼 수 있죠, 존재와 비존재를 복합적인 것으로 보고, 보다 단순한 것으로 분석하는 거죠. 물론 "존재"와 "비존재"는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제일 단순한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다양한 분석적 시도들의 실패 후에 나와야 될 결론이라 생각됩니다.

    다음은 특정시간이나 장소의 비존재 경우에 흄의 정의에서 일어나는 순환과 유사한 정의입니다:

    (4) 초록색 = 초록색이 아닌 모든 색깔의 집합에서 제외된 색깔
    - 이건 그냥 말장난 같지 않나요? 결국은 "초록색이 아닌 색깔들이 아닌 색깔", 즉 "초록색 = 초록색"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게 순환적인 정의죠.

    비유를 통해서 정리하자면, 흄이 제시한 정의의 문제점은 특정 경우에 모순과 순환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비슷하게:

    (모순) 초록색 = 모든 색깔의 집합에서 제외된 색깔
    - 모든 색깔 중에는 초록색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제외되었다는 말은 모순인 것입니다. 이 모순을 피하려면 "모든 색깔"을 "파란색이 아닌 모든 색깔"로 수정해야 되겠죠.

    (순환) 초록색 = 초록색이 아닌 모든 색깔의 집합에서 제외된 색깔
    - 이게 순환적이란 것은 (4)번 정의에 대한 코멘트에 설명했습니다.
    235 존재/비존재에 대한 생각 [새창] 2018-06-21 15:43:39 0 삭제
    약간 칸트의 철학과 비슷한 느낌이 들긴 하네요.

    아무튼, 그렇다면 수(number)는 존재하는 것입니까? 수는 대표적인 추상적 존재이며, (피타고라스의 추종자가 아닌 이상) 수 자체가 시공간을 점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죠. 물론 수나 보편자 등이 개념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개념론적 입장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입장은 추가적 논증으로 입증하거나 반대 입장에 대한 반박 입장을 내세워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한 정의로 규정할 수는 없는거죠.

    그리고 존재는 언제나 감지하거나 인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까요? 이건 관념론에 가까운 입장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 있는 탁자는 존재할까요, 현재 인지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감지/인지가능성은 사물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준이지, 사물의 존재를 성립하는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도 있죠. 제가 이해하기론 이 정리에 함축된 결과 중 하나가 모든 무모순적 공리계에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논리적인 방법으로 인지할 수 없는 참 명제가 있다는 것이죠.

    존재나 비존재에 대한 정의는 중립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론이나 관념론, 개념론, 플라톤주의 등등, 서로 대립하는 이론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의가 있어야 하죠. 위에 나온 흄의 정의는 중립적이지 않고, 유명론이나 개념론에 치우친 정의입니다.
    234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8-05-07 18:18:19 0 삭제
    奇香님께:
    사단칠정 논의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것이 많이 부족해서 아직은 새로 글을 작성하고 심도있게 논의할 수준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는 송대 이후의 유학보다는 춘추전국시대의 유학에 빠져든 상태라 무기한으로 미루겠습니다. 다만 성리학의 심론은 "심통성정"(https://ko.wikipedia.org/wiki/%EC%8B%AC_(%EC%84%B1%EB%A6%AC%ED%95%99))이라는 명제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퇴계선생의 심통성정도를 시작점으로 삼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分福茶釜님께:
    원글의 맥락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비교할 때, 양쪽에서 고칠 점이 있고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고 봅니다. 흄과 칸트의 논쟁에서 보면 감정은 이성적일 수가 없다는 전제를 그냥 받아들이는데, 이것을 틀린 전제라고 봅니다. 맹자가 말하는 "추은"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하여 측은히 생각하는 마음을 당장 보이지 않지만 다른 비슷한 상황에 처한 생물들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이고, 친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든 타인들에게도 적용하는 것이죠. 그리고 동양철학이 특히 흄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도 있습니다. 바로 인간 심리에서 공감(sympathy)의 중요성이죠. 전국시대 유학에도 서(恕)라는 비슷한 개념이 있었는데, 전국시대 말기부터 음양오행설이 들어서고, 그게 또 감응(感應)이라는 개념과 엮이게 되어 서(恕)를 대체했다고 봅니다. 오행설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비과학적이죠, 오행이 왜 5가지 방향, 색상등에 해당되는지, 인과관계는 고려치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연상짓는 것입니다.
    233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8-05-06 22:46:25 0 삭제
    사단칠정에 관한 논의는 아직도 우리가 고민해 볼 가치가 있는 중대한 문제라고 봅니다.
    도덕적 양심(사단)이 과연 자연적 감정(칠정)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
    환원될 수 있다면 정확히 어떻게 환원되는 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환원될 수 없다: 동양에서는 퇴계선생, 서양에서는 칸트의 입장이죠.
    환원될 수 있다: 동양에서는 기대승 율곡, 서양에서는 흄의 입장입니다.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은 송대 성리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에 나온 것처럼
    음양오행설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은 현대과학에 의해 무의미해진 이론적 틀이죠.

    그러나 퇴계선생의 "심통성정도"를 봐도
    사단칠정 논의가 음양오행설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즉 심리적 맥락에서
    "이"는 이성이 인식하는 자연적/도덕적 이치로 이해할 수 있고
    "기"는 감성이 어느 상황이나 외부 사물을 접하면서 일으키는 심리적 반응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재해석하면 굳이 음양오행설을 도입할 필요가 없고
    흄과 칸트의 논쟁과도 비교 가능하다고 봅니다.

    참고로 위에 언급한 "태극도"와 "심통성정도"는
    퇴계선생의 [[성학십도]]에서 1번째와 6번째 도표를 보시면 됩니다.
    영문으로 번역된 것도 있습니다:
    (1) 태극도: https://faculty.washington.edu/mkalton/10dia%20ch1%20web.htm
    (2) 심통성정도: https://faculty.washington.edu/mkalton/10dia%20ch6%20web.htm
    232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8-05-05 23:56:54 1 삭제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권합니다.
    깊이가 있고 어려울 수록 파고들며 심취하는 재미가 있겠죠.
    인도나 동양의 불교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요.

    유툽나 인문학 카페 같은 곳에서 강의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231 제 생각인데 틀린 것 같으면 말씀해 주세요. 행복이란 [새창] 2018-01-30 22:32:57 1 삭제
    우리가 어느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적에, 바라고 원하고 욕구하는 것은
    대다수의 경우 상황을 막론하고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이 아닐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들 중에서의 최선이죠.

    그렇다면 최악과 차악의 선택지만 있는 상황도 있겠죠.
    그래서 할 수 없이 차악을 선택하는 경우,
    그 상황에서 내가 바라고 원하고 욕구하는 것은 최악 대신 그 차악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악을 얻는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죠.

    또한, 욕구의 충족이 행복 대신 불행을 낳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부페에서 역겹게 먹는 5번째 접시처럼요.
    (대체로 기대한 상황과 충족된 상황이 어긋나는 경우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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