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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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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125 이기심과 이타심에대한 나름의결론은 [새창] 2015-12-09 17:16:12 0 삭제
    qwe3님: 제가 님이 말씀하신 것에 반대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제1영역/제2영역 등등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저도 이미 읽어보고 받아들이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자면 감정이입도 이 2개의 영역을 구분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고요.

    제가 말하는 접근법은 비과학적인 접근법이 아닙니다. 다만 과학적 이론과 실험/관찰 결과를 다 골고루 고려해야 된다는 것이죠. 제가 반대하는 접근법은 지나친 환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죠. 자연에는 계층적 구조가 있습니다. 맨 밑에는 미시적 물리학이 다루는 현상이 있고, 그 위로 다른 물리학적/화학적/생물학적/심리학적 현상이 계층적으로 있고, 이것들을 다루는 개별과학들이 있습니다. 환원주의는 맨 계층의 원리가 다른 모든 현상들을 지배한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엔 이러한 입장은 아직은 섣부른 결론입니다. 최소한 각 계층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거기에 적용되는 원리들을 따로 따로 잘 관찰하고 파악한 후에 제대로 다달할 수 있는 결론이죠.

    저는 도킨스의 가설도 생물학이나 진화론에 있어서 일종의 환원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거기에 상반되는 다계층선택론(multi-level selection)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접근법으로 선호하는 것이고요, 그렇다고 해서 도킨스의 가설이 틀리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기다려보자는 게 제 입장입니다.

    그리고 사실과 당위를 구별해야됩니다. 자연과학은 당위성이라는 것이 없죠. (이것도 철학자들 중에서 논쟁이 있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복잡해지니까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심리적으로 동기를 가지고 목표를 세울 수 있는 동물들입니다. 또는 원칙을 의도적으로 따르거나 위반할 수 있고, 거기에서 당위성에 대한 문제, 무엇을 해야할까라는 문제가 나오죠. 제가 위에 남긴 댓글에서도 보실 수 있지만, 이러한 당위성에 대한 문제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연과학과에서 분리할 수 있는 문제라고 주장했던 것이죠.

    이기심/이타심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에도 관심이 많이 있는 편인데, 과학자들 중에서도 상당한 논쟁이 있죠. 그래서 어느 한 책을 추천해드릴 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어로는 막대한 자료가 있다고 까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일단 후란스 드 봘의 테드 동영상 하나 첨부할께요.

    https://www.ted.com/talks/frans_de_waal_do_animals_have_morals?language=ko#t-982227
    124 이기심과 이타심에대한 나름의결론은 [새창] 2015-12-09 15:20:42 0 삭제
    작성자님의 본문에서

    " 즉 한가지 가정을하면 내가 노래부르는걸좋아해서 노래하는건 이타심도 이기심도 아닌데
    친구 A가 옆에서 공부중이라 내가 좋아하는노래를 참아주는건 이타심 그냥부르는건이기심이자나요"

    라고 쓰셨는데,
    제가 보기엔 이게 바로 정곡을 찌르는 포인트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조셉 버틀러도 홉스의 이기주의에 반박할 때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기심이라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좋아하거나 즐기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관심사보다 나 자신의 관심사를 우선시하고, 충돌이 있을 경우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이기심이죠.

    이기주의자들 이 시점에서:
    "그런 충돌이 있을 경우 남을 배려하며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결국은 내가 그런 희생을 좋아하거나 즐기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도 결국은 이기심으로 볼 수 있다."
    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데요.

    제 귀에는 그냥 실속없는 말장난으로 들립니다.
    남을 돕는 것이 자신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말은
    진정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단는 뜻이죠.
    위선적인 이타행위가 아니라는 증표입니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죠.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왜냐하면 뭔가를 즐긴다는 것은 그것이 진심으로 자기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타적 행위를 즐긴다는 것은 그것을 진심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거죠.

    억지로 남을 돕는 것만 이타적 행위입니까?
    물론 도덕적 의무감 때문에 솔직히 싫지만 남을 억지로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때 남편이 죽을 때까지 긴 세월 동안 앓고 있는 남편을 돌봐준 여인이 있었다는데요.
    남편이 죽기 전에 고마웠다고 하니까
    아내가 "저는 그냥 제 의무를 행한 것 뿐입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뭔가 쌀쌀한 대답입니다.
    사랑과 이타심은 따스한 것인데 말이죠.

    이기주의자들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죠.
    "이기적 행위는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이타적 행위도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따라거 이타적 행위도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쾌락적 이기주의, 즉 쾌락주의라고 말할 수 있죠.

    쾌락주의는 틀렸다고 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좋아하고 중요시하는 대상이지,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나 쾌락은 아닙니다.
    즐거움은 우리가 좋아하는 대상을 얻었을 때 따르는 심리적 여파나 잔광이죠.

    그러나 쾌락주의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쾌락만 추구하면 좌절되고,
    오히려 자신의 쾌락이 아닌 다른 것들을 추구할 때 쾌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이유는
    쾌락이 그림자와 같이 종속적인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남기는 후광, 잔여 가치, 보너스인 셈이죠.
    123 이기심과 이타심에대한 나름의결론은 [새창] 2015-12-09 14:04:54 0 삭제
    네, 제가 말하려던 것의 요점은 핑플님이 논점이라고 쓰신 것의 취지와 동일합니다.

    (위에 제가 쓴 대댓글에 이어서 쓴다는게 여기 밑에 와 있네요.)
    122 이기심과 이타심에대한 나름의결론은 [새창] 2015-12-09 08:13:31 1 삭제
    진화론적 설명과 심리적 설명의 연관성 및 차이점

    저는 노란색 빨간색을 좋아합니다.
    슈퍼마켓에서 노랗고 빨간 과일과 야채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쪽으로 끌리고,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죠.
    그걸 그린 그림이나 사진들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아마 노란색이나 빨간색을 가진 과일이나 야채들이 영양가가 높으니까
    그런 색에 끌리는 생물체들은 그렇지 않은 생물체보다 생존률이 높았다는
    식의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런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사진들은 영양가가 없습니다.
    저는 그래도 그런 것들에 심리적으로 끌리고, 좋아하고, 예쁘다고 생각하죠.
    예쁘다는 이유 그 자체가 영양가나 생존률과는 별개로 제게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냥 예쁘니까 찾는거죠.

    우리가 심리적으로 추구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것들도,
    이런식으로 진화론에서 말하는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지만,
    또 거기서 말하는 생존률과는 별개로 독립적인 당위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심리적 동기의 당위적 독립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 뜻을 제대로 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시리라 희망합니다.
    121 이기심과 이타심에대한 나름의결론은 [새창] 2015-12-09 07:30:37 1 삭제
    (1)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논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다수준선택(multi-level selection) 또는 선택 단위(unit of selection)에 대한 논쟁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2) 유전자에게는 이기심이나 이타심이라는 심리적 경향이나 관점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죠 (물론 무의식적인 면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만..).
    또한 유전자는 자신을 위하거나 남을 위하는 목표을 의식하고 의도하며 행동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인과과정을 통해서 움직이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진화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반면 우리는 목표을 세우고 그것을 추구합니다.
    (물론... 목표성이 없는 인과과정을 통해서 심리적 욕구에 따라 목표를 세울 수 있는 생물들이 진화된 것이라고 보고요.)
    그것이 이기적인 목적일 수도 있고 이타적인 목적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에 관한 문제는 의도한 목적을 두고 말하는 거죠.
    아무튼 저는 이 문제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120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5-12-09 05:47:21 0 삭제
    네 앞으로 많은 논의가 필요한 문제를 잘 지적해 주셨네요.

    한국에서는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Patrick Lin이라는 철학자가
    올해 언론에 자주 나와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http://philosophy.calpoly.edu/faculty/patrick-lin

    예시해 주신 바와 같이
    여태껏 서구 윤리학계에서 많이 논의된
    트롤리 문제 (trolley problem, 광차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운전하는 상황에서는 제대로 판단이나 반응도 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상황들을
    미리 대비해서 프로그래밍하는 단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하니까
    논의가 필요하고 논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죠.
    119 무아(anatman) -> 자비심 논증 [새창] 2015-12-08 04:37:56 0 삭제
    관념님: "그러기위해서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데서 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Phil: 네, 어떻게 보면 붓다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내용이긴 하나, 저는 동의합니다.
    Shantideva의 논증에서도 자신에 대한 애착을 남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게 유도하는 방면이 있죠.
    칸트는 자기애(self-love)는 반대했지만 자기존중(self-respect)이 윤리의 시작이라고 말한 적이 있죠.
    마찬가지로 유가에서도 <소학>이라는 책을 보면 "경신"(self-respect)을 중요시합니다.
    역지사지를 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남들도 사랑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면 남들도 존중할 수 없죠.

    앞으로 (아마 내년에) 여기 글에 나온 논증들을 더 자세히 검토하기 위해서
    미리 글을 올렸습니다.
    Thomas Nagel이나 Derek Parfit과 같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미 분석 철학의 윤리학계 쪽에서는
    잘 알려진 철학자들의 다루는 논증들과 유사한
    내용이 여기 담겨져 있어서요.
    더 심층적으로 논의해 보려고 합니다.
    118 무아(anatman) -> 자비심 논증 [새창] 2015-12-08 04:23:27 0 삭제
    올뺌이님: "보살은 인간이 아니라 자비가 발현되는 의식의 속성이구요. 해서 마음은 절대로 자비를 흉내도차 내지 못합니다."

    Phil: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도 타력에 의한 구원이 하나의 큰 갈래(정토교)가 됩니다.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의 실천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퍼온 부분에서 마지막 #120에 "나와 남을 바꾸기"를
    통해서 수행할 수 있다는데요,
    퍼오지 않은 부분에서 더 나오겠죠 (저도 시간이 나면 더 읽어봐야 됩니다,
    철학적 논증이 담겨진 부분만 퍼왔어요).
    출처 링크타고 가시면 더 읽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남을 바꾸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지사지"와 다를 바 없다고
    추정해 봅니다.
    "역지사지"는 인간적으로 가능한 거죠, 바로 감정이입입니다.

    그리고 뜻을 흔들림 없이 이행하려면 온힘을 다하는 의지,
    또는 의무에 대한 충실함이 필요하겠죠.

    이게 공자가 말한 충(忠)과 서(恕)입니다.
    인간적으로 행하기 어렵지만,
    노력해서 나아갈 수 있는 심리적 원동력은 우리에게 갖춰진 것이죠.
    노력은 우리 몫이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거죠,
    유가에서는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117 [질문]자비심과 측은지심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새창] 2015-12-07 18:14:01 0 삭제
    측은지심이 있다는 것은 인간본성이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단서*입니다.
    또한 인(仁)이라는 미덕의 심리적 *시작점* 또는 *발아*입니다.
    측은지심을 키우면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미덕이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키우지 못하면 악용될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죠.

    (4단과 4덕을 구별해야 됩니다,
    측은지심은 4단 중에 하나고, 인자함은 4덕 중에 하나죠.
    여기서 "단"(端)이라는 말은 덕의 "시작점", "단서", "발아"를 뜻합니다.)

    측은지심의 출발점은 없습니다.
    맹자 텍스트에서 찾아본다면 하늘/자연이 우리에게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자연이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그냥 자연스럽게, 저절로, 자발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인위적으로 우리가 교육받는 것과 대조되는 것이죠.
    (물론 맹자나 장자 당시에는 "하늘"이라는 말이 가진 종교적인 의미도 있습니다만,
    동시에 자연스럽게, 즉 외부 원인의 개입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으로 받아들였죠.
    하늘이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 였으니까요.
    몇10년 후 순자는 종교적인 의미도 배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발점* 대신에 윤리적 규범이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기반*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맹자의 입장에서 측은지심은 남의 고통을 덜어주고 자비를 베푸는 행위의 기반입니다.
    이 기반에 더 이상의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는 기반은 없습니다, 맨 밑바닥이에요.

    서양 종교 철학에서 존재에 있어서는 첫 원인이 신이고, 신의 존재의 원인은 따로 없다고 하는 것처럼,
    맹자의 윤리체계 있어서 당위성을 부여하는 기반은 측은지심을 포함한 4단이고,
    그 기반 자체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기반은 따로 없습니다.
    116 무아(anatman) -> 자비심 논증 [새창] 2015-12-07 17:35:32 0 삭제
    저는 영문번역이 더 마음에 듭니다.
    원문의 여러 논증들이 더 정확하게 번역된 것 같아서요.
    예를 들자면, 92~93을 국역한 내용은 잘못 번역되었는지
    제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네요.

    영문 번역문을 읽어보니까 거기에 나오는 논증이 이해됩니다.
    대충 이런 논증이죠:

    내가 겪는 고통이 나 자신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쁜 것으로 느껴지고 없애야 하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남이 겪는 고통도 그들 자신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쁜 것으로 느껴지고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남들의 고통을 직접 체험할 수 없어도 나쁜 것으로 느껴지고 없애야 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115 무아(anatman) -> 자비심 논증 [새창] 2015-12-07 16:56:47 0 삭제
    영문번역 (출처: Chapter 8 "The Perfection of Meditative Absorption" in THE BODHICARYAVATARA: A GUIDE TO THE BUDDHIST PATH TO AWAKENING, by Kate Crosby & Andrew Skilton)

    90. At first one should meditate intently on the equality of oneself and others as follows: ‘All equally experience suffering and happiness. I should look after them as I do myself.’

    91. Just as the body, with its many parts from division into hands and other limbs, should be protected as a single entity, so too should this entire world which is divided, but undivided in its nature to suffer and be happy.

    92. Even though suffering in me does not cause distress in the bodies of others, I should nevertheless find their suffering intolerable because of the affection I have for myself,

    93. In the same way that, though I cannot experience another’s suffering in myself, his suffering is hard for him to bear because of his affection for himself.

    94. I should dispel the suffering of others because it is suffering like my own suffering. I should help others too because of their nature as beings, which is like my own being.

    95. When happiness is liked by me and others equally, what is so special about me that I strive after happiness only for myself?

    96. When fear and suffering are disliked by me and others equally, what is so special about me that I protect myself and not the other?

    97. If I give them no protection because their suffering does not afflict me, why do I protect my body against future suffering when it does not afflict me?

    98. The notion ‘it is the same me even then’ is a false construction, since it is one person who dies, quite another who is born.

    99. If you think that it is for the person who has the pain to guard against it, a pain in the foot is not of the hand, so why is the one protected by the other?

    100. If you argue that, even though this conduct is inappropriate, it proceeds from the sense of self-identity, [our response is that] one should avoid what is inappropriate in respect of self and others as far as one can.

    101. The continuum of consciousnesses, like a queue, and the combination of constituents, like an army, are not real. The person who experiences suffering does not exist. To whom will that suffering belong?

    102. Without exception, no sufferings belong to anyone. They must be warded off simply because they are suffering. Why is any limitation put on this?

    103. If one asks why suffering should be prevented, no one disputes that! If it must be prevented, then all of it must be. If not, then this goes for oneself as for everyone.

    104. You may argue: compassion causes us so much suffering, why force it to arise? Yet when one sees how much the world suffers, how can this suffering from compassion be considered great?

    105. If the suffering of one ends the suffering of many, then one who has compassion for others and himself must cause that suffering to arise.

    106. That is why Supuspacandra, though undergoing torture at the hands of the king, did nothing to prevent his own suffering out of sacrifice for many sufferers.

    107. Those who have developed the continuum of their mind in this way, to whom the suffering of others is as important as the things they themselves hold dear, plunge down into the Avici hell as geese into a cluster of lotus blossoms.

    108. Those who become oceans of sympathetic joy when living beings are released, surely it is they who achieve fulfilment. What would be the point in a liberation without sweetness?

    109. In fact, though acting for the good of others, there is neither intoxication nor dismay, nor desire for the resulting reward, with a thirst solely for the well-being of others.

    110. Therefore, just as I protect myself to the last against criticism, let me develop in this way an attitude of protectiveness and of generosity towards others as well.

    111. Through habituation there is the understanding of ‘I’ regarding the drops of sperm and blood of two other people, even though there is in fact no such thing.

    112. Why can I not also accept another’s body as my self in the same way, since the otherness of my own body has been settled and is not hard to accept?

    113. One should acknowledge oneself as having faults and others as oceans of virtues. Then one should meditate on renouncing one’s own self-identity and accepting other people.

    114. In the same way that the hands and other limbs are loved because they form part of the body, why are embodied creatures not likewise loved because they form part of the universe?

    115. In the same way that, with practice, the idea of a self arose towards this, one’s own body, though it is without a self, with practice will not the same idea of a self develop towards others too?

    116. Though acting like this for the good of others, there is neither intoxication nor dismay. Even after giving oneself as food, there arises no hope for reward.

    117. Therefore, in the same way that one desires to protect oneself from affliction, grief, and the like, so an attitude of protectiveness and of compassion should be practised towards the world.

    118. That is why the Protector, Avalokita, empowered even his own name to drive away even such fear as the shyness people have in front of an audience.

    119. One should not turn away from difficulty, because by the power of practice the very thing one once feared to hear becomes something without which one has no delight.

    120. Whoever longs to rescue quickly both himself and others should practise the supreme mystery: exchange of self and other.
    114 [질문]자비심과 측은지심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새창] 2015-12-07 13:06:10 0 삭제
    생체님: "(선한마음------->측은지심)"

    Phil: 글쎄요. 인의예지를 합한 것이 "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측은지심이 인, 즉 선의 일부분(=인)의 심리적 출발점입니다.
    측은지심이라는 마음의 씨앗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죠.
    (여기를 참조하셔도 됩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9810 )

    생체님: "자비심은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타자에의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행복해질려면 자비심을 가져야한다 라는게 출발점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Phil: 대충 그렇게 이해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더 자세한 논증은 대승불교의 경전에서 찾기 힘들지만 제가 이것에 대해서 글을 하나 올리겠습니다.
    113 [질문]자비심과 측은지심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새창] 2015-12-07 03:27:34 0 삭제
    아... 측은지심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차등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112 [질문]자비심과 측은지심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새창] 2015-12-07 03:09:54 0 삭제
    (1)
    대승불교의 자비심에 대한 가르침은
    파생적인 것이라서
    보다 더 근본적인 불교의 가르침에서 끌어낸 것이고,

    맹자/성리학의 측은지심에 대한 가르침은
    인(仁, 인자함)이라는 미덕을 끌어낼 수 있는
    심리적 근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전자는 파생적, 후자는 근본적이라는 측면에서
    다릅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근본"은 정당성에 대한 근본입니다.

    불교에서는 남을 위한 자비심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냐라는 질문을 물어볼 수 있죠.
    그러면 아마 각자가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이나,
    모든 것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타자에 의존하혀 존재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내세워서 자비심을 정당화시킬 것입니다.

    반면에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은 다른 가르침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왜 다른 사람들에게 인을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남의 고통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에게 인자한 행동/정책을 일관성 베풀어야 된다는 거죠.

    여기서는 제가 보기에 맹자가 진실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만,
    지금은 좀 바쁘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논의를 해보죠.

    (2)
    불교의 자비심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베푸는 것이지만
    맹자의 측은지심은 가족을 타인보다 더 중요시하는 차등적 사랑입니다.
    (차별적 사랑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동물이나 심지어 식물에게도 측은지심을 느껴야 하지만
    심리적으로 측근을 더 중요시하는 마음을 하나의 윤리적 원칙으로 반영한 것이죠.)

    그래서 불교의 자비심은 맹자의 측은지심보다 묵가의 겸애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서 저는 맹자의 측은지심이 틀렸다고 봅니다.
    이 것에 대해서도 여기서는 이러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만 제기하고
    일단 멈추겠습니다.
    111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5-12-02 01:44:29 0 삭제
    제가 철학을 본격적으로 해 본지가 오래되서, 글에 초점이 없고 논리정연하지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작성자님이 제기한 문제 중 하나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충돌 속에서 누가 윤리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어려운 문제인데.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려고 시도해 본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아니면 틀린 경우에도, 자기 합리화에 쓰일 수도 있는 것이죠.
    작성자님 고민 중에 하나가 이것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고민이 있을 경우에는 인간의 본성과 내 자신의 마음 속에서 보편적인 특징을 가진 심리 현상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윤리 체계를 재구성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철학사를 본다면, 유가와 묵가가 한창 누구의 윤리사상이 옭고 누구 것이 다르냐라고 시비를 가릴때
    양자와 그의 제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윤리의 기반으로 삼고,
    인간의 본능적 욕구나 감정을 살펴보면,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따라서 개인의 생명과 본능적 욕구의 충족을 중요시하는 이기주의를 주장했죠.

    여기서 맹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도 하고
    (오로지 먹고 생식하는 삶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념에 따라 사는 삶을 더 중요시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모르는 아기가 우물속에 빠지려하는 장면을 갑자기 목격하게 된다면 누구나 다 측은지심을 느끼며
    구하려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감정이입이라고 하는 것은 측은지심과 비슷한 것이죠.
    함께 오래 동거한 부부들은 얼굴이 비슷해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어떤 표정을 지으면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자동적으로 그 표정을 따라하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몇십년간 특정한 사람과 같이 하다보면 얼굴이 비슷해 지는 거죠.

    그리고 남의 얼굴의 표정을 따라하면서 자신의 얼굴이 움직이게 되면 그 움직임에 따라
    구심신경(afferent nerve)을 통해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자신이 느끼게 되는 것이죠.
    이 과정이 감정이입이나 역지사지의 생물학적/심리학적 기반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나 동감력을 가지고 있고, 동감력과 이성을 통해서 남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맹자의 예를 들자면 제나라 선왕에게 전쟁을 멈추고 백성들을 위한 인정(仁政)을 베풀어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한번은 왕이 어느 소 한마리가 제사에 쓰기 위해 끌려가는 것을 보고 불쌍해서 풀어주라고 그랬답니다.
    그러니까 소를 끌고가던 사람이 "그럼 제사를 어떻게 치르죠?"라고 물으니까
    왕이 양 한마리를 대신 쓰면 되지 않겠냐고 그럽니다.
    일관성이 없는 행동이죠. 양도 불쌍한 건 마찬가지니까요.
    그래서 맹자가 그걸 지적하니까 왕도 인정하는 것이에요,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맹자는 동정심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답합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끼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못 느낀다고요.
    그래서 그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 같은 종류의 케이스에도 다 일관성있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백성들도 왕의 호전적 정책에 의해서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인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죠. 합리적으로 일관성있게 따져보면 왕이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거죠.
    이런 설득법을 묵가나 맹자 학파에서는 밀어내기(推 추)라고 합니다.
    "너가 이러이러한 케이스에 대해서 이러한 판단을 내렸으면 다른 비슷한 케이스에서도 똑같은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도 그들의 본성에 어필하면서 밀어내기를 통해 설득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

    죄수의 딜레마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가상적 존재들에게만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실제 상황에는 적용할 수 없죠.
    실제 인간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 처럼 자기 자신의 이익 만을 철저히 극대화 시키는 동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는 식당에서 언제나 팁을 꼭 줍니다.
    단순히 단골이라서 주는게 아니고,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 가서
    단 한번만 방문하는 식당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팁을 준다는 연구가 나왔죠.
    경제학의 이성적인 행동에 대한 표준 모델,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모델을 가지고는
    팁을 주는 단순한 행위도 해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이 이런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라는
    이론을 들고 나옵니다.
    대충 말하자면 실제인간들은 이성적으로 불완벽하기 때문에 그것을 감안해야 된다는 이론입니다.
    뭐 물론 그런것도 있겠지만,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가상 동물이 이성적으로나 본성적으로 결핍된 것이 전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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